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그렇게 빠르다며? >
포뮬러는 오로지 레이스를 위해 태어난 순종말이다. 차의 움직임을 즉각 알아낼 수 있도록 섀시와 서스펜션을 단단한 카본 소재로 만들어야 한다.
“코, 코리안 포뮬러가 맞습니다... 분명 고무로 갈아꼈어요.”
엔진 마운트를 고무로 사용한다면, 차의 반응도 한 박자 늦게 전달된다. 이는 마치 버벅거리는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한 환경.
“근데 어떻게 저렇게 빠른 거야!”
너무나 빠른 서준하의 포뮬러에 랄프가 파블로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근데 타임 트라이얼 때 과장님도 보셨잖습니까. 지금 갑자기 빨라진 거라구요!”
파블로의 말이 맞다. 오전 서준하의 포뮬러는 가장 랩타임이 저조했고,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꼴찌를 달리고 있었으니다. 하지만,
“스콧!!!”
자신의 아들 스콧이 서준하의 뒤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2위로 올라선 서준하의 포뮬러.
“헉, 지금 코리안 차는 엔진 진동이 심할 건데... 게다가 반응이 느려서 컨트롤이...”
부품을 바꾼 포뮬러는 엄청난 엔진진동을 낸다. 이는 그대로 운전석에 전달되어, 드라이버의 피로도가 훨씬 배가 돼버리기까지.
“닥쳐, 이 XX야!”
화가 치밀어 오른 랄프가 소리쳤다.
“네가 분명 뭔가 잘못한 거라고!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믿기 힘든 상황에 여전히 파블로의 무능함을 탓하는 랄프.
하지만 계속해서 욕을 먹는 파블로도 어딘가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만약 스콧이 대회에 못 나가면 넌 뒤질 줄 알아, 알겠어?!”
“...”
온갖 욕을 쏟아붓으며 파블로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 그때,
“그만해, 이 영감탱이야!!!”
퍽.
랄프의 얼굴을 향해 박치기를 가한 파블로. 연이어 격렬한 몸싸움을 벌어졌다.
우당탕탕탕!
피트 안에 여러 장비들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자, 두 사람에게 향한 시선들.
“랄프?!”
“파블로?!”
두 사람을 발견한 스태프들이 다가섰다.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하자 더 소란스러워진 스메들리 피트. 그 바람에 윌리엄이 스태프들을 향해 고함치며 피트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경기 안 끝났는데, 다들 왜 이렇게 난리야!”
팀원들 가운데 숨을 헐떡이는 랄프와 씩씩거리는 파블로가 보였다. 특히나 충격적인 랄프의 모습.
“랄프?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
레이스가 끝난 선웨이 서킷. 소란을 일으킨 두 사람과 면담했던 윌리엄이 자신이 직접 차량 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두두두두둥.
스태프가 서준하의 포뮬러를 몰고 피트 안으로 들어왔다.
“스톱, 거기 세우게.”
포뮬러 앞으로 다가선 윌리엄. 주머니에서 공업용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워넣었다.
끼익.
시트 중앙 패드를 열어 엔진 부속을 확인하는 윌리엄. 다른 포뮬러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고무 엔진 마운트가 보였다.
‘지금 이걸 타고 레이스를 한 거야?’
믿을 수 없었다. 운전자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조건. 심지어 서준하는 수료생이었다.
‘이런 걸 꼈으니... 흠, 근데 어떻게 빨라진 거지?’
부품 하나만 바뀌어도 운전자에게 다가오는 감각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이런 차로 1위로 들어온 서준하가 신기하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적응한 건가? 그래서 후반에서야 빨라진 거고?’
처음 부진했던 서준하의 타임 트라이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준하는 점점 빨라졌고, 막판에는 가장 빨리 달려 1위에 올랐다.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녀석은 무조건 잡아야 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한 적응력을 보여준 드라이빙. 서준하에 대한 확신이 드높아졌다.
‘근데 도대체 이딴 짓을 왜...’
피트 구석에선 어쩔 줄 모르는 파블로와 랄프가 보였다.
‘파블로가 제멋대로 이런 짓을 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랄프라면 충분히...’
랄프는 자신이 시킨 적 없다고 잡아뗐지만, 그 말을 믿기는 어려웠다. 굳은 얼굴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윌리엄.
