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전부 아니면 전무
강남의 텐프로 클럽을 찾았다.
이 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신분이 확인된 상류층 인사들만이 드나들 수 장소였다.
관리 실장을 룸으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이 곳에 초희라는 아가씨가 있다면서요?"
"네. 우리 클럽의 초일류 에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아가씨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지금 다른 고객님을 접대하는 중이라..."
지갑에서 천만원권 수표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관리실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근사근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사장님 앞에 초희를 대령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룸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잠시 뒤, 룸에 초희가 나타났다.
그녀는 소문대로 여배우 뺨칠 정도의 마스크와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텐프로의 에이스다운 자태였다.
그녀를 옆에 앉힌 뒤, 술을 따르게 했다.
초희가 따라주는 양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지갑에서 1억원 짜리 수표를 꺼내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말 이 많은 돈을 저에게 주시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시키는 일을 한가지만 더하면 추가로 30억을 주지."
초희가 탐욕에 물씬 찌들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말씀이 사실인가요?"
"그래. 1억원은 계약금이니까 받아둬.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으면 명함에 적힌 곳으로 나를 찾아오도록."
금으로 도금된 명함 한장을 그녀에게 건네자마자 텐프로 클럽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상암 켄싱턴 빌딩 129층.
내 사무실에 초희가 나타났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사무실의 전경에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내 신분이 그녀의 상상을 한참이나 초월한 까닭이다.
면전에 멀뚱히 서 있는 그녀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일단 앉지."
"네. 사장님."
커피를 음미하며 그녀에게 나직한 어조로 운을 뗐다.
"본명은 조애숙이고, 2년 전에 낙원그룹의 후계자인 차현수를 혼인빙자 간음으로 고소한 전력이 있더군."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놀래키려고 그런건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마라."
그제야 조애숙이 다소 차분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의 뒷조사를 한 건가요?"
"그래. 내가 하는 일에 당신이 많이 필요해서."
"그게 무슨 말씀이죠?"
"나는 당신이 차현수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해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만 해주면 약속대로 30억을 주지. 그대 입장에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녀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차현수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하면, 저에게 30억을 주실 건가요?"
"물론 한가지 조건이 더 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차현수와 합의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가 필요해."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대가 갑자기 그놈과 합의를 한다면, 나는 피같은 30억을 고스란히 날리는 거잖아. 안그래?"
"그, 그렇..죠."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조건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조애숙은 나를 무서워해야 한다.
그래야 나와 한 약속을 어길 가능성이 적어진다.
그런 탓으로 전국구 조폭으로 내 신분을 위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향해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 휘하에는 기라성같은 조폭들이 수백명이나 있어. 나와 한 약속을 어길 경우, 그쪽은 아주 험한 꼴을 당할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해."
그녀가 움찔한 얼굴로 사무실 곳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들을 쉴 새 없이 곁눈질 했다. 내 거짓말이 잘 통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후.
각서 한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각서를 살펴봐. 내용이 마음에 들면 당신 이름 옆에 열손가락의 지장을 찍으라구."
조애숙은 각서를 잠시 살핀 뒤 앵두같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질끈 깨물며, 열손가락의 지장을 각서에 차례로 날인했다.
***
차재성 회장의 자택에 국과수 요원들과 강남 경찰서 형사계의 이동기 팀장 일행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현장을 매의 시선으로 두루 살핀 뒤, 차 회장이 숨을 거둔 장면을 최초로 목격한 둘째 아들 차경수를 강남 경찰서로 소환했다.
오후 무렵.
이동기는 형사계에 나타난 차경수를 대상으로 형식적인 조사를 끝마친 뒤 넌지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사체를 부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정확한 사인을 파악할 수 있거든요."
그러자 경수가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 심혈관과 관련된 질병은 물론 고혈압, 당뇨 등의 각종 지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한마디로 노환으로 돌아가신 겁니다."
"하지만 저희 경찰 입장에서는 회장님의 사체를 부검할 의무가 있습니다."
"유족인 내가 반대하는데, 당신들이 뭐라고 제멋대로 부검을 하겠다는 겁니까!"
