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또 서킷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잖아 >
“피트 스탑은 팀워크라고, 레이서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해. 자, 다시!”
경기 중, 차량이 피트(pit)로 들어와서 멈추어 섰다가 (stop) 다시 나가는 피트스탑. 일반적으로 경기 중인 레이싱 카의 타이어나 프론트 윙 등을 교체하기 위해 피트에 들어서는 행위다.
“이번 유로컵에선 적어도 무조건 한 번 피트 스탑을 하는 게 룰이니까, 우리도 준비 철저히 해서 가야 해.”
간단해 보이는 피트 스탑은 생각보다 굉장한 훈련을 요하는 일. 타이어와 휠건을 손에 쥔 4명의 미캐닉들이 헨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우우웅.
스윽.
툭.
트랙에서 피트인 하는 서준하의 포뮬러. 지정된 스탑 장소로 매끄럽게 멈췄다.
“차는 잘 멈췄고! 자, 미캐닉 붙어!”
피트 스탑은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생명. 0.1초를 다투는 레이스에서 피트 스탑이 늦어진다면, 레이스 순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이이잉.
툭.
“같은 조끼리 호흡이 잘 맞아야 해. 한 명이 휠 넛 풀면, 옆 사람은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타이어 빼내고, 그 다음 사람은...”
피트 스탑의 대부분은 부드럽고 재빨리 닳는 소재인 타이어를 교체하는 일.
“오케이! 타이어 바꿨으면 다시 포뮬러 내려놓고, 롤리팝 맨! 레이서한테 출발 신호!”
타이어 교체를 마친 미캐닉 한 명이 포뮬러 옆면을 두드리자, 레이서 서준하가 곧바로 출발했다.
부우우우웅,
휑.
“10초 876!!!”
스톱워치를 손에 든 헨리가 타임을 확인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헬멧을 벗고 기뻐하는 미캐닉들.
부우웅,
두두둥,
툭.
다시 피트로 복귀한 서준하가 스톱워치를 들고 싱글벙글인 헨리를 향해 물었다.
“몇 초야?”
“처음보다 3초나 빨라졌어. 이 정도면 훌륭해!”
F1의 경우, 미캐닉 18명의 타이어 교체 시간은 평균 2초 대. 전생 자신의 F1팀 최고 기록으로 1.88초까지 세웠던 서준하. 엔트리급 레벨에서 미캐닉 4명의 기록치고는 꽤 빠른 편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윌슨이 정말 잘 따라와줬어. 처음에는 너트 푸는 데 엄청 오래 걸렸는데 말이야.”
실수를 연발했던 미캐닉 한 명을 격려하는 헨리. 경험이 가장 부족한 미캐닉 윌슨이 연습마다 가장 불안한 모습을 보였었지만, 몇 차례 연습 끝에 발전하는 모습에 만족스러웠다.
“떨리고 걱정되는 건 당연해. 나도 처음 미캐닉으로 일 했을 땐 그랬으니까.”
윌슨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헨리. 다소 냉철한 성격이지만, 연습 막바지 팀원들 앞에선 한없이 따뜻한 엔지니어링 책임자였다.
“넵! 감사합니다, 과장님!”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단 한 명의 실수로 누군가 위험한 상황을 겪을 수 있는 모터 레이싱. 그만큼 피트 분위기와 팀원 간 위계가 엄격했다.
“바로 피드백 타임을 갖자. 미캐닉 전부 모여봐.”
하지만 그런 엄격함 속에서 언제나 말 못할 불만이 생기기 마련. 이를 잘 아는 헨리는 잦은 피드백 시간을 갖으며 팀원들과 소통했다.
‘헨리가 성공하는덴 다 이유가 있다니까?’
포뮬러에서 내린 서준하가 헨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준하아아아아아아!”
연습 주행을 위해 스메들리 피트 밖으로 나온 서준하. 준비 운동을 하며 몸을 풀던 사이 그를 발견한 팬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야, 저기 좀 어떻게 해 봐. 관심 가져주는 건 좋은데, 왜 만날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어우.”
선웨이 서킷 바깥으로 몰려든 인파. 여성팬만이 아니라 제법 다양한 연령층이 서준하를 응원하고 있었다.
“준하 팬만 있는 건 아닌 듯한데?”
관중석 구석, 스메들리의 새로운 레이서 닐 앨런을 응원하는 팬들. 헨리가 덴마크 국기를 흔드는 여성들을 가리켰다.
“어?”
그의 말에 인파들 틈을 살피던 롭. 관중석 중간 익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보였다.
“저 사람...”
