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지, 별천지가 따로 없겠지 >
빵빵.
“앞에서 되게 알짱 거리네.”
한서윤이 경적을 울린 후 핸들을 꺾어 차선을 변경했다.
‘보기보단 성질이 좀 있네.’
서준하가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힐끔 쳐다봤다. 안 그래도 큰 한서윤의 눈이 더 커보였다.
“제가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닌데, 저렇게 느린 차만 보면 갑자기 화가 난다니까. 미안해요, 놀랐겠다.”
보조석에 앉은 서준하를 향해 손을 내젓는 한서윤. 이내 다시 운전대를 잡고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전세계적으로 준하 선수처럼 F1을 꿈꾸는 레이서가 이백만이 넘어요. 근데 거기서 진짜 F1 시트에 앉는 선수는 몇 명이다? 스무 명이 조금 넘어요. 이 바닥이 얼마나 가혹한 곳인지 아시겠죠?”
“네, 열심히 해야겠어요.”
이 여자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의도가 뭘까 싶다가도, 다시 한번 자신을 채찍질하게 돼서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 서준하.
“제가 준하 선수보다 좀 더 어릴 때 영국에서 F1 스쿨을 다녔어요.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이것 저것하다가 잠깐 F1팀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그래서 이쪽을 잘 알아.”
영국 F1 스쿨은 유럽에서도 가장 체계적인 모터스포츠 교육과정으로 손꼽힌다. 게다가 F1팀에서 근무를 했다면, 꽤 실력있는 사람일터.
“F1팀 윌리엄스 알죠? 제가 윌리엄스에 있었어요.”
“아, 윌리엄스. 그러면 엔지니어링쪽에서 근무하셨나 봐요?”
자신을 소개하는 말투에 자부심이 가득한 한서윤. 그럴만도 했다. 윌리엄스는 F1 팀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역사가 깊은 곳이니까.
“아니. 학교에서 공부는 엔지니어링을 했는데, 실제로 업무를 하니까 나랑 안 맞아. 그래서 마케팅을 했죠.”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엔지니어 치곤 이렇게 말 많은 여잔 드물었으니까. 한서윤을 흘겨본 서준하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케팅 업무하다가 필립 대표님하고도 연이 닿은 거예요. 제가 영국에 있으니까, 대표님도 저한테 준하 선수를 맡긴 거고.”
“그러셨군요. 근데 어떻게 하다가 F1쪽 일을 하게 되신 거예요?”
앞으로 자신의 해외 생활을 이끌어줄 지도 모르는 사람. 서준하가 관심을 보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으응, 부모님 따라서 어릴 때부터 영국에서 살았는데, 그 나라는 365일 레이스를 하잖아. 그러다 보니까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됐고...”
부우우웅.
“...!”
갑자기 속도를 올려 차를 빠르게 모는 한서윤.
“게다가 이렇게 질주 본능이 있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경주차를 공부하게 됐죠!”
“하하, 네...”
“또 놀랐구나, 아 미안해라. 나에 대해선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우리 자주 볼 거야, 아마.”
여자로선 드문 이력부터 돌발 행동까지. 첫인상과 달리 한서윤은 특이한 여자가 분명했다.
***
두두두둥.
서준하의 집앞에 도착한 한서윤의 차. 인사를 마친 서준하가 내리려하자, 한서윤이 그를 불러세웠다.
“대표님이 미리 말씀해주신 게 있어서, 내가 준비는 대충해놨어요. 영국이 F3 리그는 최고니까, 교육 받고, 대회 바로 나갈 수 있는 아카데미도 알아봤고. 준하 선수는 몸만 오면 돼.”
영국에는 수백 개의 레이싱 스쿨과 포뮬러 아카데미가 존재한다. 한서윤의 커리어 정도면 그중 괜찮은 아카데미를 알아봐뒀을터.
“칼린 포뮬러 아카데미라고, 영국 뿐만아니라 유럽이랑 북미에도 지부를 둔 대형 아카데미에요. 맞아, 맞아. 준하 선수도 잘 아는 알론소가 여기 나왔어.”
칼린. 역시나 유학파 레이서들의 전형적인 코스였다.
