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자본주의는 돈이 최고다
박종태는 태산조선의 김영식 전무가 거액의 회사 자금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했다.
하지만 감사팀 능력으로는 그의 비위증거를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차명으로 만든 해외 금융계좌를 이용해서 돈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사실을 김한빈에게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130층 펜트하우스에서 아침 식사를 할 무렵, 박종태가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진지한 자세로 보고를 올렸다.
"태산조선의 김영식 전무가 거액의 회사자금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그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해외 비밀 계좌를 이용해서 돈 거래를 했기 때문에, 증거를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형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보고는 그만하시고 식사나 같이 합시다."
그러자 종태가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부회장님."
그는 나와 겸상을 하는게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 지위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높아졌다.
종태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늘처럼 높은 사람일 터였다.
그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이만 나가보세요."
"예. 부회장님."
종태는 공손히 하직인사를 올린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사라졌다.
태산조선은 사업 특성상 거액의 리베이트가 오가는 탓에 경영진들이 마음만 먹으면, 중간에서 착복이 충분히 가능한 구조였다.
그런 때문인지, 리베이트와 관련된 금품수수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식은 횡령한 리베이트 자금을, 차명으로 보유한 해외 비밀 계좌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안봐도 비디오다.
이런 일은 이태강이 전문이었다.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돌렸다.
***
태산조선의 김영식 전무는 능통한 아랍어를 바탕으로 중동 현지의 바이어들과 돈독한 인맥을 구축했다. 그런 이유로 리베이트 거래를 거의 주도하다시피 했다.
김영식은 중동 바이어들과 오랜 기간 리베이트 거래를 해오면서 내면에 잠재된 욕망이 자연스럽게 발화됐다.
바이어에게 건네야하는 거액의 리베이트 자금 중에서 일정 부분을, 차명으로 설립한 비밀 계좌에 차곡차곡 적립한 것이다. 원래 그 돈은 회사 공금에서 인출된 자금이었다.
하지만 그는 리베이트 자금을 탐욕스럽게 횡령하는데 전심전력했다. 그 덕분에 수백억대의 자산을 축적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김영식의 좋은 시절은 태산조선에 차연호 신임 사장이 나타난 이후 차갑게 식어버렸다.
차연호는 중동 바이어를 전담하는 김영식에게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그가 리베이트 자금을 중간에서 착복한다는 소문이 회사내에 파다하게 나돈 탓이다.
결국 그는 박종태 감사실장에게 김영식을 대상으로 하는 강도 높은 감사를 요청했다. 회사의 책임자로서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는 그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늦은밤.
김영식은 자택의 서재를 서성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회사에서 자신을 목표로, 강도 높은 감사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허나, 영식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 때문일까, 그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내걸렸다.
'해외 비밀 계좌에 적립된 자금을 제깟놈들이 무슨 재주로 밝혀낸단 말인가? 웃기는 개짓꺼리지. 후후...'
그의 조소어린 내심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고 검찰에 신고하면 내가 가만히 있을거 같아. 중동 바이어들에게 리베이트로 넘어간 회사 자금을 모조리 공개해 버리면 회사 입장도 난처해질게 뻔한데. 낄낄낄...'
영식은 회사가 자신을 못건드릴 거라고 확신했다.
현행법상 리베이트 제공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런 탓일까, 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이 활짝 만개했다.
회사가 절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
상지원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우리는 거실에 마련된 라운지에서 칵테일을 음미하며 본론에 돌입했다.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금융조세부 검사한테 물어봤더니 해외 계좌를 수사하는 게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는 별건 수사로 놈을 터는게 좋아보이거든."
"별건 수사를 이용해서 놈을 압박하자는 말인가요?"
"그렇지. 자녀들을 대상으로 손을 보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김영식의 자녀들 중에서 문제가 될 만한 친구가 있나요?"
"당연히 있지. 그래서 내가 이런말을 꺼낸 거라고."
"말씀해 보세요."
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명문대학에 재학 중인 큰 아들이 클럽에서 친구들과 약을 했다가, 해당 관할 경찰서의 집중 단속에 걸려들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당연히 김영식이 돈을 이용해서 아들놈을 무사히 빼냈지."
"경찰서장에게 돈을 먹인 건가요?"
"맞아."
"언제 발생한 사건이죠?"
"한달전이라고 하더군."
"아들놈 사건을 다시 발굴해 보세요. 그리고 일이 마무리 될 즈음에 김영식을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태강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배웅한 뒤 태산조선의 리베이트 관행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원래 조선 산업은 리베이트가 필수 거래조건이었다.
중동과 유럽의 발주처 관계자들은 항상 리베이트를 요구했다.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베이트를 거절할 경우, 선박 자체를 수주받지 못하게 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무렵, 하동균 비서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청첩장을 내밀었다.
청첩장을 살피자 박은영과 신랑의 이름이 보였다.
시원섭섭한 심경이었다.
내 여비서였던 은영이 결혼을 하는 까닭이다.
책상 서랍에서 1억원 짜리 수표 3장을 꺼내서 하동균에게 건넸다.
"부조금으로 내십시오. 그리고 비서실 공금으로 1억 가량을 추가로 부조하십시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중앙지검 강력부 취조실에 장수영 검사가 나타났다.
장 검사는 취조실 책상에 겁먹은 얼굴로 앉아 있는 김창욱을 매섭게 몰아부쳤다.
"서울과 수도권 클럽에서 대량의 약물을 유통했더군. 거의 150억이 넘는 물량이던데,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숨겼지?"
