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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121화 (121/175)

121화 정글의 법칙

동경 록뽄기 힐스 인근의 제국호텔 연회장에, 일본 정재계의 내노라하는 거물들이 총출동했다.

그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극우단체인 야마토 재단의 창설 80주년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불원천리를 마다하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한국의 10대 재벌인 낙원그룹 차재성 회장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차재성은 재일교포 출신이었다.

그런 탓인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선일체(內鮮一體)사상으로 똘똘뭉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일한병합 주의자였다.

물론 그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일본 극우단체의 앞잡이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차재성은 야마토 재단의 구마모토 이사장에게 준비해온 수표 한장을 내밀었다.

한화로 500억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런 탓일까, 구마모토가 흡족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달했다.

"작년 79주년 행사에서도 거액을 기부하시더니, 금년에도 이렇게 많은 돈을 기부해 주시는군요. 진정으로 감사한 심경입니다. 신 회장님."

그러자 차재성의 입에서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광소가 터져나왔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의당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우하하하하하...!"

한국의 복지재단에는 단 한푼도 기부 안하기로 유명한 짠돌이 재벌 차재성이, 일본 극우단체에는 수백억을 흔쾌히 기부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이 알게되면 과연 어떤 반응일지, 사뭇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차재성은 야마토 재단의 성대한 축하연을 뒤로한 채 한국행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낙원그룹 논현동 본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재성은 낙원그룹 본사에서 열리는 그룹 사장단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실에 차 회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번 기회에 태산 CGV를 반드시 인수해야 합니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태산 CGV 인수전에서 기필코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사내유보금을 이용해 서울과 경기도의 저평가된 부동산을 무차별적으로 매입하십시오. 우리 낙원그룹이 살 길은 유망한 지역의 부동산을 입도선매한 후 높은 가격에 되파는 것입니다!"

차재성은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런 때문일까, 사장단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차 회장의 노골적인 부동산 투기 권장에 사장단들이 할 말을 잃은 탓이었다.

허나, 그는 사장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특유의 얍삽한 뻘소리를 길게 이어나갔다.

***

태산 CGV 매각을 투트랙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진대현 본부장과 윤영철 CGV 사장에게 각각 매각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 때문일까, 윤영철은 직원들의 고용승계에 주력하는 매각 정책을 수립했다.

당연히 그는 거의 날마다, 나에게 긴급 면담을 신청했다.

인수희망 의사를 밝힌 국내외 자본을 비토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켄싱턴 빌딩 사무실에 나타나자마자 유력한 인수 대상자로 지목된 낙원그룹을 격앙된 어조로 성토했다.

"낙원그룹은 말만 한국그룹이지, 그들의 실체는 일본그룹이나 마찬가집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그들은 국내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의 90% 이상을 일본에 설립한 낙원재팬으로 유출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일본그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일본그룹이라 칩시다. 그게 태산 CGV 매각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윤영철이 심각한 얼굴로 답변했다.

"낙원그룹은 일본의 극우단체에 매년 수백억대의 기부금을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CGV 직원들의 고용승계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런 천인공노할 친일자본에게 태산 CGV를 매각하시면, 두고두고 후회 하시게 될 겁니다. 부회장님!"

내 마음을 절로 움직이는 윤 사장의 준엄한 경고였다.

낙원그룹이 친일 그룹이라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일본 극우단체에 줄을 댄 기업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만약 윤 사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낙원그룹이 일본 극우단체에 거액의 기부금을 제공한 증거를 저에게 가져오십시오."

"제가 증거를 갖고오면 태산 CGV를 낙원그룹에 매각하는 걸 재고하실 겁니까?"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그러니 윤 사장이 책임지고 증거를 확보하십시오."

"증거를 확보하려면 최소 3주 이상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좋습니다. 3주일 동안 낙원그룹과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윤 사장은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윤영철은 상암 켄싱턴 빌딩을 빠져나오자마자 일본에 파견나간 신문사 특파원인 오경철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오경철은 그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그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낙원그룹이 야마토 재단에 거액의 금품을 기부한 증거가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오기자가 힘을 좀 써 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죠?"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근사하게 한 턱 쏠테니까 오 기자가 능력을 발휘해 보라고."

-선배님이 이리 나오시니...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죠.

"그럼 오 기자만 믿는다."

-당연히 저만 믿으셔야죠. 하하...!

"나중에 서울에서 보자."

-네. 선배님.

윤영철은 전화통화를 끊은 뒤 초조한 얼굴로 세단 차량에 몸을 실었다.

***

용인 CC 골프장에 조웅래 국정원 1차장을 호출했다.

그는 내 심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돈을 수십억이나 받아먹은 까닭이다.

라운딩을 돌며 나를 밀착 수행하는 조웅래에게 넌지시 물었다.

"낙원그룹의 차재성 회장이 일본 극우단체에 매년 거액의 기부를 한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조웅래가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입니다. 금년에도 한화로 500억대의 금품을 기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양반이 제정신이 아니군요."

"원래 차재성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에겐 일본이 조국이고, 한국은 돈벌이 하는 곳에 불과하죠."

그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낙원그룹은 한국 정부에서 온갖 금융 혜택을 받은 주제에, 고작 한다는 사업은 내수 시장 갉아먹기와 부동산 투기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빈껍데기죠. 한국의 국가경제에 하등의 도움이 안되는 그룹입니다."

