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24조원을 날로 먹다
현도중공업은 조선과 중화학 플렌트 전문 기업이었다.
특히 조선 분야에서 전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선박 수주량을 자랑했다.
하지만 현도중공업의 홍재형 회장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무섭게 치고 올라는 태산조선을 잔뜩 경계한 탓이다.
늦은 밤.
홍 회장은 자택의 서재를 서성이며 조선업계의 라이벌인 태산조선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얼굴 가득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직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통화가 연결되자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산조선을 인수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그는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서 조선업계의 선두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기로 작심했다. 나름 승부사다운 면모였다.
며칠 후.
현도중공업의 도진우 기획조정실장이 태산그룹 본사에 나타났다.
태산조선의 인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
강남 클럽에서 재벌가 로열패밀리들과 흥겨운 시간을 즐길 무렵, 진대현 본부장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재벌가 지인들을 뒤로한 채 클럽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빠져나왔다.
그 후, 차 안에서 진대현과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현이 긴급 보고를 올렸다.
"현도중공업이 태산조선 인수의사를 밝혔습니다."
"공식적으로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홍재형 회장이 직접 인수 오더를 내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태산조선을 인수하려는 이유가 뭐죠?"
대현이 즉답했다.
"조선업계의 쉐어를 과반수 이상 장악하려는 의지 같습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안그래도, 현금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그런 탓일까, 현도중공업의 제안을 내심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오래전부터 태산그룹의 돈될 만한 자산을 매각할 계획이었다.
그 시점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다.
"태산조선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대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못해도 6조원은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6조원이라...?"
"네. 부회장님."
"태산조선의 부채가 얼마죠?"
"1조7천억 수준입니다."
"부채를 제외하면 4조3천억 정도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내 목표는 최소 6조5천억 이상의 가격으로 태산조선을 매각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현도중공업 측에 6조5천억을 매각가로 제시하십시오."
대현이 씩씩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보너스를 쏠쏠하게 지급해 드릴테니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
진대현은 거액의 보너스가 걸린 태산조선 매각 작업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런 때문일까, 이른 아침부터 현도중공업의 본사빌딩을 방문했다.
도진우 기획조정실장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기조실장 사무실에 들어선 대현은 도진우와 악수를 교환한 뒤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태산그룹은 조선 부문의 매각가를 최소 6조5천억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니 귀사도 우리 회사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도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명했다.
"매각가의 산출 작업은 공신력 있는 회계업체의 정밀 실사를 바탕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현도중공업 측의 주장이고, 우리 태산그룹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회계업체의 정밀 실사작업에 협조해 주십시오. 인수가격은 그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정밀 실사 작업이 준비되는 즉시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그럽시다."
대현은 현도중공업 빌딩을 벗어나자마자 한빈에게 전화상으로 긴급 보고를 올렸다.
***
주말 오후.
상지원의 넓다란 침실에서 운기행공에 전심전력했다.
단학서적에 나와있는대로 전신 대주천을 돌리자 온몸이 강렬한 생동감에 휩싸였다. 더불어 용솟음치는 에너지가 사지백해를 성난 야생마처럼 질주했다.
이 맛에 전신 대주천을 돌리는 모양이었다.
운기행공의 무아지경에 깊숙이 몰입할 즈음, 문 밖에서 김태구 경호팀장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대영투자신탁의 유정복 사장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뭔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새였다.
가부좌를 푼 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접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유정복이 송구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책상 의자에 좌정한 채 면전에 서 있는 유정복에게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습니까?"
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금감원과 공정위에서 회사의 수탁자산을 대영전자 주식에 투자하는 행위를 일감 몰아주기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영투자의 수탁자산을, 대영전자 주식에 투자하는 행위를 정부에서 불허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면목이 멊습니다."
"정부의 경고를 무시할 경우, 어떤 후환이 뒤따르는 겁니까?"
"모르긴 몰라도, 최소 수천억대의 징벌적인 과징금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책임자의 법저처벌도 어느 정도 감수하셔야..."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현 정부와 각을 세워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태산조선을 매각한 자금으로 대영전자 주식을 매입하는 게 최선이었다.
유정복을 내보낸 뒤 대영전자 주식을 대규모로 매입하는 방안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대영전자의 과반수 지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17% 가량의 주식을 매집해야 하는 처지였다. 돈으로 환산할 경우 거의 33조원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태산조선을 매각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과반수 지분을 획득하는데 턱 없이 모자른 자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에서 200억불(24조원) 내외의 자금을 조달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때, 아주 쓸만한 아이디어가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곧바로 월가의 거물인 제퍼슨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상암동 켄싱턴 빌딩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하동균 비서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전 비행기로 뉴욕에 갈 생각이니까 전용기를 대기하세요."
"호텔 예약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일이 급하니까, 현지에서 방을 잡읍시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
우리 일행을 태운 전용기가 존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 후, 센트럴파크 인근의 포시즌 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텔 라운지의 푹신한 소파에서 커피와 흡연을 만끽할 찰나, 하동균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위트룸이 만석이라, 일반 룸 밖에 빈 방이 없다고..."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일반룸 2개를 체크인 하세요."
그제야 하동균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화답했다.
"예. 부회장님."
잠시 후, 동균을 대동한 채 일반 객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13층에 도착한 뒤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팀장님도 피곤하실텐데, 오늘 밤은 호텔방에서 편하게 쉬십시오."