김창욱은 미칠 지경이었다.
"저는 그냥 단순히 호기심 차원에서 약물에 손을 댔을 뿐이라구요. 약물 유통같은건 전혀 모른다니까요!"
허나, 장 검사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 눈치였다.
"네놈이 약물 유통의 주범이라는 증언을 이미 확보한 상태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더 이상 거짓을 말하지마라."
장 검사는 그 말을 끝으로 취조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직후, 다부진 체격의 검찰 수사관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 가죽 장갑을 손에 착용한 채 비릿한 조소를 내뱉었다.
"딱 서른대만 맞자."
그 말과 동시에 검찰 수사관의 묵직한 주먹이 김창욱의 몸통에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크아아아아악...!"
창욱의 요란한 비명이 취조실에 길게 울려퍼졌다.
***
용인 CC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즐길 무렵, 이태강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김창욱의 자술서가 들려있었다.
자술서를 대충 살핀 뒤, 태강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제 슬슬 김영식을 손 봅시다."
"중앙지검으로 끌고 올까?"
"거기 보다는 사적인 장소에서 합의를 보는게 나을거 같아요."
"김회장이 직접 나설 생각인가?"
그 역시 나를 회장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저보다는 형님이 직접 나서 주십시오. 중앙지검장 타이틀 정도는 있어야, 그자가 겁을 먹을 겁니다."
"그럼 김회장이 자리를 만들어 보라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골프채를 힘차게 휘둘렀다.
따악!
***
김영식은 황망한 심경이었다.
그의 외동아들인 김창욱이 수도권 클럽가에서 약물 유통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전격적으로 구속된 탓이다.
영식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은 뒤 유명 로펌의 문을 두드렸다.
허나, 이렇다할 도움을 받지 못했다.
김창욱이 검찰에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한 까닭이다.
그 무렵, 이태강 중앙지검장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아들의 구명을 위해 이태강과 만나기로 결심했다.
늦은 밤.
서울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이태강과 김영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태강은 면전에 마주 앉은 영식에게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아드님을 살리고 싶으시면, 해외 비밀 계좌에 빼돌린 회사 자금을 고스란히 토해내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아드님을 무혐의로 석방해 드리겠습니다."
영식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배후에 부회장님이 계신 겁니까?"
태강은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영식은 저간의 사정을 단박에 파악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그 돈은 제가 피땀흘려 모은 돈입니다. 회사 공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습군요. 리베이트 자금을 중간에서 착복한 주제에 그런 말이 나오시는 겁니까?"
태강의 입에서 싸늘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영식의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다.
그런 탓일까, 태강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올리며 섬뜩한 언사를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아드님에게 법정 최고 형량인 8년형을 선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댁의 아드님이 혹독한 교도소 생활을 8년 동안 견뎌낼지 한번 두고 봅시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교도소는 아주 험한 곳이죠. 고기 한점 더 먹기 위해서 동료 죄수들에게 칼침을 휘두르는 미친놈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내가 장담하는데 댁의 아드님은 교도소에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못 나올 겁니다. 후후..."
영식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교도소에서 동료 죄수들에게 잔인한 집단 폭행을 당하는 창욱의 모습이 뇌리에 저절로 떠올랐다.
그는 양쪽 머리카락을 두손으로 격하게 움켜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태강은 영식의 그런 모습에 조소어린 시선을 보냈다.
***
상지원의 정원을 산책할 즈음, 이태강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노란 봉투를 전달했다.
봉투 속에는 해외 계좌의 CD 여러장이 들어있었다.
총합 3,500만불(420억)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태강이 은근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아들놈을 미끼로 하니까 돈을 순순히 내놓더라고. 등신같은 놈이."
김영식이 토해낸 CD를 태강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받으세요. 용돈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러자 녀석의 입이 귓가에 내걸렸다.
"이 돈을 정말 나에게 주는거야?"
"원래부터 형님한테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받으세요."
태강이 좋아죽는 얼굴로 CD를 넙죽 받았다.
"역시 김 회장 배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우하하하..."
그의 입에서 요란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강을 돌려보낸 후, 김영식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은 뒤 박종태 감사실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눈 앞에 나타난 종태에게 지시를 내렸다.
"김영식이 상지원에 올 겁니다. 놈이 도착하면 따끔한 손맛을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종태를 뒤로한 채 상지원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 후, 서교호텔로 직행했다.
이영박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
서교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서자 이영박과 참모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중년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영박이 그를 소개해 주었다.
"내 사적인 일을 처리해주는 사람입니다. 수행비서라고 생각하면 될 거에요."
남자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수행비서 따위와 인사를 나누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그를 본체만체하며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런 탓일까, 남자가 분한 얼굴로 나를 잠시 동안 노려본 뒤 스위트룸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영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김 회장을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나를 회장으로 호칭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내 알 바 아닙니다."
"허허..."
영박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역시 내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영박에게 확실히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나는 돈이 억수로 많습니다. 타인의 시선 따위에 휘둘릴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주제넘는 충고 따위는 나에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며 준비해온 CD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미화로 1억불(1,200억)에 상당하는 돈입니다. 앞으로도 내 돈을 꾸준히 받아먹으려면 후보님도 말씀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영박은 돈의 노예였다.
그런 때문일까, 나를 향해 공손히 화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주제넘는 발언을 일체 삼가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스위트룸을 박차고 나왔다.
***
김영식은 상지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종태를 필두로한 범강장달같은 경호원들에게 혹독한 참교육을 받았다.
그날 이후, 영식은 새사람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