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8화 (8/200)

< 아직 우리 한 명 더 남았잖아? >

머리가 반쯤 까진 중년 남성이 교실로 들어왔다. 자신의 이름을 칠판에 적은 남자가 학생들 앞에 섰다.

“에헴, 저는 오늘 국내 카트 라이선스 교육을 맡은 노진규 강사입니다. 반갑습니다, 허허.”

대회 참가나 국내 여러 트랙에서 카트를 몰기 위해선 협회에서 발급하는 라이센스를 취득해야 한다. 교육과 함께 필기 시험이 있는 과정.

케노팀 야마하 클래스로 입단한 장윤호도 서준하와 함께 교육장을 찾았다.

“에, 일단은 먼저 나눠드린 유인물부터 보시겠습니다이. 첫 번째 장을 넘기면 신청자 유의사항이 나와...”

느릿느릿한 말투와 어딘가 모르게 꽉 막혀 보이는 답답함. 창가 쪽에 자리한 장윤호가 옆자리 서준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 졸라 늦게 끝나겠다.”

“그러니까. 말이 너무 느려.”

아침 일찍 찾은 한국자동차경주 협회의 강의실. 창밖의 하늘은 화창했고, 늙은 강사의 수업은 지루했다.

“어어, 거기 학생. 자는 거야? 내가 방금 뭐가 중요하다고 했지요?”

레이싱 용어를 강의하던 노 강사. 꾸벅꾸벅 졸던 서준하를 발견하곤 그를 향해 물었다.

“그게, 어...”

강사의 물음에 대답 못하는 서준하. 작은 목소리로 장윤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뭐야...?”

고개를 숙인 뒤 입모양으로 답을 알려주는 장윤호.

“클리핑 포인트요.”

“오호, 눈은 감고서도 수업은 잘 듣나보네요이.”

서준하가 장윤호를 향해 ‘나이스’라고 속삭였다.

“오늘 졸거나 무단 이탈하면 큰일납니다이.”

자신의 강의에서 조는 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노진규가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협회장님이 제 친구에요. 수업 태도 불량하면 곧바로 퇴소 조치할 겁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안경을 매만지는 노 강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눈빛으로 서준하를 노려봤다.

“그럼 다시. 클리핑 포인트가 뭐지요?”

“코너링 때 가장 안쪽이 되는 지점이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하는 서준하. 노 강사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다시 음흉하게 웃었다.

“정의는 누구나 아는 거고. 에헴, 그러면 이게 왜 중요하지요?”

이번에도 서준하는 당황한 기색없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클리핑 포인트는 코너 정점에서 조금 앞쪽 지점에 있는데, 이걸 스치는 코너링은 타임 로스(loss)가 적어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답하는 서준하. 노 강사도 이젠 많이 당황한 표정.

그 후로도 노 강사는 계속 질문을 퍼부었지만, 모조리 대답하는 서준하.

“그, 그러면 ‘C=30’ 이건 뭐야.”

심지어 이제는 반말로 묻는 노진규. 격분한 강사의 입에서 이상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어우, 강사님. 그런 건 아무도 몰라요.”

다른 수강생 모두 고개를 내저을 때, 서준하가 입을 열었다.

“캔트(cant)말하시는 거죠? C가 30이면, 음... 경사각이 3이라는 뜻이요.”

눈을 치켜세우던 노진규가 서준하의 대답을 듣고는 넋나간 얼굴이 되어 버렸다.

“와아, 정답인가봐.”

“캔트? 그런 건 처음 들어보는데. 와 저 꼬마 진짜 똑똑하네.”

그리고 강의실 모두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박수에 어리둥절해 하는 서준하.

‘뭐 이런 걸 가지고, 이게 박수 받을 일이야?’

국내와 국제 라이센스를 넘어 F1 드라이버에게만 주어지는 슈퍼라이센스. 그걸 취득한 사람은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전생에 슈퍼 라이센스 딴 보람은 있잖아?’

***

부우우우웅.

피니쉬 라인으로 들어오는 로탁스 한 대. 다음 달 케노팀의 코리아카트챔피언쉽 로탁스 클래스 선발 출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헐, 준원이 형이 졌어.”

