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나이에 유명세를 얻은 레이서일수록 조심할 게 많은 법이죠 >
“레이싱 드라이버 맞아? 무슨, 포뮬러카를 테크니션 카처럼 몰아!”
파이론 연습 주행을 지켜보는 관중들.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운전자가 서준하 맞아? 진짜 랠리 드라이버처럼 드리프트를 하는데?”
구불구불한 고갯길이나 변칙 트랙에서 경주를 벌이는 랠리 레이싱. 그곳에서나 볼 법한 드리프트 테크닉에 팬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끼이이이익.
바당 바다다다다!
연속되는 드리프트 탓에 연기가 자욱해진 선웨이 서킷. 연기 속 서준하의 포뮬러가 드리프트를 통해 좁은 코너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42초 122! 베스트 랩! 페스티스트다. 이제 마지막 한 바퀴!”
좁은 코너에서 드리프팅에 성공하며 랩타임을 단축한 서준하. 롭이 무전으로 마지막 랩을 알렸다.
-롭, 타이어 전부 써도 괜찮지?
애초부터 타이어를 험하게 쓰지 않으면, 속도를 살리기 어려운 서킷 구조. 서준하의 요청에 롭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부우우우우웅.
변칙 코너를 통과한 포뮬러. 재빠르게 속도를 높이며 좁은 코너로 진입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단숨에 클러치를 밟았다가 떼자, 엔진 회전수가 급격히 올라갔다. 그리고, 끼이이이익.
슈우우우웅.
엄청난 토크가 전달되자, 뒷타이어가 헛돌며 미끄러졌다. 그대로 차체가 비틀어지며 완벽하게 좁은 코너를 도는 경주차.
“와아아아아아!”
랩타임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맘먹은 마지막 바퀴. 연속적으로 좀 더 깊숙한 드리프트를 구사하자 팬들이 열광했다.
“저 실력이면 WRC(세계랠리선수권대회)에 나가도 되겠어. 포뮬러가 예민한 차라서 컨트롤이 어려울 텐데. 진짜 대단하다!”
랩타임 기록을 세운 서준하. 본격적으로 팬들 위한 쇼를 벌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슈우웅.
우우우우우웅.
색다른 포뮬러의 모습에 팬들은 물론 팀 전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혼자만 불편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는 남자.
“갖은 폼은 다 잡는구만, 그래.”
인상을 찡그리던 남자가 못 봐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놈들일수록 레이싱을 우습게 생각하는 법이지.”
***
똑똑.
“윌리엄, 손님이 오셨어요.”
아카데미 교장실 안. 직원의 노크에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일찍 왔구만!”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60대 노인. 창가로 쏟아진 햇살에 민머리가 반짝하고 빛났다.
“오랜만이네, 윌리엄. 잘 지냈는가?”
윌리엄과 인사를 나누는 프랭크. 안부를 나눈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선웨이는 여전하더구만. 언제나 열기가 넘쳐!”
“오, 그래? 서킷에 먼저 갔다왔나 보지?”
“좀 일찍 도착해서 여기저기 둘러봤지. 옛날 생각 많이 나더라고.”
“그래? 하하하.”
젊은 시절 윌리엄의 동료였던 프랭크 키턴. 안부 인사를 나누며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소감을 털어놨다.
“좀 더 일찍 부를 걸 그랬구만. 좀전에 스메들리 팀 연습주행이 있었거든.”
“아아, 이미 봤네. 엔진음이 쩌렁쩌렁한데, 내가 거길 안 가봤겠나? 허허.”
“아, 그래? 어떻던가, 자네 맘에 좀 들어?”
메인 레이서 선발전이 있다고 보고받은 윌리엄. 선수 모두 전력을 다했을 것이 분명한 터라, 이를 본 프랭크의 반응이 궁금했다.
“다들 실력 있는 레이서더구만, 나쁘지 않아.”
“오, 그래? 프랭크,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말 더 확신이 생기는 구만.”
“내가 뭘, 허허. 그나저나 왜 이리로 날 불렀나?”
며칠 전 아카데미로 찾아와 달라는 윌리엄의 부탁. 은퇴 후 오랜 기간 안부 정도만 묻고 지내덨터라 친구의 의도가 궁금했다.
“아, 그게. 이번에 우리 팀이 유로컵에 출전할 생각이네.”
