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천 번 레이스를 경험한 레이서의 직감이랄까요? >
트루맨 주니어부의 하얀 유니폼이 돋보이는 카트 두 대. 선두에는 최영준과 그 뒤를 쫓는 강경원이 있었다.
트랙 매니저가 ‘5’라고 적힌 전광판과 함께 초록 깃발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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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랩 밖에 안 남았어? 빨리 선두로 가야해.’
주니어부에서 강경원은 가장 형이었다. 그래서 주장이 됐고,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고 레이스를 더 잘하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도 영준이한테 지면...’
1년 전, 최영준이 주니어부에 들어왔고, 곧바로 팀 내 에이스가 됐다. 매번 어린 최영준에게 밀린 강경원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오늘은 무조건 선두로 들어간다!’
상위 카트 클래스로 올라가는 인원은 한정적. 이번에도 지면 자신의 승급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강경원이 불안에 떨었다.
“와, 준하가 따라 붙었어!”
“얼마 안남았다 서준하, 화이팅!”
서준하의 카트가 선두 뒤에 따라 붙었다. 3대의 카트가 똑같은 라인을 그리며 코너를 빠져나갔다.
‘남은 랩은 4바퀴. 이제 라인은 몸에 완전히 익었고. 이제 치고 나갈까?’
3대의 카트가 다시 코너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서준하의 눈에 포착된 강경원의 움직임. 강경원이 핸들 위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쟤는 아까부터 왜 저래?’
운전대를 공격적으로 잡는 강경원.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뭔 일이 날 거 같은데?’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레이스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레이서는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이대로 경기 끝날 거 같네요.”
세 대의 카트가 연이어 트랙 위를 달렸다. 어느새 남은 랩은 두 바퀴.
이병훈은 재밌었다며 마치 경기가 끝난 것처럼 말했다.
“준하라는 녀석 아쉬운데요. 뭔가 더 보여줄 것 같았는데. 아까 제치는 스킬이 너무 예술이라 기대감이 너무 컸나?”
이병훈의 말에 답이 없는 주현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아까 그 코너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실력이면 지금 앞에 두 명은 충분히 제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지? 1위 욕심이 없는 건가?’
주현우는 부상 때문에 일본에서 하던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넘어와 유소년 카트를 지도하는 코치였다. 그도 어릴 적 코리아 카트 챔피언쉽을 우승한 실력자 레이서.
‘준하라는 녀석. 지금까지 보여준 레이스는 다른 애들과 어딘가 급이 달랐어.’
실력자의 눈엔 서준하가 1위로 치고 나가지 않는 게 충분히 이상해 보였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왜 치고 나가지 않는 거야.’
트랙 위를 유심히 살피던 주현우가 핸들 위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강경원을 발견했다.
‘저 녀석 불안한데?’
경험상 어린 선수들의 카트 레이스는 항상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겼다.
‘심상치가 않아.’
경기가 이대로 끝나리란 이병훈의 예측과는 다르게 주현우는 그 반대로 생각했다.
‘설마 일부러?’
막바지 추월을 시도하려는 레이서는 매 코너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주현우도 실제 카트 위에서 그런 레이서들을 몇 번 본 적 있다.
‘추월하려는 건가?’
지금 강경원의 모습이 그랬다. 핸들 위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좌우를 살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긴 침묵 끝에 입을 연 주현우.
“제가 볼 땐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데요?”
“네?”
주현우의 말에 이병훈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부우우우우웅!
주현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경원이 3번 코너 안쪽을 파고들었다.
‘비켜, 이 개자식아!’
최영준 옆으로 치고 나가려는 강경원의 카트. 그의 추월 시도에 트랙 위에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아!”
강경원이 최영준과 가까워졌다. 안쪽 코너를 내주면 추월당할 게 뻔한 상황.
“어, 2위가 치고 나간다!”
최영준이 강경원의 카트 엔진음을 듣고, 재빠르게 방어에 들어갔다.
“오, 바로 디펜스 하는데?”
