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력도 없으면서 차 탓하는 애들이랑 달라 >
2010년 이후 F1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레드불 레이싱팀. 그들의 성공은 뛰어난 레이서들과 기술감독 덕분이라고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겐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헨리 가슬리.
“아, 그게 너였구나.”
“왜? 너 준하를 알아?”
“아니, 여기 오기 전에 잠깐 편의점에 들렸는데, 어떤 남자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못 지나가고 있더라고.”
롭의 집에 오기 전 무리에 둘러싸인 남자를 본 헨리. 다시 한번 서준하의 얼굴을 확인하며 목격담을 털어놨다.
“나는 또 어떤 젊은 뮤지션인가 했는데, 아직 포뮬러 데뷔도 안한 레이서였어?”
“영국에 온 지 얼마 안됐는데, 포뮬러 타는 것만 보고 벌써 팬이 생겼대.”
JHCD 한국팬들과 숙소 근처에서 만난 몇 명이 그 무리의 정체. 헨리의 말에 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나저나, 헨리. 아까 부탁한 제안은 차차 생각해보고 말해주게나.”
윌리엄이 웃으며 넌지시 말을 건네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헨리. 그 모습을 서준하가 포착했다.
“야, 헨리. 그냥 해라. 이번엔 나도 팀에 들어간다구.”
“롭, 너도?”
롭도 장난스럽게 헨리를 툭툭 건드렸다. 두 사람의 물음에 약간 당황한 듯한 헨리.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나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막내긴 해도 레드불이니까.”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헨리. 아무리 유소년 팀이라도 레드불에 있으면 훗날 더 큰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사항.
‘스카웃 제의를 했구나.’
헨리 같은 엔지니어가 옆에 있다면, 앞으로 대회 준비 걱정이 줄어든다. F1 무대에서 헨리는 원톱 영 엔지니어로 이름났었다.
‘지금부터 저 고집쟁이랑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면...’
레드불 유소년팀부터 커리어를 쌓은 헨리는 기어코 F1 팀 레드불 레이싱에서 성공한다. 레드불 소속에 대한 고집 때문에 전생의 수많은 스카웃 제의를 마다하기까지. 아직 젊은 헨리를 본 서준하에겐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헨리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긴 서준하.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때,
“준하! 빨리와 연습 뛰어야지.”
저 멀리 피트에서 누군가 서준하를 불렀다. 연습 주행을 시작하려는 모양. 그 모습을 확인한 서준하의 입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 맞아, 이제 연습 주행이 있었지.”
“그러네, 헨리 자리 옮기기 전에 한 바퀴만 보고 가게나.”
“오, 그럴까요?”
피트를 향해 걷는 서준하에게 손을 흔드는 롭과 윌리엄. 그들의 미소엔 뭔가 보여주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했다.
‘이래서 헨리를 여기로 불렀구나?’
***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선웨이 서킷을 질주하는 스메들리 포뮬러들.
“선두 포뮬러가 아까 그 선수야?”
“응, 서준하.”
“이야, 진짜 윌리엄이 기대할 만한데요?”
“그렇지?”
한 바퀴만 보고 가려던 스메들리 팀의 연습주행. 수십 바퀴가 넘어갈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연습 주행에 흥분한 헨리를 본 스메들리 부자가 환하게 웃었다.
“나 진짜 저런 드라이빙은 오랜만에 봐요. 레이서가 자기 생각에만 빠져있으면, 포뮬러가 혹사하는 법이거든.”
확실히 다른 포뮬러보다 빨리 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주행이 헨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무리해서 드라이빙을 안하는데도 제일 빠르네. 와씨, 20바퀴 동안 언더스티어 한 번 안나. 엔트리급 클래스가 아닌데?”
“오, 그래?”
“너도 알다시피 어린 애들 일수록 포뮬러를 막 다루잖아? 고장난 포뮬러는 바꾸면 그만인 기계 정도로 생각한다고... 건방지게.”
