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이 돈을 숨김-136화 (136/175)

136화 돌고도는 물레방아

원자력발전소의 개당 건설 단가는 최소 2조원 내외였다.

거기에 초기 운영비용을 합할 경우 2조원을 훌쩍 넘어서게 된다.

더구나 우리 대영중공업은 그런 원전을 무려 10개씩이나 건설할 예정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20조원 안팎의 사업추진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대영그룹은 메모리반도체와 미래 신수종 사업을 중심으로 사내유보금을 대대적으로 투입할 예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국내 시중은행에서 장기 저리로 20조원 내외를 대출받기로 결정했다.

원래 비지니스는 남의 돈으로 사업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늘도 알고 땅도 다 아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영박 대통령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

늦은 밤.

청와대 관저를 극비리에 방문했다.

이영박은 책상에 앉은 채 가식적인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푹신한 소파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후, 내 용건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원전 건설과 운용비용이 태부족합니다. 그러니 대통령님이 힘을 좀 써 주십시오."

"나더러 어떻게 힘을 써 달라는 말씀이오?"

"시중 은행에서 20조원 정도를 장기저리로 융자받고 싶습니다."

순간 영박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그 문제는 김 회장이 자체적으로 은행측과 협의를 하시는 게..."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는 그동안 대통령님에게 조단위가 넘는 정치자금을 제공했습니다. 그런 저를 너무 섭섭하게 대하시는거 아닙니까?"

냉랭하게 대꾸하자, 영박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말했다.

"20조원은 너무 많은 금액이에요."

"그럼 어느 수준까지 융자금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10조원 이상은 도움을 드릴 수 없을거 같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대신 원하시는대로 장기저리로 10조원을 융자 받을 수 있도록 편의를 봐드리겠소."

"정말 20조원은 불가능한 겁니까?"

"국내 금융권의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해요."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10조원 안팎을 대출해 주십시오. 대신 20년 후에 원금을 상환하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연이율은 1.0% 수준을 원합니다."

영박이 돈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말했다.

"커미션 조로 2천5백억을 주십시오."

그는 돈 나올 구멍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이는 탐욕스런 존재였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2천5백억을 커미션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그제야 영박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청와대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청와대.

장현조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영박은 눈 앞에 나타난 장현조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대영중공업에 총액 10조원에 달하는 융자를 알선하세요. 대출 조건은 20년 원금 상환 유예와 연리 1.0%를 보장하는 겁니다."

그러자 장현조가 고개를 저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너무 파격적인 특혜 대출입니다.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뒷말이 나올 공산이 높습니다. 대통령님."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부총리는 내 명령을 실행에 옮기세요. 그러라고 당신을 경제 부총리에 임명한 거니까!"

영박이 심하게 역정을 내자, 장현조가 두려운 얼굴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아시면, 오늘 당장 시중 은행장들과 만나서 내 말을 전달하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5개 시중 은행에서 각각 2조원을 조달하세요. 그리고 500억은 내가 지정하는 계좌로 이체하라고 은행장들에게 말을 해놓으세요."

영박은 그리 말하며 메모지 한장을 장현조에게 내밀었다.

메모지에는 해외 은행의 계좌번호가 적혀있었다.

장현조는 메모지를 챙긴 뒤 집무실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

장현조 경제부총리와 시중 은행장들이 강남 모처의 일식당에서 회합을 가졌다.

장현조는 면전에 마주앉은 다섯명의 은행장들에게 엄한 눈초리로 지시를 내렸다.

"대영중공업에 각각 2조원씩을 대출하십시오."

얼굴에 금테 안경을 착용한 은행장이 질문을 던졌다.

"대출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장현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20년 동안 원금 상환을 유예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이율은 1.0% 미만이어야 하고."

순간 시중 은행장들의 얼굴이 잔뜩 찌뿌려졌다.

특혜 대출을 강요한 탓이다.