최영준이 본능적으로 인코스를 막아섰다. 금세 가까워진 두 카트.
‘나와, 나오라고!’
하지만 그런 앞차를 신경 쓰지 않고 더 공격적으로 핸들을 조작하는 강경원.
두 선수의 카트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쿵.
결국, 두 카트의 바퀴끼리 부딪히고 말았다. 두 선수의 카트의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야!! 강경원 저 새끼, 뭐하는 거야.”
탁상에 놓인 물병을 집어 던지는 김강현 감독. 트루맨 코치석이 난리가 났다.
부우우웅.
최영준과 강경원 뒤로 요란하게 들려오는 엔진음.
‘...!’
‘...!’
최영준이 인코스로 붙자 코너 바깥쪽으로 공간이 생겼다.
‘지금!’
빈틈을 발견한 서준하가 악셀을 끝까지 밟아 최영준 옆 빈공간을 파고 들었다.
‘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선두로 치고 나가는 서준하의 카트. 최영준이 뒤쫓았지만, 이미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주현우와 이병훈 두 사람.
“이야, 이걸...”
“제 말이 맞았죠?”
“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빈공간으로 치고 들어가네요.”
“그쵸, 쟤들 무슨 각본있는 것처럼 레이스를 하네요, 하하.”
드디어 보고 싶었던 장면을 본 사람처럼, 주현우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와아아아아!”
막판 추월극에 관중들이 열광했다.유소년 카트팀의 레이스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함성이 컸다.
“제 눈에도 2위 카트가 불안해 보였어요. 그 전부터 계속 공격적으로 차를 몰더라구요. 아마 뒤에 있던 3위 준하도 그걸 봤을 거예요.”
주현우가 이병철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서준하의 레이스 전략을 설명했다.
“아, 그걸 봤다면?”
“2위가 추월을 시도할 걸 미리 알았던 거예요. 기회가 올 거라는 알고 있었던 거죠.”
자신의 말에 확신하는 주현우. 반면 이병철은 의아한 표정을 보이며 반문했다.
“허허, 진짜 그렇다면 준하 저 친구, 운이 좋았네요. 2위가 추월에 성공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음, 설명하긴 힘들지만, 트랙 위에선 사고를 낼 것 같은 차가 보여요.”
“그런 게 있나요?”
그건 마치 트랙 위에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믿기 힘든 얘기. 뒤에 나오는 말은 더더욱 그랬다.
“수천 번 레이스를 경험한 레이서의 직감이랄까요?”
“직감이요? 저런 꼬맹이한테 그런 게 있다고요?”
주현우의 마지막 말에 이병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요. 저도 놀라워요.”
부우우웅.
피니쉬 라인에 카트 한 대가 들어서자,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
“준하야, 아침부터 여긴 왜 온 거야?”
“너 카트 잘 타고 싶다고 했지?”
그저 카트 잘 타는 법을 알려준다는 말에 따라 나온 장윤호. 그를 부른 건 서준하였다.
“카트 잘 타는 법이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장윤호의 등을 밀며 달리기 시작하는 서준하.
“야야, 뭐하는 건데!”
“뛰어봐, 알려줄게.”
지난 주말 레이스를 마치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고통 속이었다. 숨을 쉴 때 마다 온몸 근육이 다 아팠다.
‘카트 레이스 한 경기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어.’
그럴 만도 했다. 지난 생에 수없이 많은 트랙을 완주하고도 별 탈 없었던 서준하였으니까.
‘지금부터 체력을 기르지 않으면 또 쓰러져.’
정신은 그대로였어도 몸이 바뀌었다. 11살짜리 어린 아이의 몸은 30바퀴를 도는 카트 레이스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약했다.
“헉헉, 야 서준하. 뭔데 빨리 알려줘.”
“좋아. 너 중력이 뭔지 알지?
“중력?”
달리다 멈춰선 두 사람.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장윤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 초딩. 중력 몰라?”
“아 알아. 지구가 당기는 힘!”