경기를 지켜보던 스피디 파크의 관람석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쟤 진짜 잘 탄다. 서준하 1등!”

결과를 보고 놀란 건 케노의 코치진도 마찬가지. 특히나 케노의 감독 성철현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하하. 저 녀석 물건인데? 야 현우야, 이젠 진짜 네 말 믿는다. 준하 저거 코너링이 완전 예술이네!”

“그렇죠? 선두에선 절대 레코드 라인을 놓치지 않아요.”

처음엔 코치들이 호들갑 떠는 거라 여겼다. 어린 나이인 데다가 이 바닥에선 듣도 보도 못한 서준하라는 이름.

“그러면 1,2위가 준하랑 준원이니까. 하... 양준범, 얘를 어떻게 하냐.”

레이스 결과를 눈앞에서 확인한 성 감독. 트랙 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모습은 어딘가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감독님. 제가 볼 땐 크게 고민하실 거 없어요. 준하 저 실력이면, 대회가서도 좋은 결과낼 거예요. 혹시 모르잖아요? 최연소 챔피언에 오를지도...”

그 심정을 잘 아는 주현우가 성 감독 옆으로 다가섰다.

“최연소 챔피언?”

“네, 그렇게 되면 언론이랑 기업들 관심이 쏟아질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 신동이네 최연소네, 이런 타이틀 엄청 좋아하니까.”

콧수염을 연신 만져대던 성 감독.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긴 하지. 그럼 준범이는...”

“준범이는 야먀하 클래스로 내보내죠. 필광하고는 제가 잘 얘기해 볼게요.”

주현우의 얘기는 일리가 있었다. 내년에 열리는 코리아 그랑프리 덕에 언론들이 카트 팀에도 관심을 보였다.

“얼마 전에도 SBC에서 취재 연락 왔었어요.”

지난주엔 케노에도 F1 주최 특집 겸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었다. 성 감독도 모터스포츠 산업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흠... 일단 선수들 다 모이라고 해봐.”

무언가 결심한 듯 성 감독이 코치진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코치진 앞으로 모든 케노 선수가 모였다.

야마하와 주니어부 선수의 밝은 표정과 반대로 긴장된 분위기의 로탁스 레이서들.

“준원이, 종겸이, 태훈이, 준범이 그리고 준하. 로탁스 너희 오늘 고생 많았다. 오늘 레이스에서 패널티 부여는 없었으니까... 3위는 정태훈, 2위 조준원. 그리고 1위는... 서준하 축하한다.”

선수들을 격려하는 성 감독. 1위라는 말에도 옅은 미소만 띄운 서준하가 성 감독의 얼굴을 살폈다.

‘이 아저씨가 어떤 선택을 내리려나.’

경기 전에도 순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보다 서준하는 이번 대회에 누가 나갈지가 더 궁금했다. 지난번 휴게실에서 엿들은 얘기가 있었으니까.

‘대회에 나갈 팀이 필요해서 케노에 왔지만, 썩어 빠진 팀엔 있고 싶지 않아.’

오랜 기간 여러 팀에 소속했던 서준하. 돈을 쫓고 기업에 휘둘리는 팀은 오래 가질 못 한다는 걸 많이 봐 왔다.

‘조준원 대신 양준범을 대회에 붙인다면... 여기도 미래는 없어.’

게다가 서준하는 권위와 권력에 휘둘려 아까운 인재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잃는 것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으음, 그래서 이번 대회 로탁스 선발은...”

잠시 말을 멈춘 성 감독.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 1위, 2위. 서준하와 조준원이 나간다.”

조준원도 상당히 기뻐하는 모습. 서준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이거지.’

팀에 대한 확신과 동시에 또 다른 기회 앞에 다가서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

“에프몬스터의 김진 선수. 마지막 랩 타임에서 1분 01초 772를 기록! 현재까지 1위였던 조준원 선수보다 0.5초 빠른 기록입니다.”

“이렇게 되면 김진이 예선 1위에 올라서는 거죠. 이제 남은 선수는 2명. 이 엄청난 기록을 깰 수 있는 선수가 나올 수 있을지!”

