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윙미러 안 보는 거야? >
“준하, 내 차는 자꾸 시동이 꺼져, 이거 왜 그러는 거지?”
“네가 아직 클러치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포뮬러 아카데미 실습 교육. 라이센스는커녕 출발도 못하는 안경잡이 조지 톰슨. 연이은 주행 실패로 아주 울상이었다.
“악셀을 밟는 것하고 클러치를 놓을 때의 그 미세한 타이밍을 너 스스로 찾아야 해. 안 그러면 또 멈출 거야.”
“응... 다시 해볼게.”
어느 교육에서건 낙제생이 있기 마련. 주행 실수 연발, 낙제 위기에 놓인 교육생 조지가 서준하의 옆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준하 너처럼 빠르게 달리고 싶은데, 그게 맘처럼 안 돼...”
매 교육에서 뛰어난 주행을 보여준 서준하. 몇몇 친구들의 태도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
“그럼 그만 훌쩍거리고, 이렇게 쉴 때,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해 봐.”
계속 되는 실패로 속상했는지 결국 조지가 눈물을 흘렸다. 안타까운 맘이 드는 상황. 영혼없는 위로의 말보단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이미지 트레이닝?”
실제 포뮬러에 올라타 조작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훈련법으로, 모터스포츠는 물론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100여년 이상 사용해왔던 스포츠 심리기술이다.
“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네가 포뮬러카를 운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 이렇게 왼쪽 편에 브레이크를 상상하고...”
자존심 따윈 버리고 같은 교육생에게 배우고자 달려드는 조지. 그런 그에게 더 많은 팁과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은 맘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서준하에게 긍정적인 사람이 조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까 연습 주행하고 나올 때 보니까, 진짜 괜찮던데.”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근데 이쪽은 쳐다도 안 보네.”
참가자 남성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서준하.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다른 교육생들과 달리 포뮬러를 타고 내릴 때의 여유 때문이었다. 여자 교육생 케이시와 린다가 그를 흘겨봤다. 그리고,
“안녕, 난 케이시 카버트야.”
서준하의 앞으로 불쑥 다가온 케이시. 먼저 인사를 건네며 밝게 웃어 보였다. 자신감 넘치면서도 어딘가 적극적인 모습.
“와씨, 케이시랑 쟤 뭐가 있나 본데?”
“엥? 나 케이시가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
“내가 말 걸면 졸라 무표정이던데...”
무리 속 새로운 실력자의 등장에 시기나 질투심을 품는 건 인간 진화의 산물. 교육장 구석에서 케이시와 대화를 나누는 서준하를 본 몇몇 남성 참가자들이 부러워했다.
“한국에서 왔구나. 그러면 영국은 처음이겠네? 교육 끝나면 내가 런던 소개 시켜줄까?”
어딘가 적극적인 태도의 케이시. 서준하와 친해지려는 의도가 있는 듯보였다.
‘여자 레이서라...’
레이싱을 잘하면 여자가 꼬인다. 전생에도 그랬다. F1에 오르기 전에도 다양한 나라의 여러 여성들이 서준하에게 관심을 보였다.
‘근데 여자 때문에 중간에 자빠진 놈들이 많았지.’
하지만 커리어에 전념해도 F1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말까. 아직은 다른 곳에 시간 쓸 여유가 없었다.
서준하가 시간 핑계로 적당히 둘러대자, 케이시가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준하, 네가 괜찮을 때 보자.”
***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테스트 주행을 실시하겠습니다. 테스트 랩은 총 15바퀴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15바퀴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과정. 테스트를 진행한다는 강사의 말에 교육장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건 바로 테스트 주행의 베스트 랩이 1분을 넘는 사람에게는 라이센스 취득 시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육장이 아니고서야 라이센스가 없으면, 포뮬러를 운전하지 못 한다. 뜻밖의 테스트 공지에 당황한 학생들.
“A, B 두 조로 나눠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페이스세터(pace setter)를 기준으로 간격을 나눠 스타트할 테니. 호명하는 사람은 준비를 마치고, 포뮬러카에 타세요.”
윌리엄이 스태프들에게 테스트 주행 준비를 지시했고, 참가자들은 주행 준비를 시작했다.
첫 포뮬러 테스트만큼 떨리는 게 있을까. 전생 자신의 아카데미 시절이 떠오른 서준하. 주변 교육생들의 굳은 표정이 이해됐다.
강사들의 지시에 따라 분주해진 스메들리 아카데미.