헨리에게 포뮬러는 아기와도 같이 소중히 다뤄야하는 존재였다. 헨리의 말에 맞장구 치는 롭. 헨리에게서 포뮬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다.
서킷에 정신이 팔린 헨리를 두고, 윌리엄을 옆으로 불렀다.
“이미 넘어온 것 같은데요?”
“반응이 좋긴 하네?”
“제가 뭐랬어요. 그냥 한 번 보여주는 게 훨씬 빠를 거랬잖아요.”
“계약서 가져올까?”
“하하, 잠깐만요. 아직 한 방 더 남았어요.”
웃는 얼굴로 헨리 옆에 다시 선 두 사람. 여전히 헨리는 넋을 놓고 서킷을 바라봤다.
“으흠, 헨리야. 준하는 모든 엔지니어가 좋아할 만한 레이서야. 네가 보던 레이서들이랑 다를 걸?”
“응?”
“실력도 없으면서 차 탓하는 애들이랑 달라. 이번 선발전에서도 아무런 불만도 없이 레이스를 마쳤어.”
흔히 레이서들은 부진한 성적의 원인을 포뮬러 카로 핑계댄다. 그 덕분에 열심히 차를 관리한 엔지니어들은 매번 죄를 지은 심정. 하지만 서준하는 달랐다.
“엔진 부품부터 휠 구석까지. 포뮬러에 대한 지식도 엄청나다고.”
“뭐? 포뮬러도 볼 줄 알아?”
일종의 개발자의 제작 환경을 잘 아는 기획자라고나 할까? 롭의 말을 들은 헨리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롭... 대회가 언제라고?”
***
“오늘은 어땠어? 계속 연습 하느라 좀 지쳐 보인다?”
연습 운전을 할수록 드라이빙 감각은 예리해졌지만, 서준하에겐 여전히 체력이 문제였다.
“계속 대회 연습이라 필립 대표님도 걱정하시더라고. 맛있는 것도 좀 사먹고 그러래.”
“맛있는 거요?”
“응.”
“근데 왜 여길 온 거예요?”
[MONKEY PUB]
한서윤을 노려본 서준하가 손을 치켜들어 간판을 가리켰다.
“벤버리에 마땅히 갈 데가 없잖아...? 이번 대회 끝나면, 런던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 호호.”
어색한 웃음을 지은 한서윤이 펍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철컥.
“오늘 소개해줄 사람도 있고. 좀 편한 데로 왔어.”
“오, 펍에 부를 정도면 남자친구?”
“남자친구는 무슨. 기다려봐, 좀 있으면 올 거야.”
F1 관련 인사를 펍에서 소개해줄 리는 없었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서준하.
“이번 대회 끝나면, 준하 선수 한국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알지?”
“한국?”
“자기 F1 홍보대사잖아. 잊었어?”
잊고 있었다. 그것도 새까맣게. 오로지 머릿속엔 대회 레이스 생각 뿐이었으니까.
“내가 처음에 홍보대사라는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한국에서 이미지 좀 괜찮은가 봐? 아직은 시간 있으니까 지금은 대회 준비에만 힘 써.”
“그래야죠.”
“그래도 준하 선수는 다행인 거야. F1에 가려면 언론 노출이 얼마나 중요한데. 레이싱 실력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모르면 팀에서 안 써줘요.”
실제로 여럿 봤다. 잘 나가는 팀의 대부분이 스타성 넘치는 레이서들. 마케팅에 모든 걸 퍼붓는 스폰 기업들은 이런 스타 선수들을 더 사랑했고, 그들을 콕핏에 앉혔다.
“아참, 그리고 저번에 교장 선생님 집에 간다고 내가 데려다줬잖아. 그때 준하 선수 내리고, 그 주변에 막 둘러싼 사람들 뭐였어? 나 깜짝 놀랐잖아.”
지난번 편의점 앞에서 만난 팬들을 본 모양. 한서윤이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왜 그렇게 여자들이 많아? 무슨 딴짓 하는 거 아니지?”
레이싱을 떠나 젊은 유학생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이성이라고 믿는 한서윤. 몇 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서준하를 보자 괜한 걱정이 앞섰다.
