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 번째 요소만큼은 확실히 갖고 있는 것 같더구만 >
로탁스 그랜드 파이널 본선 당일.
서준하가 참가하는 DD2 클래스 본선 시작 30분 전.
코리아팀 피트에 설치된 화면에선 주니어 클래스의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이거 완전 전쟁턴데요?”
이번 대회 첫 출전인 한국 팀 미카닉들이 화면을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접촉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요?”
경기 규칙으로는 차량 간 접촉이 금지되어 있으나 대회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쿵.
쿵.
마치 범퍼카처럼 이리저리 치고받는 레이싱카들. 어마어마한 타이틀이 걸린만큼 레이싱은 치열했다.
“와, 1랩 만에 바로 황색기가 떴어.”
속도를 늦추고 추월을 금지를 의미하는 황색기. 화면에선 황색기가 펄럭이며 트랙에 사고가 발생했음을 알렸다.
‘여긴 원래 그런 곳이지.’
서준하도 그 옆에서 주니어부의 치열한 레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보니까 더 살벌하네.”
“오셨어요. 코치님.”
주현우가 리플레이되는 충돌 장면을 보곤 무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치고 들어오는 거, 엄청 부담스러운데 말이야.”
옆에서 밀고 들어오는 건 각오해야 할 정도. 당하는 쪽 레이서에겐 심리적 압박감이 엄청나다. 서준하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하야,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저런 상황에 잘 대응하려면 모든 코너에서 최적의 포지션을 찾아야 해.”
그뿐만이 아니다.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체력, 그리고 재빠른 상황대처능력 또한 공격적인 레이서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레이서의 자질이다.
“네, 코치님.”
주현우의 우려와 달리 서준하는 모든 포인트를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로탁스 그랜드 파이널 DD2 클래스 시니어 선수들은 카트와 함께 각 팀 피트에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카트 검사를 알리는 방송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경기 시작 전 최종적으로 검사하는 차량 검사로 카트에선 최저 무게 검사를 실시한다. 규정에 어긋나는 장치 부착이나 혹시나 발생할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
코리아 팀 미카닉들이 서준하의 카트를 피트 중앙으로 위치시켰다.
“카트에 문제없죠?”
주현우가 엔지니어링 팀을 향해 묻자 최양호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탈리아 팀 검사를 마친 오피셜들이 코리아 팀 피트로 들어왔다.
“저울 위에 카트를 올려주시죠.”
책임 오피셜로 보이는 남자가 카트 무게 검사를 지시했고, 그의 손짓에 미카닉들이 카트를 옮겼다.
지이잉
척.
“좋습니다. 무게는 이상 없고, 간단한 검사만 실시하겠습니다.”
주머니에서 하얀 장갑을 꺼낸 오피셜. 허리를 숙여 카트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뭐죠?”
가장 먼저 엔진 기종을 확인하던 오피셜이 운전자 시트에 부착된 커다란 고무 패드를 가리켰다.
“바닥에도 이상한 게 있는데요?”
옆에선 또 다른 오피셜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미카닉들을 향해 물었다.
그 모습에 다른 팀 엔지니어들도 코리아 팀의 피트 주위를 기웃거렸다.
“발굽 페달과 고무로 덧댄 시트입니다.”
오피셜이 해명을 요구하자 최양호가 크루들 틈을 비집고 나왔다.
“...이런 걸 왜 사용하는 거죠?”
“예선 때 사용했던 카트가 망가져 지금 이 서브 카트를 선수 몸에 맞게끔 조절했습니다.”
코리아 팀에서 준비했던 서브 카트는 성인용 카트다. 넓은 시트와 악셀 페달까지의 길이가 긴 카트는 서준하의 몸에 맞지 않아 그에 맞게 개조했다.
“흠, 이런 건 처음 보는데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오피셜들. 다소 심각해진 분위기에 코리아 팀 피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잠시 저희 논의 좀 할게요.”
형식적인 검사에 한국팀 피트가 소란스러워지자 다른 팀 엔지니어들도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간격을 메꾼다고 해도 유격이 생길 텐데, 제대로 운전이나 가능하겠어?
