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비가 그쳤잖아요? >
“두번째 랩타임은 1분 03초 887입니다.”
“1위랑 얼마나 차이 나는 거지?”
“약 8초 정도요.”
“흠...”
쏴아아아아.
쏴아아아.
카트 챔피언십이 열리는 레이싱밸리. 서준하의 카트가 젖은 트랙 위를 쓸쓸히 달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비가 너무 많이 와.”
“대회 규정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엔트리를 나이순으로 짜는 법이 어딨습니까. 에휴.”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마지막 순서 2명은 우천에서 예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제일 마지막 서준하 차례엔 비가 더 쏟아졌다.
‘아직 3바퀴 남았어. 준하를 믿어 보자고.’
상심한 표정의 성 감독과 달리 주현우는 끝까지 기대감을 놓지 않았다.
부우우웅.
‘2랩부턴 속도가 좀 나왔던 거 같은데, 조금만 더 밟아보자.’
코너에선 조향이 잘 되지 않아 카트를 조작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서준하는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번 로탁스 클래스 선수전의 최연소 레이서죠. 케노팀의 서준하 선수의 카트가 빗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촤아아악.
서준하의 카트가 코너를 돌며 물웅덩이를 갈랐다.
“거의 속도가 나질 않고 있어요. 트랙 군데군데 물구덩이가 좀 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네요.”
운영 센터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하는 오피셜들. 서준하의 예선 레이스 도중 대회 운영진이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잠시 후,
“아! 말씀하신 순간 대회 오피셜(심판)들이 회의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한 명이 통신 센터로 가는데요.”
펄럭, 펄럭.
레이싱밸리 위로 마셜(진행요원)들이 일제히 적색 깃발을 휘둘렀다.
“적색기네요. 운영진이 경기를 중단합니다. 음, 중계석에서 볼 땐 끝까지 타도 괜찮아 보이는데요.”
“그러게요. 어차피 지금 마지막 선수이고, 3랩밖에 안 남은 상황인데... 예선을 중단하네요.”
경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혹시나 발생한 사고에 책임을 물어야 할 터. 대회 심판진은 보수적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깃발을 본 서준하가 카트를 몰고 피트로 들어왔다.
‘장난해? 아직 3바퀴 남았잖아!’
사고가 나지 않은 이상, 서준하는 어떤 레이스건 모두 완주했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집요한 열정으로 F1 시트를 차지했었기에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괜찮아 잘 탔다, 준하야.”
“저 몇 위죠, 과장님?”
피트에 들어선 서준하에게 위로를 건네는 안 과장. 카트에서 내린 서준하가 자신의 순위부터 물었다.
“응... 10위. 그 정도면 훌륭해.”
“...”
“괜찮아. 너보다 못 탄 애들이 6명이나 돼.”
‘예선 10위?’
당황한 표정의 서준하. 본선에서 굉장히 불리한 그리드를 점하게 생겼다.
‘6명이나 뒤에 있으니까, 좋아하라는 거야? 어차피 그 6명은 허수였던 거잖아.’
트랙 컨디션이 훨씬 더 좋았음에도 서준하보다 못한 랩타임을 기록한 6명. 안혁수가 던진 위로의 말은 오히려 서준하의 자존심을 더 긁어놨다.
‘그리드 10위면 너무 하위권이야. 너무 창피한데.’
예선 10위의 처참한 성적. 서준하는 아무런 말없이 피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선 전까지 레이스 정비해.”
피트 밖에서 서준하의 카트를 옮기는라 분주한 케노 팀 크루들. 그런데,
“...!”
비에 젖은 카트가 게러지 안으로 들어올 때쯤 팀 크루들이 빗줄기가 약해지는 걸 느꼈다.
“비가 그치고 있어...”
“지금 누구랑 장난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준하가 게러지 밖으로 나왔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듯 금세 하늘엔 해가 뜨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준하야.”
“어? 감독님.”
하늘을 보고 고개를 흔든 성 감독.피트 바로 옆 운영센터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운영센터 앞에 도착한 성 감독의 문을 열고 나오는 오피셜과 마주했다.