반짝하고 빛나는 대머리와 함께 어딘가 낯익은 얼굴. 자리에서 일어난 롭이 관중석으로 다가서려 했다.
“야, 롭. 진행 안 해?”
“어, 어.”
헨리가 그를 불러 세우자, 롭은 무언가 아쉽다는 듯 레이서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레이서들 앞으로 다가선 롭 스메들리.
“자, 오전에는 피트 스탑 훈련이었니까, 레이서들은 힘들지 않았지?”
콕핏은 소프트한 고급 가죽시트가 아닌, 비좁고 딱딱한 석고 시트. 잠깐만 앉아 있어도 운전자의 하체에 피가 안 통한다. 롭의 말에 레이서들이 고개를 떨궜다.
“좋아, 다들 그렇다는 눈치네. 자 그러면 오후에는 파이론 주행이다.”
트랙 위에 콘을 세워두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파이론 주행. 롭이 선웨이 서킷 위에 올려진 콘을 가리켰다.
“내가 또 서킷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잖아. 저기 보이는 콘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돌아야 해. 선웨이 서킷은 이제 지겹지?”
서킷 위에 놓인 콘들이 완만한 코너를 좀 더 좁게, 직선 주로는 지그재그와 같은 변칙을 만들었다.
“특히 저기 5코너 조심하라고. 저기는 포뮬러 한 대도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으니까. 무리하다가 스핀해선 안 돼. 프론트 윙 하나에 얼만지 알지?”
작은 부품 하나에도 몇 백만원을 넘나드는 포뮬러. 롭이 5코너를 가리키며 레이서들에게 당부했다.
“근데 롭, 이런 건 아카데미 레벨에서 하는 거 아니에요? 이래 봬도 우리 유로컵 나가는 레이선데...”
“맞습니다. 게다가 트랙이 좁아도, 별로 어려울 것도 없잖아요? 아예 못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축구로 치면 기본기를 다지는 드리블 연습 격인 파이론 주행. 닐과 다니엘이 시시하다며 불평했다.
“나도 알아. 근데 누가 여길 천천히 돌라고 했나?”
롭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레이서들. 그리고,
“랩은 총 열 바퀴. 여기서 베스트 랩을 만든 사람이 메인레이서가 된다.”
“에?!”
대회 출전하는 레이서들은 메인과 서브로 나뉜다. 대회 모든 우선권은 메인 레이서에게 있는데, 만약 같은 팀 레이서가 선두권 경쟁을 할 경우, 메인 레이서가 먼저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F1에선 서브 레이서가 우승을 코 앞에 둔 상황이라도 서브 레이서에게 뒤늦게 들어오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
“갑작스럽긴 해도 코치진끼리 전부 합의해서 내린 결정이야. 날 너무 무섭게 보진 말아줘.”
하루 빨리 레이서 간 서열이 정해져야 대회까지 팀워크를 끌어올릴 수 있는 상황. 팀 내 메인 레이서 타이틀이 걸리자, 선수들 얼굴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참, 그리고 한 가지 깜빡했다.”
자신들의 포뮬러로 걸어가는 선수들을 불러세운 롭. 비장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만약 콘이 하나라도 넘어지면, 그 자리에서 끝이야.”
***
파이론 주행의 첫 번째 주자 다니엘. 트랙 탐색를 위해 2바퀴를 천천히 돌고는 속도를 올리며 3랩에 접어들었다.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끼이이이익.
툭.
“야 윌슨, 적색기 흔들어.”
속도가 오르자마자, 콘을 쓰러뜨린 다니엘. 5코너 진입 전 좁은 입구에서 트랙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두두두둥.
웅.
적색기를 보고 피트로 복귀한 다니엘. 스메들리에서 가장 경험 많은 그가 고작 3랩만에 멈춘 상황에 팀원들이 당황했다.
“48초 621. 아까 뭐 아카데미 레벨 어쩌구 하더니. 연습 더 해야겠지?”
씁쓸한 표정과 함께 포뮬러에서 내려오는 다니엘. 랩타임을 듣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 다음. 닐 앨런.”
제작년 포뮬러 포드 북유럽컵 우승자이자, 이번 유로컵 우승을 위해 새로 영입한 공격적인 레이서 닐. 자신있는 얼굴로 포뮬러에 올라탔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안정적인 출발 이후 무리하지 않고, 서행하는 닐. 초반 변칙 서킷의 탐색을 시작한 닐이 이어진 3랩에서 속도를 높였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휑.
“오, 벌써 적응했나 봐?”
스타트 라인을 빠져나온 포뮬러를 가리키는 롭. 그리고는 서준하를 한번 흘겨보고는 툭 한마디 내뱉었다.
“경쟁자가 나타난 거 같은데?”