주위를 둘러보던 윌리엄의 눈에 피트에 대기 중인 서준하가 보였다.
‘카트 실력이 과연 포뮬러에서도 먹힐까?’
카트가 포뮬러의 입문 과정이긴해도 성향이 완전 다른 차다. 하지만 서준하는 카트 대회의 실력자. 섣부르긴 해도 윌리엄은 계속 그의 행보가 기대됐다.
잠시 후, 무언가 생각난 윌리엄이 시선을 옮겨 교육장 주변을 둘러봤다.
‘후... 이 자식. 꼭 와서 보라니까. 코빼기도 안 비춰.’
서준하에 대한 기대만큼 오늘은 꼭 롭이 테스트를 봐줬으면 했다.
윌리엄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호루라기를 들었다.
삐빅.
스태프들에게 손짓하자, 스메들리 스태프들이 오케이 사인과 함께 무전을 보냈다.
“스메들리 포뮬러 아카데미, 테스트 주행 준비 완료입니다.”
윌리엄이 레이싱 복장을 갖춘 강사 대니를 향해 말을 건넸다.
“대니, 선두 차에 올라타게.”
선두에서 레코드라인을 따라 달리며, 참가자들의 페이스를 올리는 페이스세터.
“자네 역할은 레코드라인을 정확히 밟아서 참가자들에게 가이드 라인을 주는 거야. 간격이 너무 벌어지거나, 좁혀져서는 안 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달리게.”
윌리엄의 지시에 대니가 그리드의 맨 앞에 선 포뮬러카에 올라탔다.
“대니, 너무 빠르게 달리지는 마.”
“맞아, 오랜만에 달린다고 현역 때처럼 밟아선 안 돼. 하하.”
포뮬러 닛폰 선수 출신 대니. 동료 강사들이 대니에게 너무 오버하지 말라며 당부했다.
“알겠어요. 페이스 세터가 치고 달리면 안 되지. 교육생들 있으니까 천천히 달릴게요.”
다소 공격적인 드라이빙 스타일의 레이서 대니. 그의 레이싱 실력만큼은 스메들리 강사 중 최고였다.
매 코스 정확히 레코드 라인을 밟는 건 아무나 하기 힘든 일. 대니가 손을 흔들며 모두에게 걱정 말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A조 스타트!”
***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A조의 테스트 주행을 지켜보는 참가자들.
“크큭, 5일 동안 뭘 배운 거야.”
“쟤네 단체로 개그 하냐.”
시작하자마자 스톨(출발 시 엔진 꺼짐)을 연발하는 포뮬러가 여럿 나타났다.
반면 다행히도 먼저 출발한 차들은 실수 없이 원활하게 주행하는 상황. 대기 중인 참가자들이 선두를 달리는 포뮬러카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오, 앞에는 잘 달리는데? 선두 뒤에 3대나 따라 붙었어.”
“8번, 9번, 2번. 누구지?”
“2번이 빠르네.”
“맞아, 앞에 차들보다 엄청 늦게 출발했는데, 벌써 다 따라잡았어.”
테스트 주행은 페이스세터 출발 이후 각 참가자가 4초간 간격을 두고 출발한다. 후발주자였던 2번이 선두와 앞차들을 따라잡자, 참가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와, 준하야. 2번 진짜 빠르지 않아?”
그 모습을 보던 안경잡이 조지가 서준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응? 그런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의 서준하. 그의 눈엔 2번 차가 빠르다기 보단 먼저 출발한 앞차들이 느려 보였다.
“흠...”
참가자들 앞에 선 강사들도 특별한 게 없다는 표정으로 트랙을 바라봤다.
“페이스세터 뒤로 케이시, 로만, 루크입니다.”
“...랩타임은?”
참가자 엔트리를 살펴본 스태프가 윌리엄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 윌리엄. 다운된 목소리로 랩타임을 물었다.
“선두권을 제외하곤 전부 1분이 넘습니다. 하지만 선두 쪽도 아슬아슬합니다...”
생각보다 테스트를 잘 치루지 못하는 참가자들. 랩타임이 전체적으로 너무 느렸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윌리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대니, 속도를 좀 올려보게. 랩타임이 너무 떨어져.”
-카피.
대니에게 무전을 때리는 윌리엄. 페이스 세터를 다그치자, 선두 차의 속도가 곧바로 빨라졌다.
“오, 진짜 준하 말이 맞네.”
강사들의 무전을 들은 조지가 호들갑을 떨자, 그 모습을 보고 서준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이 꼭 한국에서의 장윤호같았다.