“비가 그쳤으니 저희 팀 선수 남은 바퀴 더 타야하는 거 아닙니까?”
“아 성 감독님.”
운영진에게 서준하의 예선 주행 재개를 요구하는 성 감독. 그의 말을 들은 운영진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다시 태워주려나?’
멀리서 운영센터를 바라보던 서준하. 내심 경기가 재개되길 바랐다.
띵동댕동.
잠시 후, 경기장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트랙 정비 후, 곧바로 선수부 본선 레이스가 진행되겠습니다. 음. 아직 성인부, 주니어부까지 레이스가 많이 남았으니, 진행을 서두르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
방송을 듣고 화가 난 성 감독이 운영진 문을 두드렸다. 그런 성 감독을 멀리서 바라보는 서준하.
‘시간이 촉박하시다?’
하루에 여러 클래스가 모여 진행하는 만큼 대회 진행 시간이 빠듯했다. 운영팀도 어쩔 수 내린 결정.
트랙 위로 빗물을 정리하는 마셜들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하. 무언가 결심한 듯 서준하가 피트의 안혁수 과장을 불렀다.
“과장님!”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서준하의 큰 목소리에 살짝 놀란 안 과장.
“슬릭 타이어로 바꿔주세요.”
“슬릭 타이어?!”
현재 노면은 전부 젖은 상황. 접지력이 떨어지는 슬릭 타이어론 젖은 노면에서 주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서준하의 말에 고개를 내젓는 안혁수.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슬릭은 미끄러져. 트랙이 아직...”
타이어에 대해 설명하려던 안 과장의 말을 끊고, 하늘을 가리키는 서준하.
“이제 비가 그쳤잖아요?”
***
박기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현우를 찾아왔다.
“주 코치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저 타이어가 말이 돼요?”
모두가 반대했던 결정. 웬만해선 주 코치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정비과장도 극구 반대한 슬릭타이어였다.
“괜찮을 거야.”
“네? 괜찮을 거라뇨.”
끝끝내 서준하의 요구를 들어준 사람은 주현우였다. 주현우가 강력하게 어필하자 결국 성 감독이 서준하의 타이어 교체를 허락했다.
“지난번에 나 혼자 애들 데리고 파주에 가서 연습을 하는 데, 중간에 비가 엄청 쏟아지더라고. 난 그날 서준하의 레이싱을 본 눈을 의심했어.”
진지한 표정의 주현우가 차근히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그 폭우 속에서 단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남은 바퀴를 돌고 나오더라고.”
“한 번도 안 미끄러졌다고요?”
주현우도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서준하는 정말로 빗길에서 레이스를 잘했다. 자신이 직접 두눈으로 확인했으니, 서준하를 믿어보고 싶었다.
“진정한 힘이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라도 반드시 드러나지 않겠어?”
“...그래도 빗길에서 슬릭으로 주행하기 엄청 힘들텐데요.”
말을 마치고 트랙을 향한 시선에 서준하의 카트가 보였다.
“게다가 준하 말대로 지금 비는 안 오잖아?”
16대의 카트가 포메이션 랩을 돌아 그리드에 섰다. 햇빛을 받은 카트와 선수들의 헬멧이 밝게 빛났다.
“2009 코리아 카트 챔피언쉽, 로탁스 클래수 선수전의 본선 레이스가 시작됩니다!”
“예선에서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한 에프몬스터의 김진 선수가 폴포지션에서 시작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작년 우승자인 케노의 조준원 선수가 그 뒤에 섰습니다. 오늘 두 선수 중 누가 먼저 피니쉬 라인을 밟을지가 기대되는군요.”
레이스는 마라톤이 아니다. 완주가 목표가 아니다. 경기장을 찾은 모든 이의 관심은 오직 1등뿐. 경기 전 중계진의 관심 역시 대회 우승 후보들에게 쏠렸다.
“썬더젯 파이팅! 와아!”
“톰캣 정찬혁 파이팅!”
“김진 파이팅, 우승하자!”
두두두두두둥.