경주 레이싱밸리에서 열린 2009 코리아 카트 챔피원쉽. 오후 본선 레이스를 앞두고 예선전이 벌어졌다.

“...!”

“김진 쟤 뭐야. 준원이보다 더 빨리 들어왔어...”

모터스포츠는 본선 레이스 전 예선(퀄리파잉)을 통해 스타트 위치(그리드)를 정한다.

예선에선 한 명씩 정해진 바퀴를 돈 뒤 빠른 랩타임 순서대로 본선의 그리드(스타트 위치)를 배치한다.

조준원보다 빠른 예선 기록을 낸 선수가 나타나자, 케노팀 피트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괜찮아 준원아, 고개 들어. 레이스 때 혼내주면 되잖아.”

주현우가 조준원의 머릴 쓰다듬었다.

“별로 놀랄 것 없어, 어차피 예선은 예선일뿐이다.”

본선은 함께 달리는 레이스다. 폴포지션(가장 맨 앞 스타트 위치)을 뺏겼다고 우울해 할 필요는 없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아직 우리 한 명 더 남았잖아?”

“그래, 주 코치 말이 맞아. 아직 준하도 남았잖아.”

여전히 다운된 분위기의 케노 피트. 주현우가 피트 밖에서 대기 중인 서준하를 가리켰다.

“준하, 쟤. 잘 할 수 있을까요?”

이전에 서준하가 조준원을 이겼다고 해도, 서준하는 이번 대회 처음 출전이다. 미카닉 이상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비과장에게 물었다.

“잘 할 수 있냐니?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물어?”

“그래도 아직 나이도 어리고, 대회 출전 경험도 없으니까...”

그저 말로만 결과를 전해 들었을 뿐, 미카닉들은 실제로 서준하의 레이싱을 본 적이 없었다.

“맞아요, 그 날 준원이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얘기들었어요. 누구나 한 번씩 실수는 하니까...”

조준원은 케노 팀의 확실한 에이스였다. 그런 에이스의 대회 예선 패배는 큰 충격이었을터. 이상준을 포함한 다른 엔지니어들도 서준하의 실력에 의문을 품었다.

“야야, 경기 전부터 초치지 말고, 그럴 시간에 나가서 준하 카트나 다시 한 번 살펴보라구.”

안혁수가 미카닉들에게 피트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했다.

터벅터벅.

밖으로 나온 케노 크루들. 자신의 카트를 살피던 서준하의 눈에 케노 크루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표정이 왜 저래? 준원이 형 기록이 안 좋았나?’

침울한 분위기의 미카닉 크루. 처음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직 본선도 아닌데 왜 저래. 게다가 난 아직 예선 트랙도 안 밟았는데?’

서준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크루들을 바로 볼 때였다.

우르르르.

하늘을 울리는 굉음. 모든 이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쾅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뭐야! 갑자기 날씨가 왜 이래!”

“과장님, 비가 올 거 같은데요...?”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하늘. 이상준이 황급히 피트 안으로 달려갔다.

“뭐? 비?!”

이상준의 말에 피트 안에 모든 스탭이 뛰쳐나왔다.

잠시 후,

두두둑.

“와씨! 비 떨어진다.”

“아, 이거 X됐네. 아직 예선 안끝났는데...”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경주 레이싱밸리 트랙을 적셨다.

“비?! 아직 우리 준하 예선 안 했는데?”

비가 오는 상황에서 예선을 치러야 하는 서준하. 앞선 선수들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준하가 들어가면 이미 트랙 다 젖겠는 걸. 야. 빨리 웨트 타이어(우천용 타이어)로 갈아끼워.”

정비과장의 말에 미카닉들이 분주해졌다.

“비? 하... 이거 악재인데?”

하늘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주현우. 아무리 서준하가 카트 천재라도 젖은 트랙에서 다른 선수보다 좋은 랩타임을 내기는 불가능하다.

“괜찮겠니, 준하야?”

주현우의 물음에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서준하.

“응? 그게 뭐하는 거야?”

전생에 비가 내리는 모든 레이스에서 단 한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은 F1 레이서 서준하.

‘레인 마스터, 그게 내 별명이었지!’

< 아직 우리 한 명 더 남았잖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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