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세상은 넓고 나쁜놈들 역시 무수히 많다
대영자동차의 마산 공장을 방문했다.
양산차 생산 라인을 두루 시찰할 무렵, 내 눈길을 사로잡는 자동차를 발견했다.
굴강한 외모가 압권인 리무진 차량이었다.
나를 수행하는 공장 책임자에게 물었다.
"리무진을 양산차 라인에서 생산하는 이유가 뭐죠?"
책임자가 즉답했다.
"사실 이 리무진은 청와대에 납품할 용도로 제작 중인, 대통령 의전 차량입니다."
"방탄 기능이 있는 리무진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대영자동차에 방탄 리무진을 개발할 만한 기술력이 있나요?"
책임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독일의 다임러 벤츠사에게 기술 자문을 구해서 생산하는 중입니다."
그제야 저간의 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내 예상대로 대영자동차에는 방탄 리무진을 생산할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국익 차원에서 청와대에 의전차량을 납품하려는 모양이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군요."
"말씀대로 적자를 감수하고 청와대에 납품할 용도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총 몇대를 생산할 계획이죠?"
"일단은 2대 가량을 청와대에 납품할 계획입니다."
"방탄 성능은 어떻습니까?"
"차량의 차체와 유리창, 타이어 모두 중화기를 감당할 정도의 방탄 성능을 완비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차체는 전차에 사용되는 고강도 특수 강판으로 제작되었으며, 유리와 타이어에는 티타늄 재질의 특수 방탄 재료가 세겹 이상 코팅된 상태로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방탄 리무진이었다.
"방탄 차량이 완성되면, 청와대에는 한대만 납품하십시오. 나머지 한대는 내가 사용할 계획이니까."
그러자 책임자가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힘차게 복명했다.
"네. 부회장님!"
***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하동균 비서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방탄 리무진이 생산되는 즉시 비서실에서 차량을 인수하십시오."
"예. 부회장님."
롤스로이스 팬텀의 안락한 가죽 시트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말아올리며 차창을 스치는 도로변의 풍경에 시선을 모을 찰나, 어디선가 여인의 비명 소리가 처량하게 울려퍼졌다.
옆에 동승한 하팀장을 슬쩍 쳐다봤다.
허나, 그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눈치였다.
내 귀에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후로도 여인의 비명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내 영민한 이목에만 들리는 것 같았다.
본능적인 호기심이 내면에서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구였다.
결국 운전석의 김태구 경호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차를 멈추세요."
"네. 부회장님."
우리 일행을 태운 롤스로이스가 갓길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려선 뒤 단전의 내공을 귓전으로 모았다.
그러자 그녀의 비명소리가 내 귓가에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그만하세요! 제발요! 저를 제발 죽이지 마세요...!"
갓길 너머의 야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렸다.
곧바로 야산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음침한 별장이 눈 앞에 나타났다. 여인의 애절한 절규는 그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별장에 바짝 접근할 찰나, 그녀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 후, 더 이상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별장 현관문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문이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갔다.
별장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지하실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지하실에도 문이 있었지만, 나에겐 무용지물이었다.
펑!
지하실 문을 한주먹으로 터트린 뒤 그 안으로 재빨리 들어섰다.
순간 전신에 피칠갑을 둘러쓴 야수와 숨이 끊어진 묘령의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같은 살심에 사로잡힌 채 놈의 안면에 벼락같은 일권을 박아넣었다.
퍼억!
"크아아악!"
괴물의 얼굴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붉은 핏물과 허연 뇌수를 동반한 채.
비릿한 피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욕지기가 절로 올라올 지경이었다.
장내에는 목불인견의 참극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의 팔다리와 머리통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던 것이다.
내 한주먹에 즉사한 괴물의 손에는 전기톱이 들려있었다.
놈은 그 험한 물건으로 여인의 사체를 도륙할 계획이었다.
흔히 말하는 소시오패스 같았다.
그때, 김태구 팀장과 경호원, 하동균 등이 지하실에 나타났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에 저마다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그나마 김태구가 나은 형편이었다.