각 팀을 응원하는 함성과 함께 엔진음으로 가득 찬 스타트라인. 출발 신호에 불이 들어오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초록불 켜졌습니다. 경기 시작됩니다!”
레이스가 시작되고, 모든 카트가 일제히 첫 코너를 향해 질주했다.
그런데,
“아! 경기 시작하자마자, 엔트리 16번! 16번 카트가 엄청난 속도로 다른 카트들 앞을 치고 나옵니다!”
‘16’이라는 숫자 스티커를 부착한 카트에 주목하는 중계진.
“놀라운 스피드입니다. 스타트부터 엄청난 속도를 내는데요!”
“16번, 16번 선수 누군가요?”
첫 코너에 도달하기도 전. 시작부터 앞선 3대를 제친 16번 카트에 관심이 집중됐다.
“16번이면, 케노 팀의... 서준하!”
출발부터 단숨에 6위로 올라선 서준하의 카트. 마치 혼자만 다른 경주차를 모는듯한 놀라운 스피드로 트랙 위를 질주했다.
“집중력이 뛰어나네요. 스타트 능력이 탁월한 선순가 보군요!”
화면에 포착된 서준하의 레이싱 장면을 보고 중계진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근데 스타트 능력만 좋은 게 아닌 거 같은데요? 16번 카트... 뭔가 좀 달라요.”
서준하의 카트를 유심히 살피던 해설자. 어딘가 특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러시죠?”
“아 화면을 다시 봤으면 좋겠는데요.”
캐스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해설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에 잡힌 서준하의 카트.
“지금 16번 카트 뒤쪽을 잘 보세요. 카트가 뱉어내는 물이 거의 없습니다!”
“뱉어내는 물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경기 시작부터 혼란스러운 상황. 해설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캐스터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비가 왔었기 때문에 트랙에 아직 물기가 남아있을 겁니다. 그런 노면에선 우천용 타이어는 트레드(홈)가 있기 때문에 카트 뒤로 물을 배출시키게 되죠. 그걸 뱉어낸다고 표현한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근데 지금 저 카트는 그런 모습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아, 그러면?”
“그러면 뭐겠어요. 지금 서준하 선수가 탄 16번 카트는 우천용 타이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네?!”
레이싱밸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가 왔었다. 본선 레이스 전 큰 물웅덩이를 치우는 정도의 조치만 했을 뿐 노면은 여전히 젖어있었다. 따라서 우천용 타이어를 장착해야 하는 상황.
“우천용 타이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슬릭 타이어를 꼈다는 건가요?”
“네, 그럴 겁니다. 아니면 지금 제 눈엔 달리 저 카트의 속도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2명을 더 제친 서준하의 카트가 5위 자리에 올랐다. 무려 1랩이 끝나기도 전에 5명을 제친 서준하.
선두권 싸움이 치열한 와중에도 중계진의 관심은 여전히 서준하에게 쏠려있었다.
“별 문제가 없는 걸 보면, 슬릭 타이어로도 빗길 운전이 가능한가 보죠?”
“비는 안오지만, 이런 노면에선 거의 불가능합니다만...”
말을 잇지 못하는 해설자. 그가 놀라는덴 다 이유가 있었다.
“슬릭 타이어는 배수 능력이 없죠. 그러니 빗길에선 바퀴가 물에 떠서 미끄러집니다. 이런 노면에서 슬릭을 쓰는 건 거의 자살 수준입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믿는 해설자. 중계진의 해설에 많은 관중이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유달리 빗길에서 레이싱을 더 잘하는 선수들이 있긴 했죠.”
잠시 트랙 위를 유심히 살피던 해설자가 다시 마이크를 든 집어 들었다.
“대표적으로 F1의 아일톤 세나가 그랬습니다.”
“F1의 전설, 세나요?”
“그렇죠. F1의 전설이죠. 참고로 세나도...”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해설자. 트랙 위를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저 선수처럼 비가 오는 레이스에서 11대를 제치기도 했습니다...”
레인 컨디션에서 최강의 위력을 발휘했던 아일톤 세나.
그의 모습이 서준하에게서 보이는 듯했다.
< 이제 비가 그쳤잖아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