“그래? 축하하네. 르노 2.0L 말하는 거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유로컵 일정과 함께 대회 내용을 설명하는 윌리엄.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이번에 우리 팀을 데리고 유로컵에 나가보지 않겠나?”
갑작스런 요청에 다소 놀란 듯한 프랭크. 대회 일정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감독직 제안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만, 지금 우리 스메들리 팀이...”
아카데미의 사정과 함께 자신의 대회 출전 불가 사유를 털어놓는 윌리엄.
“프랭크, 자네는 감독직에만 있어주면 돼. 크게 머리 싸멜 필요 없어. 이미 팀 체계는 잘 갖춰져 있으니까, 특히나 레이서들 실력이 뛰어나. 이번 브리티시컵에서 우승한 레이서도 출전하기로 했어.”
“흐음...”
빚지는 걸 싫어하는 윌리엄의 성격상 이런 부탁을 잘 안하는 친구였다. 깊은 생각에 잠긴 프랭크. 재차 묻는 윌리엄의 말에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솔직하게 말하겠네. 사실 아까 팀 연습 주행을 보고 조금...”
윌리엄의 시선을 피하는 프랭크. 오랜 친구의 얼굴을 봐서라도 흔쾌히 승낙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내 감독직을 맡은 미래를 상상해보니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 레이서들이 테크닉은 좋은데...”
윌리엄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에 빠진 프랭크. 연습 주행을 본 자신의 소감을 말했다.
“아직 어린 애들이지?”
“그렇지, 아직 20살도 안 된 젊은 드라이버들이네. 왜, 뭐 때문에?”
특히나 마지막 타이어를 과도하게 쓰는 듯한 서준하의 드리프트 쇼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리 팀 첫인상이 좋진 않았구만...”
“내가 섣부르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네. 아무튼 내 좀 더 고민해보고 연락주겠네.”
인사를 나누고 교장실을 빠져나간 프랭크. 영문을 모르는 윌리엄이 고개를 흔들었다.
***
탁.
맥주와 함께 음료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는 한서윤. 서준하가 자연스럽게 맥주잔을 가져가려 하자, 손바닥으로 그 팔을 내리쳤다.
“벤버리에서 여기 맥주맛이 제일 좋다니까. 크아아아.”
롭과 짠을 한 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는 한서윤. 그 모습을 서준하는 부러운 듯 바라봤다.
“아참, 이번 대회에 윌리엄은 같이 안 간다며?”
“응, 지금 준비 기간도 그렇고, 아카데미 때문에 거의 신경을 못 쓰셔.”
“그래? 그러면 감독 없이 대회에 나가는 거야?”
걱정스런 표정으로 롭을 바라보는 한서윤.
“아니,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예전 동료분한테 감독직을 부탁하셨대. 아직 확정은 아닌데, 아마 그 분이 하시지 않을까 싶네.”
“오, 새로운 감독님? 넌 어떤 분인지 알아?”
새로운 감독 소식에 서준하도 궁금한 표정으로 롭을 바라봤다.
“천재 레이서. 롭 스메들리의...”
“야 됐어. 그런 거면 안 들을래.”
“아니, 끝까지 들어 봐. 나랑 진짜 관련 있다니까!”
말하기 앞서 신난 롭을 보고는 한서윤이 귀를 막았다.
“내가 GP2 리그에서 포뮬러 탈 때 우리 팀 감독님이셨어.”
자신의 GP2 시절 레이싱 스토리를 늘어 놓는 롭. 처음 듣는 얘기에 서준하도 흥미롭단 반응을 보였다.
“물론 GP2까지 간 건 내 천재적인 레이싱 테크닉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감독님 디렉션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지.”
F1 리그의 문턱에 선 레이서들의 무대, GP2. 롭의 자부심처럼 F1 만큼이나 입성하기 어려운 클래스의 리그였다. 그런 곳의 감독이나 레이서였다면, 정말 엄청난 실력자들이 분명하다.
“작전이면 작전, 엔지니어링이면 엔지니어링. 게다가 에어로다이내믹(공기역학)쪽까지 능통한 실력자야. 포뮬러를 직접 제작해서 경주하는 GP2 클래스에서는 진짜 이런 사람이 드물어.”
상위 포뮬러 리그로 갈수록 팀은 더욱 세분화되고 복잡해진다. 때문에 아무리 총감독이라도 모든 분야에 밝기란 어려운 일. 하지만 프랭크 키턴은 전분야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감독이었다.