“팀 코치들은 잠깐 사무실로 모이게.”
윌리엄이 장갑을 툭툭 털며 씁쓸하게 걸음을 옮겼다.
캡틴이 자리를 뜨자, 참가자들이 서준하의 포뮬러로 다가섰다.
“진짜, 다르네. 여기는 고무야.”
“근데 왜 이 차만 이런 걸 쓴 거지?”
부품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만 눈에 들어올 뿐, 선수들은 이 상황이 어떤 걸 의미하는 지 전혀 몰랐다.
“이것 때문에 코리안만 빨랐던 거 아니야?”
“맞아, 어쩐지 갑자기 치고 나오더라고. 야비한 놈. 다 이유가 있었어!”
심지어 서준하의 실력을 엔진 튜닝과 같은 속임수로 여기는 기존 레이서들. 그들은 각각의 부품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들이었다.
“만약에 반칙을 쓴 거라면, 1위 자격을 발탁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레이스가 끝나고, 아직 순위 공지가 없는 상황. 레이스 후반 서준하는 모든 포뮬러를 제치고 1위로 피니쉬했다.
“준하, 진짜 괜찮을까?”
“정말 준하가 갑자기 다른 선수보다 빠르긴 했는데... 설마.”
이유를 모르는 동료 수료생들도 혼란스러워 했다. 예선부터 본선 레이스 중반까지 서준하는 정말로 느렸으니까.
‘튜닝...?’
웅성거리는 선수들 뒤에 선 서준하.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얼굴이 왜 저래?’
한편, 얼굴이 퉁퉁 부은 랄프 옆으로 심각한 표정의 스콧이 눈에 띄었다. 매우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
‘스콧이랑 무슨 사이지?’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묻는 스콧. 그의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랄프는 그저 고개를 흔들며 서있었다.
잠시 동안 랄프를 자세히 살피던 서준하. 그가 입은 엔지니어링 유니폼이 눈에 띄었다. 어딘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
‘얼굴 보니까 갑자기 열받네. 1위로 못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어.’
장난을 친 장본인을 보자, 화가 치밀어오른 서준하. 자리에서 일어나 랄프에게 다가서려 했다. 그러던 그때, 끼익.
철컥.
코치진들이 피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자, 주목! 오늘 선발전은 들어온 순위 그대로. 변동 사항 없다.”
피트에 선 모두를 바라본 윌리엄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위 서준하, 2위 다니엘. 두 사람은 브리티시컵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게나. 그리고...”
말을 멈춘 윌리엄.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랄프, 자넨 해고야. 오늘부로 스메들리 팀에서 나가주게!”
***
선발전을 마친 스메들리 팀. 휴식기 없이 곧바로 다음 날부터 대회 연습에 들어갔다.
“어어, 일찍 왔구만, 다니엘.”
일찍 도착한 선수를 향해 윌리엄이 인사를 건넸다.
“야, 롭. 헨리가 올 때 되지 않았나?”
“거의 도착했데요.”
띠리리링.
“윌리엄 스메들리입니다.”
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는 윌리엄.
-어, 윌리엄. 나야 마틴.
스메들리 팀을 후원하고 있는 마틴 워커. 살짝 짜증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오, 마틴 오래만이에요.”
-이번에 랄프를 해고 했다면서요. 무슨 일 있어?
“네, 조금 지저분한 일이 있어서... 제가 나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만나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걱정 돼서 전화했네 모든 스폰서가 팀의 사소한 일까지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메들리 스폰서 컨소시엄(모임)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틴은 사사건건 팀의 결정에 간섭했다.
“왜 그러시죠, 마틴?”
-아니, 당장 대회에 나가는 마당에 랄프를 내보내면 엔지니어링 팀은 누가 맡아? 대안은 있는 거야?
현재 윌리엄도 가장 애를 먹고 있는 부분. 하지만 랄프 같은 인물을 팀에 남겨둘 순 없었다.
마틴에게 자세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윌리엄.
-그래, 그럼 문제 없게끔 빨리 처리해줘.
“네, 알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이번에 보내주신 명단 보니까, 출전 선수 한 명이 아시안이던데?
계속되는 질문에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 윌리엄.