헛구역질을 끝마친 하동균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태강 지검장에게 연락해서 이 곳으로 오라고 전하세요. 그리고 아무도 현장에 손을 대지 말라고 전하십시오."
"예. 부회장님."
***
1시간 후.
별장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그 역시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
이런 참상을 목격한 적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태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김 회장 경호원들이 저 괴물을 잡은 건가?"
"대충 비슷합니다. 하여튼 피해자들이 한둘이 아닌거 같으니까 형님이 제대로 수사해 보십시오. 중앙지검이 연쇄살인마를 검거했다고 대대적으로 언플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저 살인마 자식은 죽은지 오래지 않은가?"
"그놈이 죽었어도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거 아닙니까?"
"하긴, 그야 그렇구만. 우하하하하..."
태강의 입에서 흡족한 웃음이 길게 쏟아져 나왔다.
내 시선은 간발의 차로 목숨을 잃은 그녀에게 모아졌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목숨을 부지했을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심경이었다.
그 무렵, 중앙지검 소속 강력부 검사와 수사관, 감식반 요원들이 별장에 벌떼같이 몰려왔다.
태강은 그들이 도착하자 곧바로 수사를 개시했다.
씁쓸한 심경을 뒤로한 채 별장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
다음날.
상암 켄싱턴 빌딩 사무실에서 중앙지검의 긴급 발표에 시선을 고정했다.
예상대로 중앙지검 브리핑 룸에 이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차기 대권을 목표로한 탓인지, 태강은 국민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혈안이었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수도권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저희 중앙지검 강력부는 연쇄 살인마가 수도권 근교에서 활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채 사건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오후 5시경에, 연쇄살인마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경기도 근교에 위치한 별장을 전격적으로 수색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사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무기를 소지한 채 격렬하게 저항하던 연쇄살인마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비록 유력한 피의자가 자살했지만, 그가 저지른 죗과의 증거는 명백합니다. 국과수에 보낸 피의자의 DNA에서 피해자들의 혈흔과 체액이 다수 검출된 것이 증거입니다!
태강의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의 열띤 질문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는 현란한 화술을 구사하며 기자들의 질문을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TV를 끈 뒤, 비서실에 콜을 넣었다.
"오늘 점심으로 얼큰한 짬봉과 군만두를 먹을 생각이니까 중화요리집에 배달을 주문하세요."
-네. 부회장님.
***
상지원에 도착하자 공장에서 출시된지 얼마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방탄 리무진이 나를 반겼다.
리무진의 전면에는 KHB라는 영어 이니셜을 형상화한 멋드러진 엠블렘이 박혀 있었다.
내 이름의 약자를 영문화한 모양새였다.
방탄 리무진의 운전석에 자리를 잡았다.
엑셀을 부드럽게 내리누르자 육중한 엔진음이 내 온몸을 기분좋게 간질였다.
직후 나를 태운 방탄리무진이 전방을 향해 힘차게 전진했다.
그러자 김태구 경호팀장이 놀란 얼굴로 롤스로이스 쪽으로 뛰어갔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방탄 리무진을 한남대교 쪽으로 몰아갔다.
한남대교를 넘어가자마자 강변 북로 쪽으로 핸들을 꺽었다.
그 후, 일산 자유로에서 그 밤이 다하도록 방탄 리무진을 오롯이 즐겼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뒤, 도우미 아주머니가 정성껏 차려낸 북어국으로 속을 해장했다.
그녀에게 내심 높은 점수를 부여한 후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조간 신문에 시선을 모았다.
신문의 정치 사회면은 온통 대통령 선거로 도배된 상태였다.
그러고보니 벌써 12월이었다.
1년이 금세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신문을 내려놓은 뒤 리모컨을 손에 들었다.
TV 뉴스 채널 역시 대통령 선거가 주요 이슈였다.
따분한 뉴스였다.
하품을 길게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욕실에서 샤워를 끝마친 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채 상지원 1층 현관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동균 비서팀장과 김태구 경호팀장, 수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목례로 화답한 뒤 방탄 리무진에 차분히 몸을 실었다.