"낙원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된다 하더라도, 한국 경제에 별다른 타격조차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낙원을 대체할 기업들이 지천에 널린 탓이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조웅래를 돌려보낸 뒤 진대현을 골프장으로 호출했다.

17홀을 돌 무렵, 대현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면전에 공손히 시립했다.

대현에게 거두절미하고 지시를 내렸다.

"낙원그룹이 보유한 사내유보금과 부동산 현황을 파악해서, 내일 모레 아침 9시까지 보고서로 작성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세요."

그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힘차게 복명했다.

"넵. 부회장님!"

***

진대현은 태산그룹 본사로 돌아오자마자 부하 직원들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그는 장내에 도열한 전략실 요원들을 향해 엄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내일 오후 5시까지 낙원그룹의 사내유보금과 부동산 현황을 빠짐없이 파악한 후, 보고서로 작성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순간 전략실 직원들의 입에서 일사불란한 복명이 울려퍼졌다.

"예. 본부장님!"

대현은 부하 직원들을 사무실 밖으로 내보낸 뒤 의혹이 깃든 얼굴로 한빈의 뜬금없는 명령을 곰곰이 되새겼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가 뭔가를 눈치챈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

상지원으로 귀가한 뒤 대영전자의 김동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긴히 의논할 사안이 있었다.

1시간 후.

상지원 접견실에 김동재가 나타났다.

우리는 커피를 함께하며 긴밀한 협의에 돌입했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명을 내렸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반도체 부품과 핵심 소재를 3년 안에 전부 국산화 하십시오."

그러자 김동재가 난색을 표명했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의 기술을 국산화하는 건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직접 국산화를 하라고 지시를 내리는거 아닙니까? 내 말이 우습게 들리십니까?"

순간 동재가 잔뜩 주눅든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제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그에게 따끔한 어조로 충고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명령은 오랜 숙고 끝에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 내 지시를 허투루 여기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동재가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직후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부회장님의 귀한 말씀을 언제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이제 조금 마음에 드는군요.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입가에 담배를 물자 동재가 재빨리 담배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말아올리며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 예감일 뿐이지만, 일본은 2020년을 전후해서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부품과 소재를 수출규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재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미래가 눈에 보입니다. 뛰어난 선견지명을 타고난 거죠."

그는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런 탓으로 만면 가득 경탄한 표정을 지으며, 입으로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역시 부회장님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참으로 탁월하신거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 이 정도야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우하하하하...!"

내 입에서 절로 호탕한 광소가 쏟아져 나왔다.

***

오전 9시경.

상암동 켄싱턴 빌딩의 129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 놓여진 두툼한 보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보고서를 살폈다.

예상대로 낙원그룹의 사내유보금과 부동산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기재된 보고서였다.

낙원그룹의 사내유보금 태반은 일본에 설립한 낙원재팬으로 흘러들어갔다.

앙꼬없는 찐빵이었다.

반면 낙원이 보유한 부동산은 내 입맛을 돌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알토란 같은 부동산을 대거 보유한 탓이었다.

2020년의 부동산 시세로 환산할 경우, 거의 100조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 때문일까, 낙원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은 불같은 욕망이 내면에서 활화산처런 분출됐다.

어차피 낙원그룹은 부도덕한 일본자본이었다.

먼저 털어먹는 놈이 임자였다.

***

오경철 일본 특파원은 평소 친분이 있는 주간문춘의 하토시 기자에게서 야마토 재단의 80주년 행사 사진을 어렵게 입수했다.

그 사진 속에는 낙원그룹 차재성 회장이 구마모토 이사장에게 거액의 수표를 제공하는 장면이 생생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짖으며 한국행 비행기 편을 예약했다.

다음날.

한국에 도착한 오경철은 자신이 입수한 사진을 윤영철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윤영철은 오경철에게서 귀한 사진을 입수하자마자 상암동 켄싱턴 빌딩으로 직행했다.

***

상지원 접견실로 이태강을 호출했다.

눈 앞에 나타난 그에게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낙원그룹의 차재성 회장을 교도소에 집어넣으세요."

그의 얼굴에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이 잔뜩 그려졌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지?"

"말그대로 차재성을 잡아 쳐넣으세요. 그게 내가 원하는 겁니다."

"설마...? 차 회장이 김 회장에게 잘못을 범하기라도 한 건가?"

"그냥 그 작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님이 힘을 써보세요."

그러자 태강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재성 회장은 이영박 당선자와 돈독한 사이라구.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이영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통화를 끝마친 뒤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이영박은 내가 알아서 구슬릴테니까, 형님은 조세포탈과, 횡렴배임,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을 연결고리로 차재성과 그 일가에 대해서 전방위적인 내사를 진행하십시오."

그제야 태강은 내 말이 허언이 아님을 눈치챘다.

"진심으로 차 회장을 작살내려고 하는구만."

"저는 빈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님은 그에 맞게 행동하시면 그만입니다."

"역시 김 회장다운 화끈한 일처리군. 허허..."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하시면 형님에게 수백억대의 보너스를 지급할 계획이니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순간 태강의 얼굴에 끈적한 탐욕이 격하게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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