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열흘 붉은 꽃은 없다
상지원 서재.
고풍스런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채 레너드 의장의 신상파일에 시선을 고정했다.
레너드는 향년 7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24시간 분 단위 스케쥴로 움직이고 있었다.
군산복합체의 대외 정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월가와 국제 에너지 업계의 이권을 조율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레너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하며 미국의 국익과 자신의 사익을 극대화하는데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허나, 우리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한국의 핵무장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
그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영원히 핵무장을 할 수 없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을씨년스런 가을비가 창문을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더불어 바람에 나부끼는 초라한 나뭇잎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아찔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레너드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는 세찬 바람 앞의 등불같은 신세였다.
결코 내 손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운기행공에 돌입했다.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자 5갑자에 육박하는 막대한 내공이 전신의 기경팔맥으로 쾌속하게 퍼져갔다.
물밀듯이 용솟음치는 내기가 전신을 일주천하자 짜릿한 상쾌함에 절로 휩싸였다.
그후로도, 면면부절하게 내력을 운용하며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올때까지 운공을 계속했다.
운기행공을 끝마치자마자 상지원에 조성된 육상트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트랙에서 조깅을 즐기는 한편, 레너드를 효과적으로 척살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름 열심히 궁구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쓸만한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순간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조깅을 끝마친 뒤 본관 식당으로 들어갔다.
얼큰한 육개장으로 아침을 때운 후, 접견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이제 막 출근한 하동균 비서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하루 스케쥴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의 보고를 귓등으로 흘리며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를 자욱이 말아올리며 하동균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주 스케쥴을 모두 취소하세요."
그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청와대 오찬 회동도 취소하실 생각입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동균이 안절부절하는 얼굴로 말했다.
"청와대 회동을 취소하면 뒷말이 나올 겁니다. 회장님."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니까, 청와대 측에 회동 취소를 전하세요."
그제야 녀석이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해외로 출국할 생각이니까, 1주일 동안 나를 찾지 마십시오."
"전용기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일반 여객기를 이용할 계획이니까."
"그럼 항공권을 예매하겠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팀장님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회장님 혼자서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네. 그러니 팀장님은 누가 내 신변에 대해서 물으면, 상지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대충 둘러대십시오."
동균의 얼굴에 한줄기 의혹이 떠올랐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관심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팀장님은 아무런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나가보세요."
그리 말하자 녀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재차 숙였다.
***
동균을 내보낸 뒤 김태구 경호팀장을 호출했다.
면전에 나타난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육상 트랙 한켠에 사격 표지판을 설치하세요."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격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그냥 돌팔매질을 연습삼아 해볼 계획입니다."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럴 일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표지판을 설치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1시간 후.
육상 트랙에 들어서자 저 멀리 서 있는 사격 표지판이 보였다.
거의 3킬로 거리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곧바로 준비해온 조약돌을 표지판을 목표로 세차게 내던졌다.
순간 공기를 가르는 스산한 파공성이 귓전을 스쳤다.
쉐액!
동시에 표지판의 머리 부분이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펑!
그후로도 표지판을 목표로 조약돌을 쉴 새 없이 내던졌다.
당연히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두눈에 5갑자에 달하는 가공할 내공을 불어넣은 탓에, 3킬로 전방의 표지판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명중률을 과시했다.
예상대로의 결과를 도출하자 내심 흡족한 심경이었다.
이제 실행에 옮기면 게임 끝이었다.
점심 식사를 끝마친 뒤 접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대영제철의 김영무 사장이 나를 반겼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용건을 말했다.
"고강도의 철제 구슬을 오늘 안으로 제작해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메모지에 내가 원하는 구슬 디자인을 대충 적어서 그에게 건넸다.
김영무는 메모지를 확인한 뒤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중으로 철제 구슬을 제작완료하겠습니다."
"오늘 밤 12시 이전까지 상지원으로 갖고 오십시오."
"예. 회장님."
제철소에서 철제 구슬 만드는 건, 누워서 식은죽 먹기였다.
***
다음날.
아침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3층 드레스룸으로 올라갔다.
드레스 룸에는 럭셔리 명품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멋드러진 맞춤 수트와 구두, 수십억원에 달하는 명품 시계가 드레스룸을 빼곡히 장식한 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드레스룸 구석에 놓여있는 수납함에 모아졌다.
그 곳에는 미국 외교관 여권과 외교행낭, 백달러짜리 돈 뭉치가 들어있었다.
아담이 마련해준 물품이었다.
수납함에서 미국 외교관의 여권과 행낭, 돈을 꺼내서 고급스런 가죽 파우치에 집어 넣었다. 그 후, 캐쥬얼한 옷차림으로 환복한 뒤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상지원을 물셀틈없이 경계하는 경호원들을 뒤로한 채 김태구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인천공항의 거대한 전경이 차창 밖에 드러났다.
차에서 내린 뒤 김태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1주일 동안 상지원에서 대기하세요."
그러자 녀석이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이만 돌아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공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국 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한 뒤 에미레이트 항공사의 보잉 707기에 탑승했다.
승무원에게 항공권을 제시하자 퍼스트 클래스로 나를 안내했다.
에미레이트 항공사의 퍼트스 클래스는 독실 구조였다.
여타 항공사와 차원이 다른 특별한 서비스였다.