“저런 카트로 뭘 하겠다는 거지.”
“그래도 열정은 있잖아. 푸흡.”
“잘됐네, 우리 팀한테 훨씬 유리해졌어.”
페달과 운전석이 레이서와 밀착되지 않으면 여러 감각이 자기 몸에 잘 전해지지 않는다. 개조를 했다고 해서 카트에 밀착하는 것이 쉽지 않을 터.
“엔진, 섀시 모두 대회 규격에 맞는 것들입니다. 엔지니어링 규정에는 문제가 없는 걸로 압니다.”
최양호의 말이 맞았다. 저런 부품을 더 추가한다고 다른 차들보다 속도가 더 빠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팀에 더 불리한 조건임은 틀림없었다.
“그렇긴 한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오피셜이 잠깐 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음, 알겠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시죠. 하지만 혹시 모르니 레이스가 끝나고 특별히 한 번 더 검사하겠습니다.”
못 미더운 오피셜들의 표정. 최양호가 흔쾌히 동의했다.
‘오케이, 이제 레이싱만 잘하면 되는 건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준하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서준하를 발견한 뒤 곁에 다가선 최양호.
“준하 선수, 근데 정말로 저걸 탈 수 있겠어요?”
메인 카트가 고장났기에 경기를 포기해야 했던 상황. 서브 카트를 개조하자고 제안했던 건 서준하의 아이디어였다.
“나 20년동안 카트 손보면서 이런 걸로 대회 뛰는 건 처음 봐서...”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었기 누구도 말릴 수 없었던 선택이었지만, 레이서를 이런 불편한 카트에 태워 내보내는 게 영 편치 않았다.
“카트가 말을 잘 안 들을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기존에 느꼈던 감각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카트. 심지어 연습 주행조차 한 번 안한 카트로 본선을 나가게 된 서준하가 걱정됐다.
“아니요, 팀장님.”
전생엔 5살부터 카트를 탔다. 서준하의 작은 몸집 때문에 페달 발굽과 고무 시트는 어린 시절 항상 끼고 살았던 부품.
“이런 카트는 제가 전문이에요.”
오히려 나중엔 일부러 발굽과 시트를 낄 수 있는 큰 카트만 골라탔던 서준하였다.
***
레이서는 연습이나 예선에서 결코 사고를 내지 말아야 한다. 예선은 본선이 아니다. 예선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인다고 대회를 우승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예선에서 사고를 냈다면 본선에 올라갈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환경을 만드는 것도 레이서의 실력. 얼마나 좋은 환경과 장비를 마련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모터스포츠 레이서 지녀야 할 능력이다.
서준하는 그런 의미에서조차 완벽한 레이서였다. 고장난 카트로 묵묵히 본선에 가는 세트업을 소화한 뒤, 주어진 환경에서 장비를 개조하는 가장 현명한 조치를 취했다.
로탁스 그랜드 파이널. 본선 레이스 출발 전.
“놀랍지 않아? 지금 저 선수가 그리드에 있는 게?”
“그렇죠. 어제 정말 힘들었습니다.”
주현우와 오 단장이 그리드에 대기 중인 서준하의 카트를 보며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레이싱을 공부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하나 있어. 뛰어난 레이서가 되기 위해선 다음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유학 후 유럽 F1팀 로터스의 전략 엔지니어로 근무했던 오 단장. 본선 시작 전 주현우의 긴장을 풀어주려 말을 붙였다.
“첫째, 천재여야 한다.”
“하하, 아무나 저 속도를 다룰 순 없죠.”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레이서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오 단장에 말에 주현우가 크게 웃었다.
“둘째, 판단력. 주행시간을 잘 조절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죠. 아무래도 1초 아래 소수점 싸움이니까요.”
“어느 타이밍에 피트에 들어가고, 언제 어떤 타이어를 어떻게 쓸지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뛰어난 판단력이 필수적인 거고.”
“그렇군요.”
“그리고,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데. 뭔지 맞춰 보겠나?”
환하게 웃던 오 단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마지막 요소를 물었다.
“뭐,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런 거 아닌가요?”
“그건, 1번 천재에 포함되는 거고.”