허나, 그들은 감히 장 부총리에게 반기를 들만한 용기가 없었다.

장 부총리는 그들의 임명권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건 VIP께서 결정하신 사인이니까 신속하게 대출 문제를 마무리 지으셔야 합니다."

장현조는 이영박까지 들먹이며 은행장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런 탓일까. 은행장들이 고분고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조의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대출금 중에서 500억은 이 계좌로 이체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테이블 위에 5장의 메모지를 올려놓았다.

메모지에는 해외 은행의 계좌번호가 적혀있었다.

은행장들은 메모지를 챙기자마자 장내에서 부리나케 사라졌다.

***

상지원 접견실로 진대현 본부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대현은 그리 말하며 면전에 공손히 시립했다.

그에게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대영중공업 명의로 5개 시중은행에 각각 2조원 가량의 대출서류를 제출하세요."

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은행장들과 사전에 협의를 하신 겁니까?"

"네. 이미 입을 맞췄으니까, 대출 서류만 제출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오종덕 총리가 퇴임하자마자 대영그룹의 명예 회장으로 영입할 계획이니까, 임시주총을 준비하세요."

"예. 회장님."

대현을 내보낸 뒤 경제 잡지에 시선을 모았다.

포브스지의 신년호를 펼치자 전 세계 억만장자 순위표가 보였다.

리스트 최상단은 MS사의 빌게이츠와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회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포브스지의 억만장자 순위는 허점이 많았다.

사우디 왕가와 미국과 유럽의 천조 재벌 가문들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유한 부는 빌게이츠와 제프 베이조스를 한참이나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그들은 포브스지의 억만장자 순위에 자신들이 포함되는 걸, 극력 회피하고 있었다. 대중들의 불필요한 관심을 부담스럽게 여긴 탓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재산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들이 뇌리를 차례로 스칠 무렵, 접견실에 하동균 비서팀장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죠?"

그가 은근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김수아씨를 섭외했습니다."

김수아는 대한민국 톱 여배우 중의 한명이었다.

"그녀를 지금 당장 낙원호텔 펜트하우스로 데리고 오세요."

"예. 회장님."

그날 밤.

낙원호텔 펜트하우스로 들어서자 섹시한 드레스 차림의 김수아가 나를 반겼다.

우리는 그날밤, 즐거운 시간을 오래도록 함께 했다.

***

국조은행의 이영기 센터장은 굵직굵직한 대출건을 전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큰 돈이 오가는 대출을 전담한 덕분에 거액의 리베이트를 중간에서 챙기고 있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은행장도 다 알고 있었다.

대출 리베이트를 사이좋게 나눠먹은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단 한푼의 대출 리베이트도 챙기지 못했다.

2조원에 달하는 초장기 저리 상품임에도, 대영중공업은 일원땡전 한푼 그에게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이영기는 괘씸한 마음에, 고등학교 동창인 중앙지검 조세금융부의 김도철 부장 검사와의 술자리에서 대영중공업의 특혜 대출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까발렸다.

김도철은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중앙지검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영기가 술자리에서 한 말을 차분히 곱씹었다.

도철은 출세지향적인 검사였다.

그는 이 건이 어마어마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현직 대통령과 대영그룹의 오너인 김한빈이 동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도철은 아무도 모르게 대영중공업 특혜대출 사건을 은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

김도철 부장검사는 서울 모처의 술집으로 이영기를 불러냈다.

도철은 면전에 나타난 영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대영중공업 특혜 대출 서류를 나에게 넘겨. 그리고 이영박 대통령의 해외 계좌에 입금한 증거서류도 넘겨주면 고맙겠다."

영기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당연히 이영박이랑 대영그룹을 조지려고 그러는거지."

"무슨 이유로?"

"나도 이번 기회에 출세를 해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자면 굵직한 스캔들을 내 손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거 아니냐?"

"이 자식아! 이영박은 현직 대통령이라고!"