“그래, 그거.”
“너 카트타고 코너 돌 때 네 몸이 옆으로 쏠리는 거 느꼈지?
“응.”
“그게 옆으로 작용하는 중력이야. 카트를 잘 타려면 우선 그 놈이랑 싸워서 이겨야 해.”
“어떻게 이길 수 있는데?”
“이렇게 매일 달리면 돼.”
“엥? 그게 말이 되냐. 달리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정말이었다. 카트를 잘 타려면 달리기를 잘해야 했다. 실제로 전생에 서준하는 마라토너급 달리기 훈련을 했다.
‘내 입으로 내가 그렇게 뛰어서 F1 레이서가 됐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거 참.’
진실을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걸 듣고 어이없어 할 윤호의 표정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윤호 너. 나 저번에 카트 타는 거 봤지?”
“봤지.”
“그날 내 실력. 이렇게 뛰어서 만든 거야.”
“...그래?”
윤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도 그날 보여준 게 있으니 믿을만한가 보다.
F1 드라이버들은 마라토너와 같다. 그들은 2시간에 가까운 레이스 동안 3kg의 땀을 흘린다. 체력을 기르지 않고선 장시간 레이싱을 할 수 없다.
“매일 뛰어서 심장이랑 다리 근육을 키워야 해.”
“심장? 다리 근육?”
다리 무거움 증후군, 흔히 F1병이라고 불리는 병. 이를 막으려면 심폐 능력을 키워야 한다.
“좋았어, 그러면 이제 한 바퀴 더 뛸까?”
“한 바퀴 더?”
“...근데 오늘은 처음이니까 내일부터.”
한 바퀴를 더 뛰자는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뜬 윤호. 아무래도 준하의 말이 크게 와 닿은 것 같지 않다.
“알겠어. 그러면 저기 시계탑까지 네가 나보다 먼저 도착하면, 그때 그만 뛰는 걸로 하자.”
“시계탑?”
아이들은 내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장윤호는 승부욕이 강하다.
“그래, 내기 좋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 두 사람.
“준비, 시작!”
F1 팀 소속일 때도 항상 전담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했다. 체력 훈련은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힘든 훈련도 함께하면 유쾌했다.
‘이렇게 같이 뛰니까, 꼭 윤호가 트레이너 코치님 같네.’
윤호를 보니 달리기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근데 내가 이기면 매일 아침 이렇게 뛰는 거다?”
“뭐?”
“크크큭. 먼저 간다아아.”
말을 걸었다며 반칙이라고 투덜거리는 장윤호. 두 사람이 시계탑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XX 공원 만남의 광장]
“헉헉. 야... 이제 그만.”
“그래, 잠깐 쉬자.”
숨을 헐떡거리는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아 맞다, 준하야.”
“응?”
무언가 생각난 듯 장윤호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우리 카트 탔던 날 있지? 그때 너 정신 잃고 어떤 아저씨가 옆에 왔는데. 너 나중에 또 카트 타고 싶으면 여기로 연락하라고 했어.”
“아저씨?”
“응, 아빠 말로는 유명한 카트팀 코치라는데, 내가 이거 주는 걸 깜빡했다.”
장윤호의 주머니 밖으로 껌 종이와 함께 파란색 명함이 한 장 나왔다.
“자, 이거.”
[유소년 카트팀 케노]
[드라이빙 팀장 주현우]
[Tel. 02-456-XXXX]
[H.p 010-7203-XXXX]
한국 유소년 카트팀 케노, 코리아 카트 챔피언쉽에서 매년 1위를 놓치지 않는 팀이자, 세계 각국 자동차경주협회가 주최하는 카트 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는 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지난번 카트장 방문 후 한국 카트에 대해 검색하다 알게 된 명문 카트팀, 케노.
‘맞아, 케노!’
갑자기 서준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윤호야, 카트 또 타고 싶으면 연락하랬다구?”
< 수천 번 레이스를 경험한 레이서의 직감이랄까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