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견을 깨고 싶어요 >
“에? 그게 무슨 말이야. 더 생각해 보겠다니.”
서준하의 말에 필립 황이 깜짝 놀란 얼굴이 돼버렸다.
“준하 선수,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나요?”
필립 황의 개인 오피스 안. 유건석도 자세를 고쳐 앉고 서준하를 향해 물었다.
“제안 주신 일본도 괜찮긴 한데... 저는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더 많은 기회라니? 사토 코치가 하라는 데로만 하면, F1 쉽게 간다니까?”
“그래요, 서준하 선수. 저희 쪽에서도 검토해 보니까, 코야마 드라이빙 스쿨은 엔트리 포뮬러 이후에도 관리가 아주 철저합니다. 믿을 만한 곳이에요. 이건 대표님께서 직접 사토 코치를 만나 보시고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서준하의 포뮬러 데뷔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선 필립 황. 지난 주말 아카데미 관계자들과 미팅을 갖었었다.
“사토 코치는 이력이 화려한 사람이야, 고바야시 선수 알죠?”
필립 황이 서준하를 바라보며, 현재 F1 무대에서 활약 중인 일본인 레이서 고바야시 카무이의 이름을 꺼냈다.
“F1 팀 자우버 소속, 고바야시! 그 선수도 사토 코치 밑에서 처음 포뮬러카를 탔다잖아. 또 누구야, 그 F3에서 포디엄에 오른 일본 선수들...”
열성적으로 사토 코치의 이력을 설명하는 필립 황.
“그러니까 서준하 선수는 그냥 몸만 가면 돼. 숙소랑 아카데미 페이는 내가 다 얘기해놨단 말이야.”
“한국이랑 가장 가까우면서도 퀄리티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일본입니다. 그중 가장 교육 시설이 뛰어난 곳이 코야마죠.”
세계 카트 대회를 우승한 서준하.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준 그에게 먼저 나서서 도움을 주고 싶었던 필립 황. 아카데미와 숙소까지 예약해둔 상황이었다.
"정말 감사한데..."
시큰둥한 서준하의 반응에 다소 흥이 떨어진듯한 두 사람. 그 표정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흠... 얘길 잘 꺼내야 하는데.’
세계 대회가 끝나고 서준하에게도 여러 곳에서 컨택이왔지만, 그 역시 일본 쪽이었다. 하지만 서준하의 소망은 영국에서 포뮬러를 스타트 하는 것.
‘지금 날 유럽으로 보내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이 아저씨란 말이지.’
필립 황의 도움이 절실했다.
“먼저 직접 아카데미까지 알아봐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서준하. 그리곤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되도록이면 포뮬러는 유럽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에? 유럽? 아니, 왜 그 먼 데까지 가려는 거야.”
유럽이라는 말에 필립 황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스폰하는 선수의 활약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그림. 만약 서준하가 유럽으로 가게 된다면 그를 컨트롤하기 어려워지는 건 뻔해 보였다.
“준하 선수, 구체적으로 유럽 어디를 가고 싶다는 거죠?”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영국이에요.”
“흠, 영국이 모터스포츠로 가장 활발하지만... 자체 포뮬러 리그를 가지고 있는 일본도 유럽에 버금갈 정도로 인프라가 좋습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영국이란 말을 듣고 당황한 필립 황.그의 표정을 읽은 유건석이 재차 이유를 물었다.
“편견을 깨고 싶어요.”
세계 카트 대회를 우승했다는 건 레이싱 종목에서 유망한 실력을 가졌음을 입증한 것이다. 우승자에게 여러 포뮬러 팀에서 F1 드라이버 육성 프로그램을 제안이 들어오는 게 자연스러운 일. 전생의 서준하도 그렇게 포뮬러에 입성했다. 하지만,
“제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는데도, 일본을 제외한 유럽 쪽 포뮬러 팀에선 아무런 컨택도 받지 못했어요. 사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라 선수 컨택이 쉽지 않긴 한데.., 결정적으론 아시아 유망주 가운데 유럽에서 시작해 성공한 사례가 없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준하에겐 자신의 상황이 그의 우승을 단순한 이변으로 여기는 레이싱 산업의 풍조와 아시아 카트 선수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서준하.
“그래서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한국인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엔트리 포뮬러 리그부터 서준하가 성공한다면, 이후 다른 아시아의 후발 주자들도 유럽 무대 진출이 쉬워질터. 두 사람은 하나같이 맞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 실장님, F1이 영국 꺼 맞죠? 영국에서 시작한 건가요?”
“네, 대표님. 영국입니다.”
“영국이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배울 수는 있겠네, 근데...아, 아니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혼란스러운 듯한 필립 황. 이리저리 횡설수설했다.
“흠, 우리 좀 더 고민하기로 하죠, 준하 선수. 내가 다시 부를게요.”
말을 마치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그의 얼굴에선 어딘가 고민이 깊어보였다.
***
지잉.
철컥.
정갈하게 묶은 머리 아래로 스튜어디스와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여성. 비서로 보이는 직원이 스마트키를 문앞에 가져다 댔다.
“들어가시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준하가 그녀의 요청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띠릭.
탁.
여자가 스위치를 누르자, 군데군데 은은한 조명이 널따란 차고지를 밝혔다.
“...!”
빨간색 페라리 20대가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 다른 디자인의 페라리들. 구하기 힘든 288 GTO 클래식 모델도 보였다.
