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생각 말고 일단 다시 달리자 >
-지금부터 2013 로탁스 그랜드 파이널 맥스 DD2 클래스의 타임 트라이얼을 시작하겠습니다.
-타임 트라이얼은 번호 순서대로 한 대씩 코스인, 한 바퀴 워밍업한 후 타임 어택을 해서 기록을 측정합니다. 이 타임 트라이얼 결과로 결승 레이스 스타팅 그리드가 결정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기예보를 보니 기온이 좀 낮은 것 같더군요.”
“그렇군요.”
예선 타임 트라이얼 시작 전. 전년도 우승팀 프랑스 대표단의 피트가 분주했다.
“말씀하신대로 리어 타이어의 에어 압력을 한 껏 높여놨습니다.”
“좋습니다. 초반에 차이를 벌릴 수 있겠네요.”
프랑스 엔지니어링 책임자가 점검 내용을 보고하자, 총감독 자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었다.
“이제 곧 타임 트라이얼인데, 샤를이 안 보이네요. 아직 준비가 안됐나요?”
자크가 메인 드라이버 샤를을 찾으며 팀원들에게 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프랑스 팀크루들.
“아까 분명 저희가 1시 10분까지 피트로 오라고 일러뒀는데요.”
샤를의 전담 매니저가 불안한 표정으로 답하자 자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매번 이렇게 시간 개념이 없어서야. 또 자기 맘대로구만.”
샤를은 뛰어난 실력을 갖춘 카트 레이서였지만,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에 자크 감독이 짜증을 냈다.
프랑스 대표팀 단장, 쥘 카레르가 감독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피트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옆을 태연하게 걷는 샤를 가도.
“어이, 자크. 표정이 왜 그래.”
“아, 오셨어요. 단장님.”
자크가 샤를을 노려보자, 단장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내가 잠깐 데리고 놀았어. 너무 그렇게 쏘아 보지마.”
“시간이 지금...”
“맞아요, 쥘 단장님 때문에 늦은 거라구요.”
쥘 단장 뒤에 숨어 투덜거리는 샤를. 그 모습에 자크는 더욱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좀 늦으면 어때? 레이서가 레이싱만 잘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자, 샤를. 얼른 카트에 타서 마크 좀 안심시켜라. 하하하.”
쥘 단장이 크게 웃으며 샤를을 카트 앞으로 떠밀었다.
“맞는 말씀이지만, 그래도 매번 이렇게 늦는 건...”
샤를을 감싸는 단장의 태도에 자크는 밀려오는 화를 꾹 참았다.
“아니, 이번에도 적수가 없잖아.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걱정하고 그래.”
자리 앉은 단장은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이고는 마크를 향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이미 우린 유럽을 재패했다고. 카트 세계 최강팀이야. 뭘 그렇게 걱정을 하나?”
단장이 감독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자신의 팀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
“...그래도 이번엔 꽤 쟁쟁한 팀들이 나온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쪽 선수들이 강세라고 들었어요.”
아시아에선 일본의 카트도 수준이 높은 편. 자크 감독은 대회를 준비하며 아시아의 새로운 챔피언도 참가한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단장의 생각과 달리 다양한 변수를 경험한 그에겐 다른 팀들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한국? 일본? 하하하. 장난해? 그런 데서 레이싱을 해봤자, 뭘 얼마나 잘하겠어!”
“그렇긴 하죠.”
“감독도 잘 알잖아. 카트는 전통이 있는 스포츠라고. 그런데서 우리 프랑스를 따라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유럽권에서 시작한 모터스포츠. 그들에게 레이스는 마치 한국의 태권도와도 같은 전통스포츠였다.
게다가 여지껏 이런 큰 대회에서 단 한차례도 아시아권이 우승한 적없었다.
“샤를! 예선 랩타임으로 우리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확실히 보여주라고!”
쥘 단장이 이탈리아제 고급 카트, 코스믹에 올라탄 샤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예선 타임 트라이얼 전 서준하의 워밍업 랩이 시작됐다.
-준하, 연습 주행이니까 타이어 온도부터 올려.
“카피 뎃(copy that)”
카트 리그에서 가장 큰 대회이니만큼 무전 교신이 허용됐다. 출발과 동시에 서준하에게 지시하는 주현우.