이동기의 눈가에 불쾌한 감정이 스쳤다.
그런 탓일까. 냉랭한 어조로 재차 부검을 요구했다.
"현행법상 우리 경찰이 부검을 원할 경우, 유족 측은 경찰의 법적 조치에 순응할 의무가 있습니다."
허나, 경수의 반대는 여전히 완강했다.
"그럼 부검 영장을 발부받으세요. 그 전에는 절대 아버지를 부검할 수 없을 겁니다!"
결국 이동기는 법원에 부검을 요청하는 서류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
경찰서를 빠져나온 차경수는 곧바로 김한빈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이 법원에 부검을 신청할거 같습니다."
수화기에서 한빈의 태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법원에서 부검 영장을 발부 받으려면 최소 내일 오후에나 가능하니까, 경수씨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정말 12시간이 지나면 독극물이 체내에서 사라지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눈이나 붙이세요.
"그럼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경수는 전화를 끊은 뒤 인근의 자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
한강변을 거닐며 나를 뒤따르는 이태강에게 넌지시 말했다.
"형님은 이번 일에서 손을 떼십시오."
"갑자기 그게 무슨 뜻이지?"
"차경수와 쓸데없이 엮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놈과 가까워지는게 마음에 걸리는 건가?"
"그런 피라미 따위에 제가 연연할 것으로 보이십니까?"
"하긴, 김 회장같은 거물이 별 볼 일 없는 차경수 따위를 안중에 둘 이유가 전혀 없겠지."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국과수에서 차 회장의 사체를 부검할 예정인데, 대비책이 있는 건가?"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과수는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복안이 있는 모양이군."
"네. 그래서 형님에게 차경수 주변에서 멀찍이 물러나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리미리 몸조심을 하는 차원에서."
그제야 태강이 납득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강변의 벤치에 자리를 잡은 뒤 재차 담론을 이어갔다.
"이제 낙원그룹의 후계자로 차경수를 옹립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놈을 키워줄 생각인가?"
"그룹 후계자로 유력한 차현수를 강하게 압박할 계획입니다."
"어떻게?"
"차현수를 조사해보니 한국 여성에게 성폭행으로 고소를 당한 전력이 있더군요. 물론 이미 합의한 상태지만, 한국 법률은 얼마든지 재고소가 가능한거 아니겠습니까?"
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여자에게 재고소를 부추기라는 말인가?"
"그건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쓸만한 검사나 붙여주십시오."
"고소장을 어디에 제출할 생각이지?"
"당연히 중앙지검 특수부 쪽에 넣을 예정입니다. 재벌과 연관된 사건이니까."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런 일에는 형님이 전문가니까, 확실하게 분위기를 잡아주십시오."
태강이 탐욕에 물든 얼굴로 말했다.
"저번에 약속한 500억을 절대 잊지말게."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형님의 해외 계좌로 500억원에 상당하는 달러를 이체시켜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나중에 보자. 우하하하하...!"
그는 흡족한 웃음을 길게 흘려보내며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대검찰청 총장실에 김동수 중앙지검장이 나타났다.
그는 이태강의 직계 라인이었다.
태강은 면전에 나타난 김동수에게 은근한 어조로 운을 뗐다.
"낙원그룹의 차현수를 아나?"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인물 아닙니까?"
"그래. 그런데 말이지. VIP가 그 녀석을 아주 싫어한단 말일세. 일본으로 한국의 국부를 유출하는 매국노로 취급하시더군."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내가 뭐하러 자네에게 거짓을 말하겠나. 안그런가?"
김동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태강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VIP는 그놈이 교도소에서 푹 썩기를 바라시네. 그러니까 조애숙이란 여자를 만나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그리 말하며 조애숙의 신상파일을 김동수에게 내밀었다.
***
김동수는 중앙지검에 도착하자마자 특수부의 이도형 부장 검사를 면전에 호출했다.
그는 지검장실에 나타난 이도형에게 조애숙의 신상파일을 건네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BH에서 직접 내려온 하명 사건이니까 알아서 퍼즐을 맞춰봐."
