103화 뉴욕 소더비 경매장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인근의 미술관으로 들어서자 정장룩 차림의 제시카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그녀는 나른 안내하며 미술 작품에 대해서 나름 해박한 식견을 과시했다.
특히 그녀는 인상파 화가의 태산북두인 피카소의 열성팬이었다.
그런 탓인지 피카소에 대해서 한참 동안 떠들어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녀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주 금요일에 소더비 경매장에서 피카소의 유작을 경매할 예정인데, 자기는 관심없니?"
"미술에 관해서 문외한이라..."
말끝을 흐리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예술성은 물론이고, 투자가치도 아주 높다니까. 서너배 이상의 시세차익을 볼 수 있다고."
그녀 말대로 피카소의 그림은 투자가치가 높았다.
2020년 경에 그의 유작은 최소 5천억 이상으로 거래될 예정이었다.
내가 경험한 미래가 그랬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피카소의 그림을 매입하고픈 욕망이 격하게 치솟았다.
제시카 덕분이었다.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경매 예정가가 얼마지?"
제시카가 즉답했다.
"아무리 못해도 6천만불 이상이겠지. 왜, 관심 있어?"
"조금."
"역시 우리 자기는 재력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호호..."
"잘 아는구나. 하하..."
내 입에서 절로 흐뭇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날 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대거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투자가치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뇌물로 사용하기에 적절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일까, 오르세 미술관의 이서연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녀가 관리하는 오르세 미술관은 대영재단 산하에 있었다.
당연히 내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는 죽은 이성모의 와이프였지만, 홍대에 위치한 2백억 내외의 상가빌딩을 상속받은게 전부였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마음을 정한 뒤, 한국에 있는 박은영 팀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틀 후, 뉴욕.
호텔방에서 티타임을 즐길 무렵,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이서연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일체 하지 않은 채,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뉴욕으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리 말하며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목례를 취한 뒤 소파에 조신하게 착석했다.
"마실거라도 드릴까요?"
"아뇨. 됐어요. 그보다는 부회장님이 저를 청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피카소와 반고흐, 엔디 워홀의 미술품을 대규모로 매입할 계획입니다. 물론 대영재단 산하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서연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서연씨의 연봉을 지금보다 300%이상 인상할 방침입니다."
"괜찮아요. 저는 지금 연봉도 만족하거든요. 저한테 너무 잘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부회장님."
그녀는 내 호의를 극구 사양했다.
내 여자가 되기 싫은 눈치였다.
그렇지만, 나는 서연의 연봉을 대폭적으로 인상할 생각이었다.
"연봉이 고작 10억 정도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수용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내년부터 30억 내외의 연봉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내 강권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부회장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하게 받아들일게요. 고마워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하하하..."
내 입에서 절로 흡족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웃음 소리가 가라앉자 서연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질문을 해왔다.
"정말 해외 유명작가들의 미술품을 대거 구입하실 생각인가요?"
"네. 최소 10작품 이상 매입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녀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안그래도 부회장님에게 그런 제안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너무 잘됐네요."
서연은 그리 말하며 고혹적인 눈빛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내가 조금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
서연을 대동한 채 그리니지 빌리지로 발걸음을 향했다.
우리는 서너군데의 미술관을 둘러본 뒤 인근의 노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노천 테이블에서 커피를 음미하며 맞은 편에 앉은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일 소더비 경매장에서 피카소의 유작을 매입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와 같이 그 곳으로 가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당연히 가야죠. 우리 미술관에 걸릴 작품을 매입하는 일인데."
그녀는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미술관장의 직업 본능이 발동된 탓이었다.
다음날.
이서연과 뉴욕 소더비 경매장을 찾았다.
피카소의 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누드, 녹색 옆과 상반신'이라는 미술품을 구매하기 위함이었다.
피카소의 이름 값이 있는 탓인지 경매 보증금만 500만불이 넘었다.
돈 없는 사람은 경매에 나설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경매장 안에 들어서자 특유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들 모두 피카소의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나는 오늘, 피카소의 작품을 1억불(1,200억) 내외로 인수할 계획이었다.
그런 이유로 경매가 시작했음에도 느긋한 심경으로 장내의 상황을 묵묵히 주시했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입찰이 시작되마자 너나 할거 없이 본호판이 쓰여진 팻말을 재빨리 들어올렸다.
그런 탓인까, 입찰 가격이 눈깜박할 새에 5천만불을 돌파했다.
상황이 이에 달하자 소더비 측은 입찰 단가를 백만불 단위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 탓인지 경매장이 한층 더 뜨거워졌다.
소더비 측 사회자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입찰 가격이 5,200만불을 돌파했습니다!"
"입찰 가격이 6,400만불을 돌파했습니다!"
"입찰 가격이 드디어 9,900만불을 돌파했습니다!"
갑자기 경매장에 깊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1억불 고지를 목전에 둔 탓이다.
그런 때문일까, 너무 높은 가격에 부담을 느꼈는지 경매 참가자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저으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나에게 주어진 번호판을 슬쩍 들어올리자 사회자가 반색하는 얼굴로 외쳤다.
"앞으로 다섯을 카운트 하겠습니다. 그 안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99번 고객님에게 피카소의 유작을 낙찰하겠습니다."
사회자가 곧바로 카운트를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예상대로 아무도 번호판을 들지 않았다.
피카소의 그림을 낙찰받는 순간이었다.
***
스위스 은행 계좌에서 인출한 9,500만불을 소더비의 공식 계좌에 이체했다.
