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지분투자를 감행하기로 결정하다
이창진 사징의 입에서 진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 네이바는 코스피 상장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금이 부족한 관계로 상장을 확신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차분히 경청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네이바 지분을 연결고리로 저희에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합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희 네이바는 대한민국 포털 시장을 거의 모두 장악했으며, 일본과 중국 시장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할 계획입니다."
네이바는 대한민국 인터넷을 장악한 포털 왕국이었다.
그런 탓으로 2020년 경에 시가총액 60조원을 달성하게 된다.
물론 이창친 사장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이창친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장내에 힘차게 울려퍼졌다.
"1조2천억을 투자해 주신다면, 회장님에게 25%에 달하는 네이바 지분을 양도할 용의가 있습니다."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번져갔다.
"사장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이창진이 감격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예의가 바른 남자였다.
***
나를 태운 롤스로이스 팬텀이 상지원으로 향할 무렵, 옆에 동승한 하동균 비서팀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긴급 보고를 올렸다.
"방금 전에 법무부 당국자와 통화를 나눴는데, 내일 아침 비행기로 김정수 팀장과 최상우 과장의 유해가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랍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김팀장과 최과장의 장례절차를 회사장(會社葬)으로 치루세요."
"조문실을 어디에 설치할까요?"
대영그룹은 회사의 중요한 인물이 사망할 경우 상지원을 조문실로 활용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상지원은 내 개인 사택으로 이용 중이었다.
"대영그룹이 보유한 부동산 중에서 조문실로 활용할 만한 곳이 있나요?"
그가 시원하게 즉답했다.
"수원에 연수원 건물이 있습니다."
"그 곳을 조문실로 활용하세요."
"예. 부회장님."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후, 1억원 짜리 수표 20장을 꺼내서 하동균에게 건넸다.
"내가 개인적으로 내는 부의금입니다. 김팀장과 최과장의 유족들에게 각각 10억씩 전달하세요. 그리고 회사 차원에서도 각각 10억씩 유족들에게 추가로 위로금을 집행하십시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태산그룹 본사 빌딩을 방문했다.
태산조선의 매각 작업을 신속하게 주문하기 위함이었다.
대회의실로 들어서자 진대현 본부장과 태산조선 경영진이 나를 맞이했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한 뒤 상석에 좌정했다.
잠시 후,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진대현이 모두 발언을 내뱉었다.
"현도중공업의 정밀 실사 작업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6조5천억에 한참 못미치는 액수로, 태산조선을 인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현도중공업 측은 태산조선 임원진의 고용승계 역시 확답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 측의 요구를 현도중공업에 확실히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태산조선 경영진들이 너나 할거 없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찬성을 표명했다.
허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태산조선의 임원들까지 고용승계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 수억대의 고액연봉을 지급받는 임원들은 개인사업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회의실에 배석한 경영진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회의는 두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렇다할 알맹이가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경영진들과 악수를 교환한 뒤 진대현을 대동한 채 탑층에 위치한 회장실로 올라갔다.
줄담배를 말아올리며 대현을 질책했다.
"임원들의 고용승계까지 보장하라는 말은 태산조선을 매각할 생각이 없다는 뜻과 진배가 없는 겁니다. 아실만한 분이 왜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겁니까?"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저... 그게... 태산조선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경영진들의 고용승계를... 보장하는 게..."
"입 닥치세요! 임원들한테 뒷돈이라도 받아먹으신 겁니까?"
그러자 대현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맹렬히 저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부회장님!"
"그럼 왜, 경영진들의 고용승계에 발벗고 나서는 겁니끼?"
그제야 녀석의 입에서 적나라한 자아비판이 흘러나왔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주제넘는 짓을 했음을 자인하는 태도였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임원들은 개인사업자나 마찬가지 신분입니다. 고용을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매각 협상 테이블에 태산조선 경영진들을 거의 내보내지 마세요. 당신이 책임지고 매각작업을 완수하라는 말입니다."
"네. 부회장님."
그를 내보낸 뒤 장동현 법무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저녁 무렵.
네이바 분당 본사 빌딩에 장동현이 나타났다.
얼마후 그는 네이바의 이창진 사장과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
"저희 부회장님은 네이바에 1조2천억을 투자하는 대가로 38%에 달하는 지분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창진이 난색을 표명했다.
"너무 과도한 지분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협상이 필요한거 아니겠습니까?"
"흐으음..."
이창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 장동현의 목소리가 재차 울려퍼졌다.
"38%에 달하는 지분을 양도해 주시면, 일시불 현금으로 1조2천억을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동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부회장님은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거물입니다. 1조2천억 정도는 그 분에게 별로 큰 돈이 아닙니다."
이창진이 감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기를 얼마 뒤,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31%로 합의를 봅시다. 그 이상의 지분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의 뜻을 부회장님에게 가감없이 전달하겠습니다."
동현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상지원의 서재를 서성이며 호주와 동남아 지역에 산재한 유전과 가스전이 총망라된 보고서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 보고서는 팔라완 섬에서 사망한 김정수 팀장이 작성한 것이었다.
팔라완에서 발생한 납치미수 사건으로 인해 유전과 가스전 매입에 차질이 빚어졌다. 거의 한달 정도를 낭비한 셈이었다.