‘페라리에 완전 미쳤나 본데?’
라페라리(LaFerrari) 앞에 서 주위를 둘러보는 서준하. 전생 자신의 애마를 다시 마주하자, 순간 기분이 묘했다.
‘어떻게 이번에 나온 차를 벌써 차고에 들인 거지?’
2013년 최초 공개된 라페라리, 서준하는 이 차가 한국 땅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Philip]
차 안을 들여다 보자 스티어링 휠 네임태그엔 ‘필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대표님께서 금방 오실 겁니다.”
페라리 구경에 한참이던 서준하 곁으로 여비서가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께서 페라리 수집이 취미신가 봐요?”
서준하가 페라리 캘리포니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난번 케노팀에 유건석이 타고 왔던 빨간색 슈퍼카도 보였다.
“아, 네. 차를 보관하기 위해서 이 사옥을 지으셨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예요. 그만큼 페라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시죠.”
첫 대면부터 말이 없던 서준하. 처음으로 그가 던진 질문에 여비서는 약간 수줍게 답변했다.
지잉.
철컥.
서준하가 이곳저곳을 돌며, 페라리들을 구경할 때 차고지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하하, 준하 선수. 미안 미안. 내가 조금 늦었네.”
선글라스를 벗으며 서준하에게 인사하는 필립 황. 그 옆으로 명품 브랜드의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아참, 인사해. 여긴 서준하 선수라고, 장차 한국 최초의 F1 레이서가 될 인물이야.”
손을 뻗어 여자에게 서준하를 소개하는 필립 황. 이전과 달리 오늘은 얼굴이 밝아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잠깐 말을 머뭇거리는 필립 황. 이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여자친구 조소희. 화면에서 많이 보던 사람이죠?”
외국인이 뽑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 톱10에 항상 들어가는 영화배우 조소희. 서준하도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몇 편 본 적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
“오? 젊은 사람치고, 우리 소희 앞에서 부끄러워 하지 않는 남자, 처음 봤어”
누가봐도 반할 외모의 조소희. 필립 황의 예상과 달리 서준하는 그녀와의 악수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근데 우리 좀 잘 어울리나?”
필립 황은 조소희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온 뒤 웃으며 물었다.
‘꼭 이런 걸 물어 보더라.’
여러 스폰서들과 대면한 서준하. 왠지 이런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20대 어린 여자랑 30대 중반의 배 좀 나오려는 아저씨라...’
무슨 공식처럼 돈 많은 사업가 곁엔 늘 젊은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항상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자가 아깝긴 한데...’
매사에 솔직한 그였지만, 이런 때 만큼은 프로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원하는 답을 말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자신이 늘 하는 대답엔 반응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준하 선수가 봐도 그래 보이지? 하하.”
“준하 님도 인상 엄청 좋으시고, 센스 있으시네.”
부끄러운 듯 호호 웃어가며 서준하를 힐끔보는 조소희. 서준하도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자, 그럼 인사도 나눴으니까. 음, 소희야 잠깐 올라가 있을래?”
아직 결론 짓지 못한 서준하의 포뮬러 진출. 필립 황이 서준하를 자신의 사옥으로 부른 건, 어느 정도 고민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준하 선수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 금방 끝나고 올라갈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애기야.”
필립 황이 가볍게 키스하며 조소희를 문밖으로 배웅했다.
잠시 후,
지잉.
척.
“음, 준하 선수. 그 날 이후로 나도 생각을 많이 해봤어.”
다시 차고로 들어온 필립 황. 널따란 가죽 의자에 앉아 서준하를 향해 말했다.
“내가 여러 가지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사실 준하 씨를 일본으로 보내고 싶었던 건. 내 비즈니스랑 관련 있기도 했어.”
차분히 자신의 본래 의도를 말해주는 필립 황.
“이번에 의류 쪽 투자처 때문에 일본 출장이 많아졌거든. 일본에 준하 선수가 있으면 옆에서 자주 볼 것 같아서, 나는 그쪽으로 아카데미를 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서준하는 필립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근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준하 선수, 영국가고 싶다고 했지? 그렇게 해요. 내가 도와줄게.”
갑작스럽게 마음이 바뀐 듯한 필립 황. 서준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근데...”
이유를 물어보려던 찰나, 필립 황이 직접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이번에 모터스포츠 에이전트 사업도 한 번 해보려고 해요. 서준하 선수를 계기로, 나도 아시아 선수들한테 유럽 무대를 밟을 기회를 더 주고 싶어졌어.”
지난번 서준하와의 대면 이후 깊숙하게 포뮬러 사업을 조사했던 필립 황. 어느 나라에서 포뮬러를 시작해야 선수 커리어에 유리한지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역시 사업가구나. 돈 버는 일엔 두뇌 회전이 빠르다니까.’
단순히 스폰만 하려는 게 아닌 사업의 확장까지 고려한 필립 황.
“아, 그러셨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준 그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사업가적 수완에 놀라기도 했다.
“아참, 이 얘기만 하려고 부른 게 아니에요.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한창 말을 하던 필립 황이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잉.
철컥.
“어, 왔어요.”
문이 열리고 누군가 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자, 앞으로 서준하 선수를 매니징할 한서윤 씨.”
필립 황이 서준하에게 여자를 소개했다.
“반가워요, 서준하 선수. 한서윤이라고 해요.”
하얀 피부와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여성이 서준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한서윤?’
< 편견을 깨고 싶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