이도형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BH라면 청와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알아서 잘해보라고."
김동수는 그리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이도형은 지검장실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사무실 책상에 좌정한 채 조애숙의 신상파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애숙은 대단한 미모를 타고난 여성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텐프로 룸살롱에서 에이스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룸살롱을 찾은 낙원그룹의 후계자인 차현수를 접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십분 과시하며 차현수의 눈에 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런 노력 탓에 차현수는 수개월 동안 조애숙과 엔조이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권태기를 느끼자마자 매정하게 차버렸다.
조애숙은 하루아침에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차현수에게 돈을 뜯어내기로 결심했다. 그녀 나름의 복수였다.
결국 그녀는 강남 경찰에서 차현수를 혼인빙자 간음으로 고소했다.
그러기를 얼마후 3억원 상당의 합의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게 된다.
조애숙의 신상파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 탓일까. 이도형은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조애숙은 이미 합의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한 전력이 있었다.
그런 여자가 성폭행 혐의로 차현수를 재고소 한다면, 고소의 순수성을 의심받게 된다.
조애숙을 주재료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한계가 뚜렸했다.
법원이 그녀의 고소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차현수를 성폭행 혐의로 교소도에 집어넣고 싶어했다.
법원 역시 청와대의 입장을 인지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다.
이도형은 일단 조애숙을 만나서 사건을 조율하기로 마음먹었다.
***
다음날.
중앙지검에 조애숙이 나타났다.
그녀는 곧바로 이도형 부장 검사실로 직행했다.
이도형은 자신의 사무실에 나타난 조애숙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그 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낙원그룹의 차현수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할 생각입니까?"
"네. 그래서 이미 고소장도 갖고 왔어요."
조애숙은 그리 말하며 준비해온 고소장을 이도형에게 내밀었다.
도형은 그녀가 건넨 고소장을 재빨리 살핀 뒤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 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전에 수억대의 금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한 전력이 있더군요. 그 점에 관해서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그때는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던 거에요. 저는 수개월동안 차현수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어요. 원하신다면 그 당시 제가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를 제출할게요."
그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차현수의 법적 처벌이에요. 합의고 뭐고 관심이 전혀 없으니까 법대로 그 자식을 처벌해 주세요!"
그녀가 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할 무렵, 차현수는 국과수에서 차재성 회장의 부검을 참관하고 있었다.
그는 부친의 죽음에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경찰의 부검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차경수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새벽 무렵.
10시간 동안 이어진 차 회장의 부검이 드디어 종료됐다.
부검의는 차현수와 차경수를 비롯한 차 회장의 유족들에게 침중한 목소리로 부검 결과를 전했다.
"심혈관계 질환에 의한 심정지, 즉 돌연사로 밝혀졌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고인의 체내에서 의심갈 만한 약물이 일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만."
차현수의 얼굴에 허탈한 표정이 그려졌다.
반면 차경수는 만면가득 득의양양한 표정을 떠올리며 현수를 조롱하듯 쳐다봤다.
그런 탓일까, 현수의 입에서 거친 억양의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빠가야로! 네놈은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하나도 슬픈 기색이 없구나! 더러운 칙쇼!"
경수 역시 일본어로 맞대응했다.
"한국말도 못하는 주제에 나한테 형노릇을 하려고 드는거냐! 네놈이 환장하는 일본으로 지금 당장 꺼지라고!"
"더러운 조센징 따위가 감히 나와 맞먹으려 드는 거냐! 개같은 후데이 센징(불령선인) 주제에!"
현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머지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을 유족들 앞에서 해버렸다.
대다수 한국인으로 구성된 유족들 앞에서 '더러운 조센징!' '후데이 센징!' 등의 한국인을 멸시하는 단어를 남발한 탓이다.
그런 때문일까. 장내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차갑게 얼어버렸다.
일본 핏줄을 이은 차현수를 지지하는 세력과 한국 혈통인 차경수를 지원하는 세력이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본 까닭이다.
유족들은 두 부류로 양분된 채 한치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낙원그룹의 차재일 부회장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