그 후, 무장 경비원의 호위 하에 피카소의 작품을 호텔방으로 옮겨놓았다.
그날 오후.
아담 상원의원이 보내준 무장 경호원들이 호텔방에 나타났다.
책임자인 조너선 경호팀장에게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48시간 동안 호텔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미술품을 지켜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미스터."
경호원들을 뒤로한 채 호텔방을 나섰다.
그날 오후.
이서연과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며 향후 계획에 대해서 담소를 이어나갔다.
"서연씨는 당분간 뉴욕에 체류하면서 피카소와 반 고흐, 엔디워홀의 작품을 매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그녀가 곤혹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현대미술과 고전 미술 전시회를 다음주부터 한달 동안 연속으로 개최할 예정이라... 시간이 안될거 같아요."
서연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분에게 대리구매를 제의하는 게 어떨까요?"
순간, 홍보기획사에서 일하는 제시카의 아름다운 얼굴이 심중에 떠올랐다.
그녀는 나름 미술품에 조예가 깊었다.
제시카에게 미술품 대리 구매를 부탁하는 게 나을거 같았다.
그렇게 입장을 정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저도 웬만하면 부회장님 제안에 응하고 싶은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잔뜩 지었다.
"내일 모레 비행기로 한국으로 같이 들어갑시다."
"예. 부회장님."
***
맨해튼 인근의 쥬얼리 샵에서 시가 1백만불에 달하는 다이아 목걸이를 구입했다.
쓸만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그녀에게 나름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제시카를 호텔 레스토랑으로 불러들였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끝마친 뒤 보석함을 내밀었다.
제시카가 감동한 얼굴로 내 품에 안겨왔다.
"고마워. 자기야. 너무 아름다운 목걸이야."
"당연하지. 백만불이 넘는 다이아 목걸인데."
그녀의 뽀얀 목덜미에 다이아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계약금이라고 생각해라."
"계약금?"
"그래."
"생뚱맞게 그게 무슨 말이야?"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술품을 대리 구매해 줘."
그녀는 금세 내 말의 진의를 파악했다.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매입해 달라는 뜻이니?"
"그래. 돈 걱정은 하지 말고, 피카소와 반고흐, 엔디워홀 작품이 경매장에 나타나면 무조건 매입해."
제시카가 기대만발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수수료는 얼마나 챙겨줄건데?"
"건당 1백만불(12억)."
"오마이갓!"
그녀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내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우리는 그날 밤, 또 다시 청춘의 열정을 온몸으로 몸살랐다.
***
한국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이서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창가 테이블에 앉은 채 미술품 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중이었다.
서연을 향해 여자들이 환장하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뭘 그리 열심히 보시는 거죠?"
그녀는 책에서 눈을 떼며, 화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현대 미술작품을 심층 분석한 책이에요. 이것만 읽어도 현대미술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수 있죠. 부회장님도 한번 보실래요?"
"저는 됐습니다. 그거 아니라도 머리가 많이 아프거든요. 허허..."
그리 말하며 2층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16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갈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저 멀리 사라지는 서연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오롯이 감상한 뒤 롤스로이스 쪽으로 걸어갔다.
김태구 경호팀장이 뒷문을 열어주었다.
잠시후 나를 태운 롤스로이스가 공항 주차장을 힘차게 빠져나왔다.
상암동 켄싱턴 빌딩에 도착한 뒤 130층 펜트하우스로 직행했다.
샤워를 끝마친 후 창가를 서성이며 이서연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성품도 고왔다.
내 여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간은 많았다.
차츰 분위기를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서연은 저절로 내 품에 안길 운명이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서연의 매혹적인 모습에 흠뻑 빠져들 찰나, 김태구 경호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한국당의 박철용 의원이 면담을 신청하셨습니다."
빅철용은 이영박의 최측근 인사였다.
"들여보내세요."
"네. 부회장님."
잠시 후, 박철용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용건을 꺼냈다.
"대영물산이 강남에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시다피시 이 후보님은 신세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드리고 싶은데, 금전적으로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강남에 건설 중인 주상복합 아파트 30채 정도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대영물산은 삼성동 인근에 900세대 규모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었다.
가구당 최소 30억 이상의 가격으로 분양될 예정이었다.
이영박은 그런 고급 아파트를 30채나 공짜로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시가로 천억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너무 과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천억에 달하는 리스크를 나 혼자 떠안으라는 말씀입니까?"
그가 양팔을 맹렬히 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공짜로 달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부회장님에게 약속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후보자님은 대통령에 당선되시면 사대강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할 예정입니다. 최소 60조원 규모죠. 그 사업을 대규모로 수주할 권한을 부회장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조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이영박은 사대강 사업을 대통령 공약으로 내건 상황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럼 결심이 서시면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박철용은 그 말을 끝으로 펜트하우스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
이영박은 돈 욕심이 남달랐다.
그는 오래전부터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자'라는 마인드를 뼛속 깊이 아로새겼다.
그런 마인드는 김한빈과의 관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영박은 강남 요지에 들어서는 대영물산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눈여겨봤다.
그런 이유로 한빈에게 30채에 달하는 아파트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한빈이 자신의 요구를 수용할 거라고 100% 확신했다.
사대강 사업의 이권 때문이었다.
***
상해 동방명주 호텔 펜트하우스.
진한 눈썹이 트레이드 마크인 중년 남자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영그룹의 김한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죽여라!"
그의 면전에 우두커니 서 있던 굴강한 체격의 남자가 큰 목소리로 복명했다.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