보고서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은 뒤 아담 상원의원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폰에서 아담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는가?
"의원님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나에게 부탁할 일이 뭔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다름이 아니라 유전과 가스전 개발 전문가를 섭외해 주십시오."
-그 정도 일은 자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제 주변에는 믿을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애석하군. 주변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다니.
"제가 험하게 살아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운내게. 여튼 김 회장 부탁대로 적임자를 알아봐주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의원님. 이성호에 대한 단서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신 겁니까?"
-그 일은 시간이 좀 걸릴거 같군. 원래 사람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세.
"코리아 타운을 중심으로 수소문해 보시면 뭔가 단서가 나올 겁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전화통화를 끊은 뒤 접견실로 내려갔다.
접견실 벽면을 장식한 고풍스러운 자명종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동현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현이 접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보고를 올렸다.
"네이바의 이창진 사장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31%에 달하는 지분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하더군요. 그 이상의 지분은 힘들어 보였습니다."
이창진이 처음 제시한 조건보다 6% 가까이 늘어난 지분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지분매매 계약을 체결할 생각이니까 서류를 준비해 주십시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호주의 아틀라스 인공워성에도 지분투자를 할 계획이니까 다음주 수요일 쯤에 호주 시드니로 출장갈 준비를 하십시오."
"예. 부회장님."
***
용인 CC 골프장.
라운딩을 즐기는 한편, 이성호와 이성철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이성호는 지금 현재 미국으로 도피한 상황이었으며, 이성철은 미래전략 본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명 모두 심복지환이었다.
기회만 조성되면, 내 등에 아무렇지 않게 칼을 꽂아넣을 위인들이었다.
그런 탓으로 대영그룹의 신임 회장으로 지명도가 높은 오종덕 총괄 부회장을 낙점했다. 내 입장에서 부담없는 인사였다.
이제 이성철의 처리 문제가 남았다.
나는 더 이상 그가 대영그룹 경영에 참여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성철은 제 2의 이성준과 이성호였다.
그를 자연스럽게 내치기 위해서는 회사 공금 횡령 혐의가 가장 그럴싸했다.
대영그룹의 미래전략 본부장직은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연간 수조원 대의 자금을 집행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거액의 공금을 유용해서 주식 혹은 선물 옵션 투자에 나섰을 개연성이 높았다.
녀석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는 금융계좌 조사권한을 갖고 있는 검찰의 힘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 문제는 이태강에게 일임하면 될 터였다.
18홀을 모두 돈 뒤 골프 카트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카트를 운전하는 한편 옆에 동승한 하동균 비서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태강 검사장에게 저녁 시간을 비워두라고 전하세요."
"예. 부회장님."
그날 저녁.
서초동 인근의 한정식 레스토랑에서 이태강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식사를 끝마친 뒤 그에게 본론을 꺼냈다.
"이성철 본부장의 금융거래 내역을 조사해 주십시오."
"이성철을 회사에서 축출할 속셈인가?"
"비슷합니다."
"이성호 건은 어쩌고?"
"임시주총에서 해임한 뒤에 오종덕 총괄 부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선출할 생각입니다."
"오종덕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형님이 그의 약점도 겸사겸사 파악해 주십시오."
"하긴, 김 회장 입장에서 그 정도 보험은 필수겠지."
태강은 입가에 시니컬한 고소를 떠올린 채 나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김 회장을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안전에 만전을 다하는 게 좋을거다."
그답지 않게 나를 걱정해주는 눈치였다.
물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 관계는 비지니스에 불과했으니까.
그에게 사무적인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이성철이 회사 공금을 주식과 선물 옵션 투자에 유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쪽으로 알아봐 주십시오."
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청담동 고급 주택에 이성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는 자택의 거실을 서성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성철은 알 수 없는 의혹에 휩싸였다.
김한빈의 납치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이성호가 공교롭게도 미국으로 장기 출장을 떠난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임시주총에서 이성호가 해임되고 오종덕 총괄 부회장이 신임 회장으로 선출될 거라는 소문이 대영그룹 전체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허나, 한빈은 그에게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멀리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탓일까, 성철은 심각한 위기신호를 감지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유용한 천억대의 공금을 원상복구하기 위해 주식과 선물옵션에 투자한 자금을 신속하게 회수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사공금 유용혐의가 드러날 경우,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탓이다.
다음날 오전.
성철이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을 나설 찰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그의 차를 막아섰다.
그들은 검찰 수사관 신분증을 제시하며 성철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앙지검에서 조사할 사항이 있으니 저희와 동행해 주십시오. 만약 임의동행을 거부하시면 자택과 사무실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이 실시될 겁니다."
성철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까닭이다.
결국 성철은 임의동행 방식으로 중앙지검에 소환됐다.
***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용인 CC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즐기는데 전심전력했다.
골프를 치며 푸른 잔디를 여유로이 노니는 맛에 중독된 탓이다.
11홀을 돌 무렵, 하동균 비서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이성철 본부장이 중앙지검에 소환당한 모양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골프공을 힘차게 강타했다.
딱!
내가 날린 골프공이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푸른 하늘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내공을 사용한 것 같았다.
그런 탓일까, 하동균이 감탄한 얼굴로 연신 따봉을 날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타이어 우즈를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장타력...!"
그는 진심으로 경탄한 눈치였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