-copy that? 이런 용어는 어떻게 아는 거냐?
F1 이후 오랜만에 무전을 사용한 서준하. 자신도 모르게 그때 쓰던 용어가 튀어나와버렸다.
“하하, F1 방송을 많이 봐서...”
-뼛속까지 레이서구나. 오케이 자연스러웠어.
부우우웅.
온몸으로 전달되는 트랙의 노면. 거칠고 성가신 느낌이 들었다. 워밍업 랩을 돌며 서준하가 트랙을 확인했다.
‘레이스웨이가 이렇게 생겼었나.’
삐걱 삐걱.
다시 봐도 까다로운 코스다. 코너 투성이에 고저차가 심해 카트 프레임이 흔들리는 소리가 귀를 거슬렸다.
부우우우우웅.
속도를 높일수록 카트는 가벼웠고, 코너에선 살짝 몸이 붕 뜨는 느낌마저 받았다.
‘차가 그냥 막 날아다니는데?’
프레임의 무게를 줄여 제작된 서준하의 카트. 가벼운 프레임 덕분에 속력은 더 빨라졌지만, 코너링에서 안정감이 떨어졌다.
“코치님, 차가 좀 불안정한데요?”
-점검 이상 없었는데. 처음이라 긴장한 거아니야?
어느정도 타이어의 온도가 오르자, 점차 속도를 높이는 서준하. 워밍업 랩을 마친 서준하의 카트가 다시 스타트 라인을 향했다.
지지직.
-지금부터 타임 어택 시작이다. 잘해 보자 준하야.
“오케이.”
본선 그리드 순서를 배정하기 위한 예선 타임 트라이얼. 예선 랩은 10바퀴. 10랩 안에 최고 기록을 낼수록 본선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제 첫 코너 올거야. 조심하고.
“카피.”
레이스웨이 1번 코너.
비디오에서 봤던대로 코너가 급격하게 꺾여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살려 자신감 넘치게 진입하는 서준하의 카트.
‘첫 코너부터 겁먹고 쫄면, 10바퀴내내 고생한다고.’
첫 랩의 첫 코너만큼 중요한 코스는 없다. 이건 서준하가 오랜 레이싱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진리다.
부우우웅.
끼익.
태극마크가 붙은 서준하의 카트가 무난하게 첫 코너를 빠져나왔다.
‘워밍업은 좀전에 끝났고.’
트임 어택은 기록 싸움. 1랩부터 기록을 만들어야 한다. 60팀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단 한 순간도 속도를 늦추지 말아야 상위권에 오를까 말까. 이런 무대에 익숙한 서준하가 악셀에서 발을 놓지 않았다.
[rpm: 9805]
일반 자동차에 비해 굉장히 높은 rpm. 서준하의 로탁스 엔진이 최고 토크를 향해 회전했다.
부우우웅.
어느새 백 스트레치(결승점이 있는 트랙의 반대쪽 직선 주로)에 오른 카트가 전속력으로 마지막 코너를 향했다. 그런데, 끼이이이익.
주현우는 마지막 코너에서 카트가 흔들리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쿵.
코스를 이탈해 스핀한 카트가 크래시 패드(crash pad)와 충돌했다. 그 광경에 근처 갤러리들이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
크래시 패드는 가드레일에 충돌할 때 충격을 흡수하도록 만들어 논 쿠션이다. 만약 크래시 패드가 없었다면 카트가 박살날 뻔했을 상황.
‘갑자기 카트가 왜 이러는 거지?’
이유없이 스핀한 서준하의 카트.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실수가 아니었다.
-준하, 갑자기 왜 그러지?
“순간 휠이 안 먹었어요. 뭔가 이상해요.”
-뭐지? 카트에 문제가 생긴 건가?
카트를 타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자동차는 결코 믿을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완전하지 않고, 오류를 발생시킨다.
충돌과 함께 서준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잡생각 말고 일단 다시 달리자.’
다시 휠을 잡은 서준하가 트랙 위로 복귀했다.
다시 속도를 높이는 서준하. 하지만 카트로부터 좀전과는 다른 감각이 전해졌다.
덜컹, 덜컹.