"이미 그 인간은 레임덕이 시작됐으니까. 절대 우리 검찰을 못건드릴거다. 그리고 언론도 동원할 계획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마라."

영기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 자료를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혓물켜지 마라!"

순간 도철의 입에서 야비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나에게 협조를 거부하면, 네놈을 횡령 배임 혐의로 수사 할 밖에. 후후..."

영기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도철은 그가 대출 리베이트 대가로 거액을 챙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 술자리에서 툭하면 자랑삼아 떠들었기 때문이다.

영기는 친구를 대놓고 겁박하는 도철이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친구사이에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사건에 협조를 하라고."

결국 영기는 도철의 협박에 굴복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

김도철은 이영기가 건네준 증거자료를 자택 금고에 보관했다.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는 자기 혼자서 대영중공업 특혜 대출 건을 공론화 하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중앙지검과 대검에 대거 포진한 이태강 라인이 두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던 탓이다.

이태강은 대영그룹의 오너인 김한빈의 스폰을 받고 있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도철은 언론을 등에 엎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중앙지검 출입기자인 김세현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나름 정의감이 충만한 기자였기 때문이다.

며칠 후.

도철은 시내 모처에서 김세현 기자와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대영중공업 특혜 대출에 이영박 대통령이 깊숙이 연루됐다는 증거자료를 다수 넘겼다. 물론 사본이었다.

***

집으로 귀가한 김세현의 얼굴에 끈적한 탐욕이 그려졌다.

김도철에게서 입수한 자료는 큰 돈이 될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실 세현은 누구보다 돈을 탐하는 인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렴한 기자로 인식되었지만 그는 기업체의 비리 증거를 확보한 뒤 공갈 협박을 밥먹듯이 자행했다.

그 대가로 기자치고는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세현의 수중에 대영중공업이 연관된 비리 증거가 들어왔다.

당연히 그는 대영그룹에 이런 사실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상암동 켄싱턴 빌딩에 세현이 나타났다.

얼마 후, 그는 대영그룹의 보안 책임자인 박종태 실장과 면담을 가졌다.

***

상지원의 거실에서 TV 뉴스를 시청했다.

-국회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한 이태강 신임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이 청와대로 넘어갔다.

태강은 이영박에게서 국무총리 임명장을 수여받은 뒤 환한 얼굴로 그와 악수를 교환했다.

기분이 많이 좋은 눈치였다.

차기 대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에 도달한 까닭이었다.

TV를 끈 뒤 체력단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트니스룸에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할 즈음. 박종태 감사 실장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대영중공업의 특혜 대출에 대해서 중앙지검의 김도철 부장 검사가 수사에 나선 모양입니다."

그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국조은행의 이영기 센터장이 김도철 검사에게 특혜 대출 자료 일체를 전부 넘겼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중앙지검에 출입하는 김세현 기자가 알려준 사실입니다."

"중앙지검 출입기자라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내가 알아서 해결할테니 김 기자에게 사례금으로 5억 정도를 지불하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박종태를 내보낸 뒤 이태강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국무총리에 취임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사이에 별 말을 다하는군. 암튼 고맙네. 김 회장.

"그리고 형님이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중앙지검의 김도철이 대영중공업 특혜 대출에 대해서 제멋대로 수사를 하는거 같습니다. 그러니 형님이 중간에서 그놈을 차단해 주십시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중앙지검 출입기자의 말이니까 신빙성이 높을 겁니다."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하려는 찰나, 이태강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도철을 조사해 보니까 독불장군이더군. 상관의 지시를 순순히 따를 놈이 아니더라고.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까 김 회장이 돈으로 그놈을 구슬려봐. 나는 지금 총리직 수행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나중에 봅시다.

통화를 끊은 뒤 차에 몸을 실었다.

켄싱턴 빌딩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박종태 실장을 호출했다.

면전에 나타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김도철을 돈이나 직위로 회유하세요. 만약 끝까지 말을 안들으면 물리력을 행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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