‘여러 군데 알아본 거 같은데, 이 얘길 꺼내면 김 좀 빠지시겠네.’
서준하가 영국행을 택한 건 전생의 레이싱 파트너 롭과 함께 커리어를 쌓는 것과 더불어,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 서준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스메들리 아카데미도 한 번 알아 봐실 수 있나요? 저는 대형쪽보다 여기서 시작하고 싶어서요.”
롭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스메들리 아카데미로 가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응? 준하 선수도 알아봤나 보네. 근데 스메들리? 거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벤버리에 있는 아카데미에요.”
“벤버리 쪽이야? 아아, 그럼 대형 아카데미는 아닐 텐데...?”
필립 황에게 듣기론 서준하는 해외 경험 없는 어린 선수였다. 자신의 제안 대신 대뜸 다른 아카데미를 가겠다는 말에 한서윤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아냐, 아냐. 아직 준하 선수가 잘 몰라서 그래, 처음부터 큰물에서 놀아야 기회가 빨리오는 법이라고. 이 바닥이 원래 그래요.”
답답했다. 어린 선수니까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후 계속해서 칼린 아카데미의 장점을 설명하는 한서윤.
서준하에겐 아카데미는 다 거기서 거기. 잠자코 얘기를 듣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회는 대회에 나가야 생기지 않나요? 소형 아카데미라고 해서 대회에 못 나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의 말대로 어디서 배웠느냐보다 시험 즉, 대회에서 성적을 보여야 상위 리그로 갈 기회가 주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음... 그렇긴 한데. 스메들리? 괜찮으려나. 나 진짜 그런 데 처음 들어봐요. 갑자기 머리 아프네, 이거.”
필립 황도 서준하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라고 당부한 상황. 무작정 자신의 선택을 밀어부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에 빠진 한서윤.
‘처음부터 의견이 엇갈리니까, 좀 찝찝하네.’
사실은 기분이 좀 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선수가 전문가인 자신이 준비한 사항을 단번에 거절한 상황이었으니까.
‘가서 못 하기만 해 봐.’
유럽에서 날고 긴 레이싱 유망주들을 보고 자란 한서윤. 한국인인 그녀 역시, 어린 한국 출신의 레이서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아카데미 선택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잖아요? 스메들리에서 시작하는 걸로 진행 부탁드려요.”
서준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한서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서준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좀 의외였다.
“알겠어요. 내가 한 번 알아 볼게요.”
“제 선택에 존중해주셔서 감사해요. 가서 좋은 모습 보여드릴게요.”
스메들리에 가겠다는 건 약간의 억지였다. 한서윤의 기분을 눈치 챈 서준하가 웃는 얼굴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다고 거길 가는 진짜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잖아?’
***
“오빠, 영국 가서도 저희가 열심히 응원할게요. 자 이건 선물!”
서준하의 팬클럽 JHCD의 회장 은수연이 눈물을 보이며 서준하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독보적 원탑 레이서 서준하의 폭풍 질주]
상자를 열어 확인하는 서준하. 기이한 제목이 붙은 사진첩과 함께 팬들의 손편지가 가득 담겨있었다.
“이거 우리 팬들이 오빠 카트 타는 동안 달리는 사진을 찍은 거예요. 편지는 영국가서 읽어보세요!”
“하하, 네 고마워요. 잘하고 올게요.”
“응원 꼭 갈거니까, 그때 다시 봐요!”
눈물을 보이는 팬들. 서준하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고, 준하야. 안가믄 안되겠나? 할미가 우리 준하 없이 우예 사노.”
“걱정마세요, 할머니. 저 잘하고 올게요.”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서준하가 가족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엄마, 누가 보면 준하 어디 끌려가는 줄 알겠어. 그만하셔.”
공항에 도착하기 전부터 울상이었던 준하의 할머니가 드디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이고, 내 다 들어서 안다. 에프완 그기 사고 음청 난다 카드라. 죽는 아도 억쑤로 많고!”
손주가 뭘 해도 불안한 게 조부모의 마음이다. 더군다나 위험한 말들이 오가는 레이싱 바닥. 해가 지나도 할머니의 걱정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할머님. 요새는 안전장치가 잘 돼있어서 걱정하실 것 없어요.”