6개의 급격한 코너가 특징인 레이스웨이. 충돌이후 코너를 돌 때마다 서준하의 온몸이 흔들렸다.
‘부딪혔을 때 충격이 컸나?’
노면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제대로 흡수해주지 못하는 카트의 프레임.
부우우웅.
끼익.
휘릭.
2번 코너를 빠져나온 카트가 다음 코너에 접어들었다.
-3번 코너 진입할 때 언더스티어가 일어난다.
“...언더스티어?.”
언더스티어는 조향능력이 떨어져 예측보다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는 현상. 서준하의 카트가 의도한 목표 라인보다 바깥으로 벗어났다.
-집중력을 잃으면 또 벽에 부딪힌다. 정신차려!
“카피.”
2랩을 마치고 스타트라인을 빠져나가는 서준하의 카트.
주현우가 무전으로 랩타임을 알렸다.
-49초 424. 느려!
부우우우웅.
계속되는 랩타임에서도 점점 뒤처지는 레코드.
-왜 그래, 서준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서준하는 답하지 않았다.
‘뭐지? 갑자기 뭐가 문제야.’
***
이탈리아의 팀 하우스.
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으로 태극 마크를 단 카트가 3랩을 주행하는 장면이 중계됐다.
“한국의 최고 유망주라는데, 본선에도 못 오를 거 같은데요?”
“시작하자마자 스핀하고 충돌하더니, 실력이 완전 바닥이네.”
신생팀 한국의 예선 타임 트라이얼을 지켜보던 엔지니어와 미카닉들이 싱겁다는 반응을 보였다. 계속되는 저조한 기록에 시시하다며 자리를 뜨기 시작한 이탈리아 팀 크루들.
그리고 몇 분 뒤.
“오호?”
소파에 남아 화면을 지켜보던 카를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왜요? 카를로?”
휴대폰을 보던 이탈리아의 메인 드라이버 이탈로. 평소에는 몸도 꿈쩍않는 늙은 카를로가 연신 감탄사를 뿜어내자 그를 향해 물었다.
“이 레이서를 잘 봐. 자세가 좀 이상하지 않아?”
카를로의 말에 이탈로도 화면을 쳐다봤다.
“코너도 아닌데, 쟤 왜 저래요?”
태극 마크를 단 운전자가 온몸을 한쪽으로 기울인 채 카트를 주행하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요?”
카메라가 카트를 줌인하자, 카트에 올라탄 서준하의 모습이 더 자세히 드러났다.
“아까 시작하자마자 충돌이 있었던 거 봤지?”
“네.”
“아마 그 뒤로 프레임에 균열이 생긴 것 같구나.”
화면만 보고도 카트의 문제점을 알아내는 카를로. 그는 이탈리아 팀 카트를 직접 설계하는 최고의 엔지니어로 50년이 넘게 카트만 만졌던 사람이다.
“아하, 근데 그게 왜요?”
“프레임이 휘어서 위로 들리니까 타이어가 잘 굴러가질 않겠지?”
손을 뻗어 카트 왼쪽을 가리키는 카를로. 그의 말처럼 이탈로의 눈에도 카트의 균형이 맞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몸의 무게중심을 옮겨서 카트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거지.”
충돌 이후 왼쪽 프레임이 위로 휘어버린 서준하의 카트. 자연스럽게 오른쪽 타이어가 땅에서 떨어지자, 서준하는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떨어진 타이어의 접지력을 높여 균형을 맞췄다.
“그러면 일부러 저렇게 타는 거라는 말이에요?!”
“그렇지.”
“에? 그건 불가능한데!”
속력이 빠른 카트에서 몸의 무게중심이 맞지 않으면 코너를 쉽게 돌지 못한다.
이탈로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촉망받는 카트 레이서중 한 명이었으니까.
[S.Korea: Seo Jun Ha]
[lap 5/10]
(1) 51:256
(2) 49:424
(3) 48:254
(4) 47:332
(5) 46:332
잠시 후, 코리아 카트가 5번째 랩을 마쳤다. 그리고 화면에 표시된 랩타임 기록.
“게다가 점점 더 빨리 달린다고?!”
고장난 카트를 탄 레이서가 이탈로의 랩타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 잡생각 말고 일단 다시 달리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