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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122화 (122/175)

122화 약육강식

서교호텔 스위트룸을 방문했다.

이영박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신 정부의 내각 인선 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와의 만남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내가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음미하며 그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일본의 극우자본과 결탁한 낙원그룹을 박살낼 계획입니다. 그러니 당선자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낙원그룹을 정말 손보실 생각입니까?"

"네. 일본의 극우세력과 연계된 낙원그룹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낙원그룹의 차재성 회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김 회장의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낙원그룹을 치려는 내 계획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그런 마음이에요."

그리 말하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서 작심발언을 그에게 내뱉었다.

"차재성 회장이 당선자님에게 건넨 대선자금이 겨우 100억 수준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돈독한 관계라면서 고작 백억 내외의 자금을 건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차재성은 한달 전에 일본 극우단체인 야마토 재단에 무려 500억을 기부했습니다."

영박이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말이 정말입니까?"

"사실입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온 사진을 그에게 내밀었다.

영박은 야마토 재단의 구마모토 이사장에게, 거액의 돈봉투를 건네는 차재성의 비열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떤 방식으로 낙원그룹을 처리할 계획입니까?"

"이태강 지검장을 적극 활용할 생각입니다."

"이 지검장이라면 일처리를 확실히 하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영박이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낙원그룹의 차재성은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잘만하면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입에서 노골적인 언사가 재차 흘러나왔다.

"당연히 나에게도 뭔가 금전적인 이득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얼마를 원하십니까?"

영박이 탐욕스런 눈빛을 내비치며 은근한 어조로 대꾸했다.

"최소 7천억 이상을 보장해 주십시오."

내 입장에서 별로 큰 돈은 아니었다.

낙원그룹의 알토란같은 부동산과 핵심 계열사를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인수하는 게 내 주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권을 반드시 수중에 넣어야 한다.

경영권을 손쉽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차재성을 교도소로 집어넣는 게 급선무였다. 영박은 바로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줄 사람이었다.

"원하시는대로 7천억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선금으로 먼저 1천억을 저에게 주십시오. 물론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로."

"좋습니다. 이번주 금요일에 다시 찾아뵙는 자리에서 원하시는 돈을 건네드리죠."

"역시 우리 김 회장은 매사에 시원시원한 게, 참으로 마음에 드는군요. 우하하하하하...!"

돈에 눈이 돌아간 영박의 입에서 탐욕에 절은 광소가 길게 울려퍼졌다.

그에겐 돈독한 친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예상대로였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129층.

진대현이 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바로 낙원그룹의 상장 계열사에 대해서 보고를 올렸다.

"낙원그룹의 상장사는 낙원호텔, 낙원쇼핑, 낙원제과, 낙원푸드, 낙원케미칼, 낙원정밀화학, 낙원건설, 낙원리츠, 낙원정보통신 등이 있으며, 9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은 75조원 안팎입니다."

"비상장 계열사의 가치는 얼마정도죠?"

"5조원 내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제 차재성을 요리할 시점이었다.

"차재성 일가의 약점을 잘 아는 인물이 필요해요."

대현이 눈빛을 빛내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재성의 수행비서인 조달현이 돈심부름을 자주한다는 후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조달현을 이용해서 차 회장의 약점을 잡는 게 좋아보입니다."

"조달현이 우리 의도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에게 거액의 돈을 제시한다면 충분히 우리 뜻대로 움직일 겁니다."

그는 이번 사안을 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재벌회장의 수행비서로 발탁될 정도면, 기본적으로 충성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인물을 포섭하는 건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에요."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진본은 이만 나가보세요."

그러자 대현이 겸연쩍은 얼굴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게 나섰나 봅니다."

"알면 됐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네. 부회장님."

그가 사무실에서 사라지자마자 이태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서울중앙지검 인근의 밥집을 찾았다.

점심 시간이 지난 시각이라 그런지 식당은 한산했다.

주인 아줌마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렁탕 2인분을 가져다 주십시오."

"예. 손님."

15분 뒤, 뜨끈한 설렁탕 뚝배기 2인분과 깍두기 반찬이 나왔다.

그때, 이태강이 밥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 앞에 앉자마자 설렁탕 뚝배기를 흡입하는데 전심전력했다.

몹시 시장한 눈치였다.

우리는 설렁탕으로 배를 채운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영박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요령껏 차 회장을 요리하세요."

그가 감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역시 김 회장에겐 불가능이 없구나. 정말 대단해!"

"칭찬은 됐으니까 차 회장을 하루 빨리 잡아넣는데 주력하십시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차 회장의 심복인 조달현 수행기사부터 시작하세요. 돈심부름을 주로 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별건수사로 압박하라는 말인가?"

"그건 기본이고, 필요하면 돈으로 포섭하는 게 좋겠죠."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라는 말이군."

"네. 너무 채찍만 남발하면, 조달현이 자살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하긴,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그러니까 별건수사와 당근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세요."

그리 말하며 테이블 위에 준비해온 돈가방을 올려놓았다.

"현찰로 30억입니다. 조달현에게 슬며시 전달하세요."

"나한테는 뭐, 없나?"

태강이 탐욕이 넘실거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번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면 형님에게 5백억을 드릴테니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좋아. 그 약속 절대 잊지말라고."