“안전장치는 무슨, 그기 폭주족이랑 뭐가 달라아!”
“아이고, 엄마. 여기 이 분이 준하 선생님이야. 몇십 년 동안 레이스하셨는데, 이렇게 멀쩡하시잖아.”
“...하하, 맞아요.”
대부분의 어르신들에게 모터스포츠의 이미지는 폭주족과도 다름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주현우가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준하야, 더 잘하려고 하지마. 어딜가던지 항상 네 페이스대로만 레이스해.”
“네, 코치님.”
“언젠간 정상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잘하고 와.”
지난 4년동안 지켜본 서준하는 엄청난 실력자였다. 떠날 때가 되자 주현우도 눈시울을 붉혔다.
“준하 선수, 이제 가요.”
한서윤이 서준하에게 영국행 티켓을 건넸다.
“잘하고 올게요. 다들 잘 지내고 계세요.”
서준하가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한서윤과 함께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BRITISH AIRWAYS]
Boarding Pass
name: SEO/ JUNHA
from: SEOUL
to: LONDON
***
장시간 비행 이후 서준하와 한서윤이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역시 비행기는 오래 탈 게 못 된다니까.”
짐을 찾은 한서윤이 얼굴을 찌푸리며 기지개를 폈다.
“택시.”
공항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숙소로 이동하려 하자, 서준하가 자연스러운 영어 발음으로 택시를 불러 세웠다.
“타시죠.”
문을 연 서준하가 한서윤에게 먼저 타라고 손짓했다.
“오, 이런 건 언제 배웠어?”
택시에 탄 한서윤이 서준하를 향해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이거, 여자팬들이 괜히 많은 게 아니었어. 디테일이 살아있네.”
한서윤의 짐을 들어 트렁크에 싣는 서준하.
“하하, 기본 아니에요?”
농담을 주고 받는 서준하. 한서윤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맘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몸에 밴 매너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일뿐.
“아까 출구를 찾을 때도 많이 와본 사람처럼 먼저 나가던데... 초반부터 아주 든든하네?”
낯선 땅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 같지 않았다. 어리숙함이라곤 찾아 보기 힘든 제스처들. 한서윤이 충분히 신기해할 만했다.
‘익숙하지. 여길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데.’
택시에 탄 서준하가 창밖을 보며 미소 지었다.
부우우웅.
창밖으로 도로 위를 달리는 런던의 럭셔리 세단들이 보였다.
‘역시 영국이야.’
영국은 소비자 한 명의 특별 주문에 따라 맞춤형 자동차를 만든 역사가 깊다. 한국에선 보기 드문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여러 대 보였다.
“어? 이제 거의 다왔다. 집중, 집중.”
한참을 달리던 택시.
한서윤이 도로 옆의 커다란 조형물을 가리키며 서준하를 흔들었다.
[Motor sports Valley]
“여기가 바로 모터스포츠 밸리! 4,000 곳이 넘는 모터스포츠 업체가 모여 있는 곳이에요. 좀 더 들어가면 F1 팀의 본사도 나오고, 실제 선수들의 연습 레이스도 볼 수 있죠.”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모터 스포츠의 성지라고 불리는 영국. 그곳의 심장과도 같은 지역인 모터스포츠 벨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조금 더 지나자 다양한 포뮬러카의 조형물부터 F1팀들의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전시장이 보였다.
“준하 선수, 앞으로 여길 자주 오게 될 거예요. 미리 좀 봐둬요.”
흥미로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서준하. 도로 옆으로 다양한 레이싱 서킷과 자동차 팩토리가 보였다.
“하하, 준하 선수 진짜 좋아한다. 이럴 땐 또 그 나이답다니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서준하의 모습을 보고 한서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별천지가 따로 없겠지.”
F1의 나라에 들어온 그가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서윤. 하지만 서준하가 흥미를 보이는 포인트는 달랐다.
‘로킹햄? 실버 스톤 서킷? 이게 얼마 만이야?!’
자신이 활약했던 영국의 서킷을 눈앞에 두자 이전의 기억들이 별처럼 쏟아져내렸다.
< 그렇지, 별천지가 따로 없겠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