딸랑.
철컥.
몽키 펍의 문이 열리고 들어선 한 남자. 우락부락 건장한 체격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 왔다!”
한서윤이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자, 남자가 인사를 하며 서준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쪽이 우리 준하 선수.”
남자에게 서준하를 소개하는 한서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험상궂어 보였다. 특히나 남다른 승모근이 인상적.
“하하, 준하 선수 엄청 부담스러워하네.”
한서윤의 취향이 이런 쪽인줄은 몰랐다. 마초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지금 서준하의 앞에는 진짜 무섭게 생긴 상남자가 앉아 있었다.
“근데 누구...?”
“동식 씨라고 앞으로 준하 선수의...”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사나운 외모와 달리 남자는 다소곳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에서 특별히 준하 선수를 위해서 오신 분이야. 카트 탈 때부터 체력이 약했다며. 대표님이 특히나 체력관리에 신경 써달라고 하시더라고.”
영국 생활부터 아카데미 등록비까지. 첫 포뮬러 대회에 출전 소식을 들은 필립 황은 서준하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왜 그래? 생각했던 거보단 표정이 밝지 않네?”
“...그럼 퍼스널 트레이너신 거죠?”
“으응.”
벌써부터 개인 트레이너를 붙여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래도 조금 부담스러운 건 맞다. 전생에도 개인 트레이너와 훈련했지만, 그것도 F1 무대에 올라가서부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체력은 기본이고, 목근육을 확실히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F1은 목이 튼튼해야 하지않습니까? 충격에 견뎌야 하니까요. 자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의에 찬 선생님의 모습이 가장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저도 어릴적 꿈이 F1 레이서였습니다... 근데.”
자신은 덩치 때문에 맞는 시트가 없어 레이서의 길을 포기했다며 말을 꺼내는 동식 씨. 그러던 중 또 한 명의 손님이 테이블을 찾았다.
딸랑.
철컥.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몽키펍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롭이 서준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헤이, 버디!”
한서윤에게 윙크를 날리며 자리에 앉는 롭. 동식 씨 보곤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유쾌한 성격답게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네 사람이 모이자, 금세 시끄러워진 테이블. 타이밍을 살피던 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준하, 이번에 좀 상황이 안 좋아졌어.”
롭의 말에 순간 조용해진 테이블.
“주최측에서 이번에 특별히 새로운 룰을 적용했어. 기존이랑 다른 엔진인 F4R 엔진을 쓰겠대.”
“그러면 기어박스랑 포뮬러의 무게도 달라지는 거 아니야?”
“그렇지. 우리가 원래 연습했던 포뮬러랑 다른 조건으로 대회가 진행될 거래.”
엔진을 바꾼다는 건 거의 포뮬러 자체를 바꾸겠다는 얘기. 롭의 말을 들은 한서윤이 흥분했다. 반면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서준하.
“주최 측에서 미는 포뮬러 팀이 있는데, 걔네가 원래 그 엔진을 썼나 봐. 룰을 바꾼 이유가 걔네 때문인 거 같다고 소문이 자자해.”
이번 대회 이례적으로 참가하는 르노 아카데미 팀. 아마도 주최측도 자신의 회사 소속팀이 출전한 걸 고려해 바꾼 조치인 듯했다.
“그래 봤자, 이 클래스에선 준하 선수만큼 잘 타는 애는 없겠지, 뭐.”
확신에 찬 한서윤의 말에 롭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한데. 쥴리앙 디뉴라고 그 새로 출전하는 팀 에이스도 나온대. 걔는 좀 유명한 선수거든.”
롭의 마지막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준하였다.
“응? 준하가 이렇게 놀라는 건 처음이네.”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진짜 쥴리앙 디뉴가 나온다고?”
쥴리앙 디뉴. 전생의 마지막 F1 그랑프리에서 서준하와 크러쉬가 난 레드불 팀의 레이서였다.
< 실력도 없으면서 차 탓하는 애들이랑 달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