동균이 반색하는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부회장님."
녀석은 그리 화답하며 1306호 실로 재뻘리 들어갔다.
그를 호텔방에 들여보낸 뒤, 1304호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배가 출출했던 관계로 룸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얼큰한 한식이 먹고 싶었다.
포시즌 호텔은 한식을 제공하는 호텔인 탓에, 내 주문을 선뜻 수용했다.
30분 후.
얼큰한 육개장과 하얀 쌀밥이 호텔방에 공수됐다.
서비스맨에게 100불짜리 팁을 전달하자, 나를 향해 동양식으로 허리를 숙였다.
마음에 드는 자세였다.
그를 내보낸 뒤, 육개장 국물에 하얀 쌀밥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그 뒤, 봄날에 게눈 감추듯 육개장과 쌀밥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타고난 먹성이 좋은 탓이었다.
가그린으로 입안을 세척한 후, 호텔 지하 라운지바로 밤마실을 나갔다.
***
포시즌 호텔은 고급 호텔이라 그런지, 뉴욕의 잘나가는 신사숙녀들이 지하 라운지바를 빼곡히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뉴욕의 홍보회사에서 일하는 제니퍼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그녀는 비번이었다.
제니퍼는 뉴저지에서 살고 있었다.
맨해튼과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이었다.
이 시간에 불러내기가 뭐했다.
결국 그녀에게 나중에 만나자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후로도 핸드폰의 전화목록을 뒤적거리며 연락할 여자가 없는지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허나, 이렇다할 연락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절로 허탈한 심경에 젖어들었다.
이국만리 타향에서 말 한마디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던 까닭이다.
바로 그때, 내 옆자리에 금발의 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포시즌 호텔의 스위트룸을 담당하는 젬마 화이트였다.
나름 이 호텔 스위트룸의 단골인 관계로 우리는 서로 안면이 있었다.
젬마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는체를 해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우리 호텔에 오신 건가요?"
"일이 급하다보니 예약할 겨를이 없더군요. 허허..."
그녀의 말대로 나는 호텔방을 예약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뉴욕을 방문한 탓이었다.
"아! 그러시구나. 저에게 연락을 주셨으면, 당일이라도 스위트룸을 빼드렸을텐데..."
젬마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지금 근무시간이 아닌가요?"
"네. 오프 시간이에요. 집에 가기 전에 칵테일이나 한잔 하려고 들렸어요."
"잘됐네요. 안그래도 심심했는데."
그리 말하며 바텐더를 손짓했다.
"숙녀분에게 진토닉 한잔 부탁드립니다."
"네. 미스터."
그녀는 내가 건네는 진토닉을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연거푸 서너잔 가량의 진토닉을 더 마셨다.
그녀가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봐야 할거 같아요."
"어차피 술도 마셨는데, 운전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요?"
젬마가 난처해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바로 그녀에게 2차를 제안했다.
"내 호텔방에서 한잔 더 합시다. 당신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요."
"그래도 될까요?"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올 마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당연히 그래도 됩니다. 하하하..."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뜨겁게 불타올랐다.
***
리맨브러더스 본사 빌딩에 들어서자 존 힉스 회장의 수행 비서가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를 회장실로 정중히 안내했다.
회장실로 들어가자 힉스 회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내 요구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연리 4.0% 안팎의 금리로 300억불(36조원)을 대출해 주십시오."
힉스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4%대의 금리로 대출을 받을 생각입니까?"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월가의 시장 평균 금리는 대략 2.5% 전후였다.
그럼에도 내가 더 높은 금리로 자금을 대출받으려 하자, 그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꿍꿍이 속이 있어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이지만.
"대신 제가 지정하는 사모펀드에, 신용보증을 조건으로 자금을 대출해 주십시오."
"흐으음..."
그가 고심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무리한 신용담보대출을 요구한 탓이다.
그에게 재차 말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시중보다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힉스가 입을 열었다.
"300억불 전액을 신용보증으로 대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신용보증의 대출한도를 알려 주십시오."
"미스터 김의 개인적인 신용도를 고려한다면 2백억불(24조원)이 한계로 보여지는군요. 물론 그에 합당한 사이드머니를 제공하셔야 합니다만."
리베이트를 제공하라는 말이었다.
솔직한 양반이었다.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나를 유심히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1천만불(120억)을 내가 지정하는 계좌로 입금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원하시는대로 200억불을 연리 4%대의 금리로, 신용 대출해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은행과 계좌번호를 알려주십시오."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메모지에 은행명과 계좌번호를 적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돈이 마련되는 즉시 회장님이 지정한 계좌로 이체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힉스가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리며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
포시즌 호텔에 돌아온 뒤 창 밖에 드리워진 아름다운 센트럴파크를 조망하며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리맨브러더스는 앞으로 1년 후에 파산할 운명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리맨브러더스에서 일부러 거액의 신용대출을 받기로 작심했다.
눈 먼 돈이었기 때문이다.
차명으로 설립한 사모펀드 명의로 신용대출을 받으려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회사가 파산할 경우, 불분명한 명의로 대출한 자금을 회수할 여력이 거의 사라지는 탓이다.
일주일 후.
리맨브러더스는 내가 지정한 사모펀드에 200억불을 신용대출해 주었다.
한화로 24조원대의 거금을 날로 먹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