“흠... 그러면 뭘까요? 잘 모르겠네.”
잠시 뜸을 들이던 오 단장. 덕분에 주현우는 마지막 요소가 더 궁금해졌다.
“차가운 심장.”
오른손을 뻗어 심장을 가리키는 오 단장. 그 모습이 살짝 오글거렸지만, 주현우도 환하게 웃었다.
“정상에 오를수록 레이싱은 말 그대로 뜨거워지지. 경주차의 성능, 엔진, 주행 거리, 주행 속도 등등. 빨라지지 않는 게 없어. 자네도 잘 알잖아? 저 위가 얼마나 뜨거운지.”
손을 뻗어 트랙 위에 카트를 가리키는 오 단장.
“침착함과 냉철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않고 개인적인 감정에 동요되면 그게 곧바로 레이스로 드러나니까.”
빠른 주행 속도에서 매 순간 좋은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레이스. 그 특성 상 트랙 위 모든 레이서는 서두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조급함은 곧바로 트랙 위에 드러나기 마련.
“게다가 실제로 카트 레이서들은 40도가 넘는 온도 속에서 달려야 하니까, 더욱 침착해야 하지.”
오 단장에 말에 주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어제 많이 놀랐어. 내가 준하를 본 지는 얼마 안됐지만. 이 세 번째 요소만큼은 확실히 갖고 있는 것 같더구만.”
충돌 이후 본선 전 카트를 정비하기까지. 레이싱에 경험 많은 오 단장도 그런 상황들이 얼마나 사람의 혼을 빼놓는지 잘 알고 있는 터라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오늘 저 카트에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네. 주 팀장이 잘 이끌어줘.”
그리드 위에 카트를 가리키는 오 단장이 주현우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무전 헤드셋을 손에 쥔 주현우. 오 단장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피트 월에 앉았다.
-준하야, 준비됐어?
“퍼팩트.”
***
-30sec
그리드 위에 경기 시작 30초전을 알리는 사인이 떨어졌다.
-5sec
이어서 빨간 신호가 모두 켜지며 모든 카트가 첫 코너를 향해 달렸다.
“와아아아아!”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잉.
첫 코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레이싱 카트들. 카트가 빠져나간 스타트 부근으로 스모그가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Nooooooooo!!!”
스타트에서 스톨(엔진 이상)이 난 카트 두 대. 일본과 스페인의 레이서들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FUXX!!!”
시작도 못해 보고 끝난 본선 레이스기에 더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P7, 19 리타이어. 순위 변동 없어. 준하 넌 P4(현재 순위, 4)다.
“오케이.”
레이스 속 누군가의 절망은 또 다른 누군가에겐 힘이 되는 법. 주현우가 서준하에게 트랙의 모든 상황을 알렸다.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잉.
유별나게 긴 홈 스트레치를 지나 등장한 첫 코너. 트랙 위 모든 이의 관심이 그곳을 향했다.
-준하, 그때 영상 봤지. 첫 코너다.
“카피.”
눈앞에 보이는 카트 3대. 별 탈 없이 스타트 순위를 유지한 서준하가 첫 코너에 접어 들었다.
위이이이잉.
회전계를 확인하며 사이드미러를 통해 옆과 뒤를 살피는 서준하.
‘온다!’
빠르게 진로를 바꿔 코너 바깥쪽으로 휠을 꺾었다. 그리고, 쿵.
쿠쿠쿵.
여기저기서 발생한 크러쉬. 레이스웨이는 역시나 카트들의 무덤이었다.
“오마이갓!!!”
치고 박는 과정에서 레이서들은 죽을 맛인 상황. 시작하자마자 벌어지는 난타전에 관중들의 소리를 질렀다.
“아 레이스웨이, 첫 코너부터 대혼란입니다!”
“카트들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멈춰선 카트들. 대부분의 카트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1코너에 정체했다.
“꺼져! 꺼지라고!”
다급한 목소리. 여기저기 들려오는 선수들의 욕지거리. 무덤을 확인한 서준하가 아웃 라인으로 들어섰다.
< 이 세 번째 요소만큼은 확실히 갖고 있는 것 같더구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