그리고는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하는 닐. 좁은 코너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직선 주로에선 고속으로 달리는 과감한 주행을 선보였다.
연이은 나이스 드라이빙에 팀원들 사이에선 감탄사가 나오기까지. 감을 잡았는지, 다시 한 번 변칙 주로에서 화려한 롤링을 보이는 닐의 포뮬러.
“오, 여기서 더 빨리 달리겠다고?”
그런데,
부우우웅.
위이이잉.
휑.
기세 좋게 5코너에 진입한 닐의 포뮬러가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그대로 콘을 쓰러뜨렸다.
-OH FUXX!
무전으로 들려오는 절규. 롭이 윌슨을 내보내자, 잠시 후 서킷 위로 적색기가 휘날렸다.
곧이어 피트로 돌아온 닐.
“롭, 이건 애초에 불가능 해요! 5코너 진입에서 속도가 다 떨어져요!”
“맞아요, 트랙이 좀 이상하네요.”
말도 안된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롭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는 닐. 옆에선 다니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킷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털어놨다.
“...45초 817. 닐 이게 네 기록이야. 자, 다음.”
아무런 대꾸없이 닐의 베스트 타임을 알리는 롭. 이어서 서준하를 불러 세웠다.
***
부우우우우.
위이이이잉.
초반 변칙 서킷 탐색을 시작한 서준하. 앞선 선수들의 말처럼 서킷은 일정 속도 이상 속도를 올릴 수 없는 구조였다.
‘5코너가 좁긴하네. 여기서 속도가 다 떨어져.’
특히나 5코너. 빠른 속도로 진입하다간 무조건 콘을 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계속해서 느릿느릿 서킷을 도는 서준하의 포뮬러. 어느덧 주어진 기회의 반을 다 사용하고는 다시 스타트라인으로 들어왔다.
“47초 992. 거북이야?”
베스트 랩타임은커녕 기록이 점점 떨어지는 서준하. 랩타임을 체크하는 팀의 속이 타들어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새로운 걸 시도해 볼까?’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어이서 그의 머릿속으로 변형 서킷의 이미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끼이이이익.
유일하게 넓은 코너에 다가선 서준하. 타이어를 미끄러뜨리며 턴 인(turn in)했다.
“준하, 쟤 왜 저래. 타이어에 연기 좀 봐! 뒷타이어가 계속 미끄러지는데?”
그의 돌발행동에 술렁거리는 스메들리 피트.
수웅.
휑.
다시 스타트라인으로 들어온 포뮬러. 하지만 랩타임은 여전히 빨라지지 않았다.
‘하도 오래 됐더니, 한 방에 안 되네. 다시!’
그리고 다시 한번 넓은 코너로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는 진입하는 서준하. 그리고, 끼이이이익.
휑.
코너를 돌며 악셀을 끝까지 밟자, 포뮬러의 뒷바퀴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옆으로 꺾이는 차의 바디(body).
“저건 또 뭐하는 거야?!”
반복적으로 포뮬러를 미끄러뜨리는 모습을 본 팀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턴 인, 드리프트, 유지 그리고 마무리. 이거였지?’
한바퀴를 돌아, 다시 새로운 랩을 시작하는 서준하. 스타트라인에 들어서자, 전과 다른 배기음이 스메들리 피트로 울려퍼졌다.
“빨라졌어!”
이제는 더 이상 넓은 코너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며 코너링하는 포뮬러. 본격적으로 기록을 세우기 위해 달리는 듯 보였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모두가 마음을 졸이는 가운데, 서준하의 포뮬러가 5코너에 진입하려 했다.
“왔다, 5코너!”
“근데 속도가 너무 빨라! 저렇게 진입하다간 바로 게임 오버야!”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 가운데, 포뮬러의 뒷 타이어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끼이이이이이이이익.
바당 다다다다.
차체가 비틀어진 채 좁은 5코너를 도는 포뮬러카.
“...!!!”
코너 진입 직전 반대쪽으로 스티어링 휠을 꺾어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서준하. 차체 방향을 재빠르게 회전시켜 급감속 없이 코너링에 성공했다.
“스칸디나비안 플릭(Scandinavian Flick)!!!”
드리프트 레이서에게서나 볼 법한 환상적인 테크닉을 선보이자,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롭 스메들리.
“그래! 이거지!!!”
미끄러진 타이어가 만든 엄청난 연기 속에서 서준하의 포뮬러가 빠져나왔다.
-롭! 이건 드리프트 서킷이잖아!
직선 주로에 오른 서준하. 흥분한 목소리로 피트에 무전을 날렸다.
< 내가 또 서킷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잖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