***
나를 태운 방탄 리무진이 상암동에 도착할 무렵, 길게 줄을 선 그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아이돌 그룹의 무대를 감상하기 위해 몰려든 소녀팬들이었다. 물론 성인 여성들도 다수 눈에 띄였다.
그녀들의 열정적인 오빠 사랑을 먼 발치에서 확인한 뒤 켄싱턴 빌딩으로 시선을 모았다.
빌딩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정장 차림의 신사숙녀였다.
대영전자와 자동차, 물산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온 취업준비생이었다.
차에서 내린 뒤 1층 로비로 들어서자 임직원들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런 탓일까, 회사에 면접을 보러온 신사숙녀들의 한껏 부러워하는 시선이 내 일신에 집중됐다.
물론 그들 중에서는 나에게 질시어린 눈빛을 내비치는 사람도 다수 존재했다.
새파랗게 어린 나를 재벌 3세 혹은 4세 정도로 지레짐작한 탓이다.
선남선녀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온몸으로 만끽한 뒤, 129층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향해 당당한 걸음걸이를 과시하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런 때문일까, 그녀들의 선망에 찬 눈빛이 내 우람한 뒷등에 끈적하게 파고들었다.
그녀들의 애절한 여심에 내심 당황스러운 심경이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야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129층에 도착하자 비서실 요원들이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해왔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하며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책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마키아토 두잔과 던힐 두갑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마키아토 두잔을 여유로이 음미하며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줄담배를 말아올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바깥 풍경을 오롯이 감상할 무렵, 하동균 비서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오늘 스케쥴을 길게 나열했다.
물론 나는 스케쥴 따위에 얽매이는 남자가 전혀 아니었다.
당연히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일정은 언제나 가감하게 취소했다.
오늘 스케쥴도 마찬가지였다.
태반이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만날 필요가 없는 인간들이 대다수였다.
담배 꽁초를 유리 재떨이에 격하게 비벼끈 뒤 하팀장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오후 4시 스케쥴만 살리고 나머지 스케쥴은 전부 취소하세요."
그는 타고난 예스맨이었다.
그런 탓으로 별다른 이견 없이 순순히 복명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오후 4시경 서교호텔을 방문했다.
이영박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대선 유세가 한창인 가운데서도 나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스위트룸에 들어서자 커피와 흡연을 즐기는 이영박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소문난 골초였다.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나 역시 흡연을 즐기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영박이 은근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해외 자원개발에 대해서 해박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에서 탐욕스러운 언사가 흘러나왔다.
"저는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해외 자원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물론 그에 합당한 예산도 배정할 계획이죠."
말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한마디로 나라돈을 날로 먹을 계확이라는 뜻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사이에 숨길 일이 없지 않습니까?"
영박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툭 까놓고 말하겠소. 해외 자원개발을 이용해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할 생각이오."
"아시다시피 저는 비지니스맨입니다. 이익이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오. 김 회장에게도 적정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니까."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힘닿는데까지 후보님을 도와드리죠."
그러자 영박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역시 우리 김 회장은 언제나 말이 잘 통한다니까. 하하하하하...!"
그의 입에서 흡족한 웃음 소리가 길게 쏟아져 나왔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펜트하우스의 피트니스 룸에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할 무렵, 이태강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덕구의 배후가 있는거 같아."
윤덕구는 내 손에 맞아죽은 연쇄 살인마의 이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놈의 별장에서 수거한 사체들의 몸에서, 내부 장기가 적출된 흔적이 발견됐네."
"장기밀매 조직이 연관된 건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말했다.
"장기밀매 조직은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탓에 수사가 쉽지 않아. 꼬리를 잡아봤자 윗선에서 짜르면 그만이거든."
"마약조직이랑 비슷한 모양이죠?"
"그렇다고 봐야지."
"생사람을 납치해서 장기를 적출하는 인간말종들이 생각 외로 많은 모양이네요."
태강이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국 사회는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았다.
장기밀매 조직이 실제로 암중에서 활개를 치는 탓이다.
허나, 한국의 공권력은 그런 범죄자들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