“오, 말만 들어도 엄청 기대되는데? 쟤 얼굴 좀 봐.”
롭을 가리키는 한서윤. 레이스 때나 볼 수 있는 진지한 표정이 롭의 얼굴에 드러났다.
“음, 근데...”
그리고 다시 무언갈 말하길 망설이는 롭.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가라 앉았다.
***
-나, 나 낫띵 온 유 베이베, 낫띵 온유 베이비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스메들리 게러지. 인기 팝송이 게러지 안에 울려퍼졌다.
“오늘 무슨 날이야? 팀 전체가 이렇게 다 모이는 건 처음이네.”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는 스메들리 팀원들. 윌리엄의 지시로 팀 전체가 게러지로 모여 들었다.
“근데 코리안은 어디갔어?”
“아까 좀 늦는다고 연락 왔어. 사정이 생겼대.”
게러지 주위를 둘러보는 팀 레이서들. 아카데미 직원부터 포뮬러 팀 미캐닉까지. 스메들리 소속 전원이 게러지로 모여들었다.
터벅 터벅.
잠시 후, 게러지 문 앞에 마련된 테이블로 윌리엄과 한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어우, 눈 부셔. 푸흡.”
“누구지?”
테이블 위 내려온 실내 조명에 팀원들이 처음 보는 남자의 머리가 반짝였다.
“다들 대회 준비로 바쁠 텐데, 이렇게 모이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직원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 받은 윌리엄이 팀원들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 여러분께 새로운 팀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다들 인사 나누세요. 스메들리 포뮬러 팀의 새로운 감독, 프랭크 키턴입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어리둥절해 하는 팀원들. 반면, 프랭크를 알아 본 몇몇 스태프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프랭크 키턴입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프랭크가 진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런데,
“으흠. 잠깐 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만...”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는 프랭크. 그리고는 손을 뻗어 스피커를 가리켰다.
“원래 게러지에서 이렇게 음악을 트나요? 잠깐 좀 꺼주기 바랍니다.”
누군가 스피커 쪽으로 다가갔고, 곧 음악이 꺼졌다. 그 모습에 팀원들 몇 명이 수군거리며 은근히 불만을 드러냈다.
“윌리엄의 부탁으로 오늘부터 스메들리 팀은 제가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이전의 팀에 적용된 규칙들은 전부 잊어줬으면 좋겠군요. 앞으론 게러지에서 음악을 틀지 말아주세요.”
강경한 어조를 띈 그의 말에 순식간에 게러지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제가 메가폰을 쥔 이상, 이번 유로컵 목표는 우승입니다. 저는...”
묵직한 어조로 자신의 목표와 함께 자신의 배경을 설명하는 프랭크. 한 차례 망설임없는 그의 모습에 팀원들 모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레이서에 대해 얘길 좀 나누죠.”
자리에서 일어난 프랭크. 잠깐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며 레이서들을 바라봤다.
“이번에 메인과 서브 레이서들을 나눴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레이서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메인 레이서 자리를 다시 정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갑작스럽게 통보해서 미안하지만, 이미 윌리엄과 사전에 얘기한 내용입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한번 얘기하죠.”
레이서 얘기에 여기저기 웅성이며 혼란스러워 하는 팀원들. 한편 서브 레이서 다니엘과 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프랭크가 다시 한번 무언가를 말하려하자, 누군가 적막을 깨고 들어왔다.
철컥.
남자의 얼굴을 살피던 프랭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기, 지금 온 건가요?”
문을 들고 들어온 남자는 파이론 주행에서의 쇼맨십을 펼친 마지막 레이서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 떠오른 듯한 프랭크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어린 나이에 유명세를 얻은 레이서일수록 조심할 게 많은 법이죠. 저는 돈과 실력만 있다고 아무나 포뮬러에 태우지 않습니다.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게 많지 않겠어요?”
직설적인 발언에 제대로 얼어버린 스메들리 팀. 그 말을 들은 서준하도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경고합니다. 다음부턴 늦지 않도록 하세요.”
사실 준하가 놀란 건 프랭크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프랭크 선생님이잖아...!’
전생 자신에게 처음 카트를 가르쳤던 프랭크 키턴. 이제는 머리가 다 벗겨진 노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린 나이에 유명세를 얻은 레이서일수록 조심할 게 많은 법이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