“준하, 근데 어떻게 안 거야?”
“그냥, 느려 보여.”
“그냥?”
미세하지만 엔진음이 작았고, 1600cc 엔진을 단 차가 내는 속도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렸다. 이전 프리 주행에서 저 차를 가지고 최고속까지 밟아봤기에 차이가 느껴졌다.
부우우웅.
끼익.
체커기가 휘날리자 포뮬러카들이 하나 둘 피트로 모이기 시작했다.
“A조 베스트 랩은 2번 루크 다이어, 55초 554입니다. 테스트 합격자는 2번, 8번 그리고 9번 참가자. 나머지는 전부 1분을 넘었습니다...”
A조 참가자들이 복귀하고, 테스트 결과가 발표되자,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는 케이시. 그 옆에선 로만과 루크가 환호했다.
“자, B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배정된 번호로 바로 탑승하세요.”
이어지는 B조 테스트. 서준하가 헬멧을 챙겨 4번 포뮬러로 향했다.
***
‘4번이면, 어디냐.’
대기 중인 포뮬러카를 확인하는 서준하. 그리드 맨 앞에서부터 포뮬러의 번호를 확인했다.
‘...?’
계속 보이지 않던 4번 포뮬러. 출발 순서의 맨 뒤까지 다가서자, 결국 마지막 포뮬러가 자신의 테스트 차량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건 난이도가 올라간 것 같은데...’
살짝 당황한 서준하의 귀로 신호가 울렸다.
삐빅.
“B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둘씩 스타트하는 포뮬러들. 앞차들이 출발하고, 가장 마지막 포뮬러만이 그리드에 남았다. 그리고,
“4번 스타트!”
서준하의 포뮬러가 남다른 엔진음을 뿜으며 스타트했다.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이미 앞선 A조의 주행으로 데워진 타이어. 뛰어난 그립감이 서준하의 몸으로 전해졌다. 전방을 살피펴 타이밍 좋게 치고 나가려던 그때,
‘진짜 장애물 피하기잖아?’
서준하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멈춰선 포뮬러들이 그의 길목을 가로막았다.
부우우우웅.
휑.
정체된 차들을 피해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나아가는 서준하.
‘나와라, 얘들아.’
6바퀴 만에 20초나 먼저 달린 차들을 따라잡은 서준하가 순식간에 앞선 5대를 추월하며, 페이스세터의 근처로 다가섰다.
“와, 역시 잘 타네요.”
“랩타임을 측정한다니까, 혼자 레이스를 하고 있어. 하하.”
앞쪽에 등장한 4번 포뮬러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강사들.
“대니, 속도를 더 올려. 뒤에서 쫓아온다.”
-더 올려요? 그럼 이제 진짜 달립니다!
4번 포뮬러의 질주에 윌리엄도 눈을 번뜩뜨고 서킷을 바라봤다.
부우우웅.
“오호, 대니 신났나 본데.”
“근데 저렇게 빨리 달리면 어떻게 해. 하하.”
급속도로 빨라진 대니의 포뮬러에 웃음이 터진 강사들. 페이스세터가 속도를 올리자, 뒤따르던 차들과의 간격이 더 벌어졌다.
선두가 빨라진 걸 확인한 서준하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한 코너에 한 대씩이다!’
아웃코스, 인코스 가릴 것 없었다. 뒤쫓아오는 속도가 차원이 달랐기에 서준하는 매 코너에서 앞선 포뮬러들을 추월했다.
“와, 4번 포뮬러!”
“앞차를 다 제쳤어!”
30초 이상 먼저 출발한 참가자를 따라 잡은 4번 포뮬러. 단 10바퀴 만에 앞차들을 제치자, 강사진들이 소리를 질렀다.
부우우웅.
위이이잉.
“대니! 속도를 더 올리게!”
무언가를 확인한 윌리엄이 다급한 목소리로 무전을 때렸다.
“더! 더! 더!!!”
-캡틴, 지금도 충분히 빠릅니다!
계기판을 확인한 대니. 자신은 이미 최고속에 가까운 속도로 주행 중이었다.
“너 윙미러(사이드미러) 안 보는 거야?”
-네?!
무전을 듣고 뒤를 확인한 대니.
-쟤, 뭐야!!!
“추월 당하기 전에 밟아! 밟으라고!”
페이스세터 뒤로 교육생 포뮬러 한 대가 따라붙었다.
< 너 윙미러 안 보는 거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