“아, 서준하라고 한국에서 온 선수가 이번에 출전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없는데, 뭔가 좀 꺼림직 하네. 영국 팀에 동양인이 레이서로 나오는 건 처음이니까. 스폰팀들도 전부 영국쪽인데 말이야.
돈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전화를 꺼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이사장님도 직접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우승 확률을 더 높여서 팀이 포디엄에 오르는 게, 훨씬 더 마케팅 효과가 좋지 않을까요?”
-으응, 그건 그렇지.
아카데미부터 대회 팀 운영까지.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스메들리 팀에선 스폰서가 꼭 필요한 상황. 마틴을 설득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윌리엄이 통화를 마쳤다.
“동양인이 어쩌니 뭐 이딴 바보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어. 우승할 실력이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후...”
“그러게요. 빠르면 그만이지.”
한숨을 내쉬며 먼산을 바라보는 두 사람. 그 곁으로 시원스럽게 생긴 남자가 다가섰다.
“잘 지내셨어요, 다들.”
“오, 헨리 어서와.”
헨리가 선웨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다며 서로 인사를 나눈 세 사람. 헨리가 팀의 근황을 묻자, 롭이 최근 일들을 설명했다.
“그래서 랄프 과장님이 나가신 거구나.”
“그러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어. 지난 대회 선발전에도 비슷한 전략을 썼더라고.”
“상심이 크셨겠네요, 윌리엄.”
“나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잖아, 크큭.”
실실 웃는 롭을 째려보는 윌리엄. 그 바람에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헨리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브리티시 포뮬러 르노에 나가신다고 들었어요.”
“오, 어떻게 알았어?”
“여기저기 소문 다 났던데요. 윌리엄 코치님이 엄청 기대하신다고.”
“그래?”
“근데 이번에 르노 아카데미에서도 선수들을 내보낸다고 하네요.”
프랑스의 대형 자동차 메이커 르노가 운영하는 르노 포뮬러 아카데미. F1 경쟁이 치열해지자, 대형팀에선 주니어 포뮬러 팀까지 보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사가 운영하는 대회에 자회사 격인 아카데미가 참가하는 건 드문 일. 이례적인 일에 헨리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래서 이번 대회가 쉽지 않을 거예요. 르노 선수 중에 작년 알프스컵 우승자도 참가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음, 그렇구만. 근데 뭐 괜찮아. 우리 팀도 엄청난 녀석이 하나 들어왔네.”
걱정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의 윌리엄. 스메들리 팀의 선발전 결과를 설명하며, 선발 레이서들의 실력을 자랑했다.
“아하, 그래서 윌리엄이 그렇게 기대하신다고 소문이 난거구나. 진짜 저도 누군지 궁금한데요?”
그리고, 헨리의 반응을 살피던 윌리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헨리...”
“네, 말씀하세요 코치님.”
“이번 대회 우리팀 엔지니어 과장을 맡아 볼 생각없어?”
롭의 오랜 친구이자, 주니어 팀 레드불 레이싱 스쿨의 엔지니어 헨리 가슬리. 과장직을 맡기엔 나이가 어렸지만, 실력만큼은 윌리엄이 아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자네가 레드불 소속이긴 해도, F1팀도 아니고, 레이싱 스쿨이잖아. 게다가 엔지니어링 막내 생활하기가 얼마나 힘들어.”
“그렇긴 하죠...”
엔지니어과장이면 팀에서 엄청난 대우를 해준다. 게다가 아카데미 소속이 아닌 정식 포뮬러 팀의 엔지니어 책임자 자리. 제안을 들은 헨리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떄,
“어허, 마침 잘 왔구만.”
스메들리 레이싱 슈트를 입고 나타난 한 남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함께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외모가 인상 깊었다.
“어서 와, 아니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오늘도 누가 따라왔냐?”
조금 지겹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헨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둘 다 인사해. 여긴 헨리. 여긴 준하.”
“안녕, 난 헨리 가슬리. 네가 그렇게 빠르다며?”
헨리의 얼굴을 보고 굳어버린 서준하.
‘헤, 헨리 가슬리?’
전생 레드불 F1팀 최연소 엔지니어링 책임자, 헨리 가슬리가 서준하의 눈앞에 있었다.
< 네가 그렇게 빠르다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