"내가 형님에게 한입으로 두말하겠습니까. 하하..."

그 말을 끝으로 식당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조달현은 차재성 회장의 고향 마을 출신이었다.

게다가 먼 외가쪽 피붙이였다.

그런 탓인지 지난 20년 동안 차 회장의 수행비서로 일하며 틈날 때마다 돈심부름을 해왔다.

오늘도 그는 일과시간 중에 짬을 내서 차 회장의 돈심부름을 했다.

현찰이 가득 들어찬 사과박스를 지자체장의 자택에 배달한 것이다.

차재성은 경기도 인근의 국유지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지자체장에게 돈로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조달현의 돈심부름을 먼 발치에서 살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중앙지검에서 파견나온 검찰 수사관이었다.

그는 조달현의 행적을 고화질 카메라로 쉴 새 없이 촬영했다.

그날 밤.

조달현의 자택에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얼마후 그는 중앙지검으로 소환되었다.

중앙지검 취조실에 특수부 검사가 나타났다.

검사는 조달현이 돈심부름을 하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있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달현의 얼굴이 금세 사색이 되었다.

허나, 그는 끝내 배후에 존재하는 차 회장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대단한 충성심이었다.

"낙원건설에서 부탁받은 일을 대신 했을 뿐입니다. 저희 회장님은 정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요!"

그의 변명아닌 변명이 취조실에 길게 울려퍼졌다.

그럴수록 검사의 얼굴 표정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좋은 말로 해서는 말이 안통하는구만. 군대간 당신 아들이 후임병을 폭행한 사건이 얼마전에 발생했더군. 물론 댁이 돈질을 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넘어갔고."

순간 조달현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댁의 딸내미도 얼마전 학교에서 같은반 친구를 왕따한 건 물론, 폭행도 행사했더군. 이번 사건도 당신이 돈으로 피해학생 부모들을 입막음 시켰고."

검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달현의 두려움은 점점 더 배가되어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 딸을 얼마든지 소년원으로 보낼수가 있어. 그리고 아들내미는 영창에서 푹 썩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차 회장이 돈심부름을 시켰다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지만 달현은 끝내 차재성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담당 검사는 내심 혀를 길게 내두르며 취조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30분 후.

취조실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가죽 가방이 들려있었다.

태강은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뒤 취조실의 녹화버튼을 오프시켰다.

그 후, 가방 안의 내용물을 달현에게 보여주었다.

"가방 안에는 모두 30억이 들어있다. 이 돈을 받고 배후에 차재성이 있다는 사실을 진술해. 그렇게하면 만사가 편안해질거다."

달현의 얼굴에 극심한 갈등이 떠올랐다.

그때, 태강의 목소리가 취조실에 재차 울려퍼졌다.

"내 마지막 제안을 끝내 거부한다면 네놈은 물론이고, 아들과 딸 모두 내가 책임지고 작살내주마!"

달현의 만면 가득 공포와 탐욕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번갈아 휘몰아쳤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의 입에서 '차재성'이란 이름 석자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태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취조실을 나섰다.

***

차재성은 조달현이 중앙지검으로 소환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그의 대응은 이미 한발 늦은 시점이었다.

공항으로 떠나려던 찰나, 그의 자택에 중앙지검 수사관들이 벌떼처럼 몰려든 탓이다.

결국 그는 지자체장에게 거액의 금품을 건넨 혐의로 중앙지검에 전격적으로 압송됐다.

이태강은 매직 거울을 통해 취조실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살피고 있었다.

차재성은 변호인의 입회하에 특수부 검사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허나, 그는 검사의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자신의 어마어마한 인맥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태강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올라갔다.

자신의 처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차 회장의 모습이 미련해 보인 까닭이다.

그는 차재성의 심문 과정을 한참 동안 지켜본 후,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휘하 검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용안시청의 최동수 시장을 지금 당장 소환해!"

"네. 지검장님."

***

상지원의 서재에서 경제 서적 탐독에 열을 올릴 즈음, 태강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재성과 용안시청의 최동수 시장을 대질심문할 계획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최동수의 증언만 확보하면 구속영장 집행에 문제가 없는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영장전담 판사에게 미리미리 약을 쳐두는게 좋겠지."

"영장전담 판사가 누구죠?"

그가 즉답했다.

"서울중부지법에서 근무하는 신우현 판사를 찾아가봐."

"그자에게 돈질을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이수경 경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금고에 현금이 얼마나 있죠?"

-대략 120억 정도가 있는데요.

"그 중에서 40억을 인출해서 하동균 비서팀장에게 전달하세요."

-예. 부회장님.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하동균 비서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수경 경리 팀장이 40억을 하팀장에게 전달할 겁니다. 그 돈을 중부지법 영장 전담 판사인 신우현에게 건네십시오."

수화기에서 동균의 긴장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 지시는 계속 이어졌다.

"돈가방 맨위에 차재성 회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해 달라는 메모지를 올려놓으세요. 그리고 자택으로 직접 가서 돈을 전달하세요. 만약 신우현이 만남을 거부하면 이영박 당선자의 이름을 파십시오."

-부회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보안이 생명이니까 아무도 눈치 못채게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 하십시오."

폰에서 하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부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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