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재신강림(財神降臨)
삼송중공업은 총 2개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전 건설의 첫발도 제대로 떼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전 예정지역의 주민과 환경단체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힌 탓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조선업의 역대급 불황 덕분에, 원전 건설에 투입할 자금마저 태부족한 형편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었다
결국 삼송중공업의 정윤수 회장은 원전 사업권을 대영중공업에 매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원전보다는 삼송중공업의 핵심인 조선 부문의 심각한 자금난을 해소하는 게 급선무였다.
***
상지원 접견실에 들어서자 정윤수 회장의 초췌한 모습이 보였다.
조선업 부문의 심각한 불황에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책상에 좌정한 뒤 긴장한 얼굴로 소파에 착석한 정윤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를 찾아오신 연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원전 사업권 매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장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내 공식 직함은 여전히 부회장이었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회장님으로 존칭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회장이란 직위가 내 권위에 부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원전사업을 포기할 생각입니까?"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조선분야의 적자가 심각한 상황이라, 현실적으로 원전에 투자할 여력이 거의 없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정윤수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저희는 정부에서 총 10개에 달하는 원전 사업권을 따냈습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원전 사업권이 필요없다는 뜻이죠. 그러니 다른 대기업을 찾아가 보십시오."
정윤수가 애절한 얼굴로 읍소했다.
"삼송중공업이 취득한 원전 사업권을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생각을 재고해 주십시오."
"저희는 원전 사업권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기업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경호실에 콜을 넣었다.
잠시 뒤, 장내에 나타난 경호원들이 정윤수를 접견실 밖으로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속이 후련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원전 사업에 욕심을 부린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자업자득이다. 개자식아!
***
김장호는 집권여당의 당대표였다.
그런 탓일까. 그 역시 내심 차기 국무총리직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나름의 통치력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부질없는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당내에 이태강 검찰 총장이 차기 총리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돈 까닭이다.
그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청와대 비서실장인 조용문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그날 저녁.
여의도 인근의 한정식집에 김장호 대표와 조용문 비서실장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정갈한 한식으로 배를 채우는 한편,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태강 검찰 총장을 차기 총리로 내정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김장호의 물음에 조용문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이 결정한 사안이라, 저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고 있습니다."
조용문이 소문의 진위를 사실로 인정하자, 김장호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태강을 총리로 기용하려는 이유가...? 설마...?"
조용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장호가 낙담한 얼굴로 물었다.
"이총장을 대선주자로 키우려는 복안을 어르신이 갖고 계신 겁니까?"
"김한빈 회장의 강력한 로비에 어르신이 넘어가신거 같습니다."
"김 회장이 이총장을 대선주자로 키우려 한다는 말씀입니까?"
조용문이 긍정의 눈빛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거 같습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용문을 먼저 떠나보낸 김장호는, 나홀로 자음자작에 몰두하는 한편 김한빈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뇌리에 김한빈의 패기만만한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한빈은 한국 재계의 숨은 실력자였다.
공식직함은 대영그룹의 부회장에 불과했으나, 그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그룹 총수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플과 아마존, 페이스북 등에도 엄청난 지분을 갖고 있다는 믿기 힘든 소문마저 나돌고 있었다.
그런 거물이 태강을 후원한다고 생각하자, 장호는 등골이 절로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꿈꾸는 대권이 한낱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진 탓이다.
장호는 한빈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
뉴욕을 방문했다.
태산그룹 지주사의 지분을 외국계 사모펀드에 매각하기 위함이었다.
중간에서 거래를 중개한 칼라일 그룹의 제퍼슨 회장과 맨해튼 인근의 래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퍼슨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퍼 이스트 사모펀드가 태산그룹 지주사의 과반수 지분 취득에 관심을 표명하더군. 혹시 그들에 대해 알고 있나?"
"잘 모릅니다."
"그럴테지. 생긴지 얼마 안된 신생 사모펀드니까."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퍼 이스트는 골드만삭스 계열이네. 당연히 인수자금은 풍족한 편이지."
"그들이 원하는 인수가를 알려주십시오."
"태산그룹 지주사의 지분 전량을 인수하는 대가로 90억불(10조8천억)을 제시하더군."
"그 정도로는 택도 없습니다. 최소 110억불(13조2천억) 이상은 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상외로 간극이 크구만."
"그러니 제 생각을 그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알겠네. 김 회장의 뜻을 어퍼 이스트 관계자들에게 대신 전해주지."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해 주시면 수수료 명목으로 1천만불(120억)을 회장님에게 제공하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군. 하하하하...!"
제퍼슨의 입에서 흡족한 웃음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
센트럴파크 인근의 포시즌스 호텔 펜트하우스로 들어서자,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흡연을 즐기는 이태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번 뉴욕행에 나와 동행한 상태였다.
총장 임기 말년을 휴가로 보내려는 속셈이었다.
그의 맞은편 소파에 마주 앉은 채 넌지시 운을 뗐다.