안락한 퍼스트 클래스에서 영화와 드라마를 관람하며 동서양의 산해진미와 미주가효를 마음껏 즐겼다.
***
싱가포르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만다린 호텔 맞은편에 위치한 구룡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레너드는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동북아와 동남아의 금융계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한달에 한번 꼴로 싱가포르를 드나들었다.
아담의 정보가 확실하다면 그는 오늘 오후 7시경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뒤 곧바로 금융계 인사들과 회담을 가질 계획이었다.
회담 장소는 만다린 호텔의 프레지던셜 스위트룸이 유력했다.
그는 항상 헬기를 이동수단으로 사용했다.
내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암살을 수행하기에 나름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 탓이었다.
호텔방에서 중화요리로 배를 채운 뒤 침대 위에서 운기행공에 돌입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함이었다.
***
벽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행동에 개시할 시점이었다.
외교 행낭에서 묵직한 크기의 철제 구슬을 꺼낸 뒤 청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후, 호텔방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계단을 이용해 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옥상 흅연실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안성맞춤의 환경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는 한편, 맞은편 만달래이 호텔 옥상에 시선을 모았다.
그 호텔 옥상에도 흡연실과 헬기 착륙장이 있었다.
이제 잠시 뒤면, 레너드를 태운 헬기가 만달래이 호텔 옥상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흡연에 열중하며 만달래이 호텔 옥상에 시선을 고정하자, 단전의 내공이 두눈에 절로 모아졌다.
바로 그때, 동쪽 밤하늘에 헬기 한대가 홀연히 출현했다.
거리상으로 3킬로 정도였다.
두눈에 안력을 집중하자 레너드의 허연 백발과 특유의 구렛나루가 시야에 포착됐다.
바로 그 순간, 철제 구슬이 헬기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총알에 맞먹는 스피드였다.
철제 구슬은 헬기의 엔진부분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직후 요란한 폭음이 매섭게 울려퍼졌다.
콰쾅쾅쾅쾅...!
헬기는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며 지상으로 속절없이 추락했다.
레너드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이었다.
***
다음날.
호텔방에서 싱가포르 현지 뉴스를 여유로이 시청했다.
-어제밤 싱가포르 도심에서 발생한 헬기 추락사고로 신원불명의 미국인과 헬기 조종사가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략...
원하는 결과를 얻은 탓인지 홀가분한 심경이었다.
그런 탓일까. 아름다운 그녀들과 오붓한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이럴때는 클럽이 최고였다.
캐쥬얼한 옷차림으로 호텔을 나섰다.
그 후, 인근의 클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클럽에 들어서자 감각적인 EDM 사운드가 들려왔다.
그런 때문인지 내 몸이 절로 흥겨워졌다.
세련된 클럽 댄스를 선보이며 무대를 장악한 탓인지 내 곁으로 미모의 여성들이 불나방처럼 찾아들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외모가 뛰어난 그녀를 간택한 뒤 인근의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
워싱턴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군산복합체의 긴급 회의가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레너드 의장의 죽음이 초래한 결과였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운타운에 위치한 공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에 들어서자 아담 상원의원이 나를 반겼다.
우리는 고즈넉한 공원을 거닐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레너드 의장을 자네가 죽인 것인가?"
그에게 솔직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의원님."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를 죽인거지?"
"저만의 특별한 무기로 그가 탄 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아담이 의혹에 찬 얼굴로 재차 물었다.
"설마...? 레너드의 헬기에 미리 손을 쓴 겐가?"
"그건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군산복합체를 완전히 장악할 방법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벤치에 착석한 뒤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레너드가 죽었으니 친중파 쪽에서는 하루 빨리 신규 멤버를 가입시키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쪽 사람을 신규 멤버로 추천하는 게 어떻습니까?"
"안그래도 클라크 부의장과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중일세."
"복안이 있으신 겁니까?"
"지금 현재 친중파는 게스코인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네."
게스코인은 에너지 업계의 대부였다.
"당연히 그자 역시 자기쪽 사람을 신규 멤버로 추천할 계획을 갖고 있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게스코인은 레너드 의장의 큰아들인 존폴 레너드를 추천할 가능성이 높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존폴 레너드의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네."
"그자도 유태계 혈통을 이은 겁니까?"
아담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친이 유태인일세. 존폴 레너드의 가입을 최대한으로 늦춰야 하네. 그 안에 자네는 한국의 핵무장을 완료해야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의원님."
***
그날 밤.
맨해탄 모처의 회담실로 들어서자 아담과 군산복합체 멤버들이 길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아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됐다.
클라크 의장이 모두발언을 내뱉었다.
"조사 결과, 레너드 의장의 사인은 헬기 정비불량으로 인한 사고사로 판명났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항시 안전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장내에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미국을 암중에서 이끄는 단체의 수장이,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날, 군산복합체는 당분간 의장직을 공석으로 둔 채 클라크 부의장 체제로 운영하기로 합의를 봤다. 더불어 신규 멤버 가입은 후보자를 선출한 뒤 다시 논의하기로, 클라크 부의장 직권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 탓일까. 친중파 인사들의 볼멘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허나, 클라크는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회의 종료를 선언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고, 다음달 말에 회의를 재개하기로 합시다."
그 말과 동시에 장내를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그러자 친중파 인사들의 얼굴에 일제히 분노한 표정이 그려졌다.
허나,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회의는 이미 끝난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