"청문회 준비는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태강이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태연히 즉답했다.
"부동산과 은행 예금, 주식 등을 꼼꼼이 세탁했으니까 김 회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기자들과 야당이 형님의 흠집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알았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고, 뉴욕 미녀들이 있는 근사한 술집에서 한잔 하자고."
그는 여전히 이팔청춘이었다.
겉모습은 50대 후반이었지만.
"그건 형님이 알아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뉴욕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또 누구를 만나려고?"
"아담 의원을 만날 생각입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정말 그 양반을 만날 생각인가?"
"겸사겸사 만나봐야 할거 같습니다."
그러자 태강이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담이란 양반이, 미국 정가에 그렇게 영향력이 막강하다면서?"
"형님의 상상 이상입니다. 그 정도만 알고 계십시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아담 의원을 뵙고 싶은데, 김 회장이 다리를 놔주면 안될까?"
태강이 간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아담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아직 급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할테니까, 너무 보채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다음날.
포시즌스 호텔 펜트하우스의 옥상 인피니트 풀장에서 수영을 즐길 무렵,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하동균 비서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가 귓속말로 보고를 올렸다.
"한국당의 김장호 대표가 회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곳에 그 사람이 왔다는 말인가요?"
"네. 회장님."
"나를 만나려는 이유가 뭐죠?"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펜트하우스의 개인 서재로 안내하세요."
"예. 회장님."
간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개인서재로 들어서자 장년의 남자가 나를 향해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조곤조곤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본의아니게 폐를 끼친 점, 심히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그런 걸, 아시는 분이 연락도 없이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거듭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가 이 호텔에 체류한다는 걸 어떻게 파악하신 거죠?"
"대사관 직원에게 문의한 결과,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뉴욕 총영사관의 직원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내 신분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소파를 손짓하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왕 저를 찾아오셨으니, 허심탄회하게 용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김장호는 소파에 착석한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회장님께서 이태강 검찰 총장을 후원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요?"
"내가 그걸 대표님에게 말할 의무가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회장님의 확실한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
그가 정색한 얼굴로 내 눈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단단히 각오한 모양새였다.
결국 그에게 사실대로 답변했다.
"저는 이태강 총장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된거 같은데, 만족하십니까?"
김장호가 흠칫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지금 하신 말씀이 본심이십니까?"
"네. 오래전부터 저는 이태강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육성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영박 대통령에게 그를 차기 국무총리로 낙점해 달라고 요구한 거죠."
내 거침없는 발언이 이어지자, 그의 얼굴 표정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가주십시오. 대표님."
김장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며 간절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회장님."
그의 읍소는 계속 이어졌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회장님."
문득 김장호가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집권여당의 당대표였다.
당내 경선에서 이태강에게 대의원들의 표를 몰아줄 확실한 구심점 역할에, 최적화된 당내 인사였다.
그런 판단이 서자, 그가 새롭게 보였다.
이태강의 전략적 파트너로 여겨진 것이다.
"한국에 들어가서 다시 한번 만납시다. 제가 연락을 드릴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자 김장호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
비서진들을 뒤로한 채 포시즌스 호텔을 몰래 빠져나왔다.
그 후, 불꺼진 뒷골목을 배회하며 배트맨 놀이에 심취했다.
뒷골목 불량배들이 눈에 보이는 족족, 내공이 가미된 무시무시한 주먹으로 초전박살을 내버렸다.
5갑자에 육박하는 내공 덕분에, 나는 극한의 동체시력과 극쾌의 순간 스피드를 일신에 구비하게 되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적을 탐지함과 동시에 개놈들을 수십배 이상 능가하는 가공할 속도로 유효적절한 타격이 가능해진 것이다.
내 눈에 포착된 개자식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무지막지한 핵펀치에 곤죽이 되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퍼억! 퍼어억! 퍽퍽퍽퍽퍽퍽퍽...!
"끄악! 크헉! 으악! 아아아악...!"
피떡갈비로 전락한 후레자식들이 더러운 길바닥에 큰대자로 누워버렸다.
자업자득이다.
뒷골목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등 뒤에서 흑인 남자 특유의 구성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우! 정말 놀라운 주먹이군. 혹시 자네 복싱에 관심 없나?"
고개를 돌리자 남루한 옷차림의 흑인 노인이 나를 손짓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는 나를 전도유망한 복싱 꿈나무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복싱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안타깝군. 자네 정도의 스피드와 파워라면 헤비급 통합 챔프도 꿈이 아닐텐데..."
그는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혀를 끌끌 찼다.
그 정도로 내 복싱 스킬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노인장은 넝마나 마찬가지인 다헤진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전형적인 노숙자의 행색이었다.
문득 그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에서 백달러 지폐를 모두 꺼내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내가 건네준 백달러 뭉치를 품안에 재빨리 수납한 뒤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가 오늘 재신(財神)을 운좋게 만났구만. 암튼 고맙네. 우하하하하...!"
그의 입에서 세상을 전부 다 가진 듯한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