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유독 레이서에게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간단해 >
선웨이를 벗어나 모두에게 생소한 스네트 서킷으로 온 스메들리 팀.
“이렇게 팀원 전체가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네, 대회 때 말고는 이런 일이 잘 없잖아.”
선웨이를 벗어나 소풍 온 기분이 든 팀원들. 반복되는 훈련 탓에 지겨웠는지 새로운 훈련장에선 다들 얼굴이 밝았다.
“오전에 저거로 트랙 탐사하고, 오후에 시동걸면 딱 맞겠다. 기온도 딱 적당하고.”
스네트 서킷은 꽤 넓고 긴 코스였다. 스메들리 레이서들이 서킷 오피스 옆에 놓인 자전거를 가리키며 수다를 떨었다.
“크고 좋네.”
서준하도 처음 밟는 새로운 서킷. 오랜만에 런던 외곽으로 나오니 공기 마저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저마다 오늘 훈련에 기대를 거는 가운데, 터벅 터벅.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레이싱 슈트 차림의 영국인 한 명. 스메들리 소속이 아닌 레이서가 피트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또 다른 낯선 남자가 그 뒤를 따라오는 상황.
“한 명 더 있는데? SC 드라이번가?”
일반적으로 대형 서킷에는 자체적으로 세이프티카(SC)를 운영한다. 팀 레이서들에겐 이들 모두 서킷의 관리 드라이버처럼 보였다.
레이서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순간, 타이밍 듣게 등장한 롭. 확성기를 들어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자, 전원 피트 앞으로 모여주세요.”
인원이 한데 모일수록 말은 많아지는 법. 다시 한 번 팀원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어서 롭의 옆으로 등장한 프랭크. 그의 등장으로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포뮬러카부터 시작해 엔지니어링 장비까지. 팀 전체가 이동하는 것일 자체가 부담스러운일. 프랭크 감독이 미캐닉들을 격려하며 말을 시작했다.
“아마 다들 스네트 서킷은 처음일 거야. 하지만 유로컵을 앞두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연습을 가질 필요가 있네.”
유로컵 대회 장소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 유럽 전체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번 대회에서 대부분의 서킷이 선수들에겐 새로운 환경. 대회를 앞두고 팀원들의 적응력을 기르기 위해 프랭크가 이곳을 택했다.
스네트 서킷에 대해 설명하던 프랭크가 다시 한 번 팀 전체를 주목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비장한 표정으로 팀원 전체를 바라보는 프랭크.
“오늘 여기서 유로컵에 나갈 메인 레이서를 정한다.”
술렁이는 스메들리 팀.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랭크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정정. 메인 레이서를 정한다는 표현보다는 대회에 출전할 레이서를 새로 뽑겠다는 게 맞겠구만.”
선발전 소식에 스메들리 팀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대회를 앞둔 상황에 받아 들이기 힘든 말이었지만, 감독의 카리스마 앞에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긴 에릭과 벤이다. 다들 인사들 나눠.”
프랭크가 누군가에게 손짓하자, 낯선 두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오늘 같이 테스트 레이스를 하게 될 예비 레이서들이네.”
연이은 깜짝 발표에 레이서 모두 당황한 표정.
“대회 출전 레이서는 총 3명. 레이서 모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레이서들을 바라본 프랭크가 마지막 말을 건네고 사라졌다.
***
“서킷이 엄청 넓네요.”
“코스가 까다롭진 않아서 다행인데. 처음 타는 곳인데, 괜찮을까?”
“후... 그래도 좁은 곳 보단 낫잖아?”
롭과 함께 트랙을 탐사한 레이서들. 자전거에서 내린 다니엘이 서킷을 한 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롭, 너는 알고 있었지?”
서킷 바깥쪽으로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는 레이서들 가운데 가장 자리에 앉은 서준하가 롭을 향해 물었다.
“저번에 말 안 해줬나? 원래 저런 아저씨라니까. 나도 현역 때 감독님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자신의 과거 스토리를 풀어내는 롭. 서준하 역시 과거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지, 원래 저런...’
전생 서준하의 유소년 카트 팀 드라이빙 코치이자, 아카데미 교육자였던 프랭크는 레이서들 사이에서 열성을 넘어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그때만큼 고통스러웠던 적이 드물었는데...’
하루는 주니어 카트 대회를 앞두고, 프랭크의 지도 아래 연습 레이스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날 팀 레이서 3명이 레코드라인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자, 프랭크는 모두가 레코드라인을 밟을 때까지 레이스를 계속 시켰다. 그후 레이서 모두 새벽 3시가 돼서야 트랙에서 나왔고, 전원 탈진하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말이 웰 던(well done, 잘 했어)이랬나.’
프랭크가 했던 말이다. 이런 느슨한 칭찬 때문에 레이서의 기가 빠지고, 모터스포츠가 쇠퇴한다고 늘 강조하던 사람. 그런 그를 스메들리에서 다시 보게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오랜만에 나도 긴장되네.’
스네트 서킷은 처음이었고, 새로운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혹독했던 기억까지 떠오르니 살짝 긴장되기까지.
‘아직 뭐가 더 남아도 한참 더 남았지.’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머리 하나. 서준하의 눈에 저 멀리 피트 근처로 프랭크가 보였다.
***
오전 시간 정비와 탐사를 마친 스메들리 팀. 다시 한 번 피트 앞으로 정렬했다.
“오전에 발표한 내용 때문에 여기저기 잡음이 많은 것 같더구만.”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입을 열기 시작한 프랭크.
“내가 유독 레이서에게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간단해.”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그에게로 집중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포뮬러 르노 유로컵은 원메이커 경기라는 거야. 여기서 우승하려면,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무엇보다 레이서의 실력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프랭크. 불만 가득한 표정의 기존 레이서들을 향해 고갤 돌렸다.
“팀 모두를 위한 결정이야. 개인적인 감정 따윈 없네.”
프랭크의 말이 맞다. 포뮬러, 부품, 장비 등이 모두 동일하게 규정된 유로컵에선 실력 있는 레이서를 보유한 팀만이 우승할 수 있다.
잠시 조용해진 스메들리 팀. 몇몇 코치들이 그의 말에 고갤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오후 테스트 레이스 시작하지.”
경기 규칙을 설명하던 프랭크. 말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레이스 방식은 타깃 트라이얼(target trial). 목표 타킷은 1분 30초, 메인 드라이버는 타킷에 먼저 도달한 사람이 될 거야.”
지정된 특정 랩타임에 얼마만큼 근접하느냐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는 타깃 트라이얼. 타임 트라이얼이 아닌 색다른 방식에 팀이 다시 술렁거렸다.
“감독님, 1분 30초는 너무 빨라요.”
“맞습니다, 그건 여기 페스티스트 랩이랑 비슷한데...”
타깃 목표를 서킷의 페스티스트 랩으로 설정한 프랭크.
“제한 시간은 없다. 다만, 목표 기록에 도달하지 못하는 레이서는 그대로 아웃. 대회에 못 나가.”
이어지는 프랭크의 말에 가장 놀란 건 레이서들이었다. 목표를 넘어서지 못하면 대회에 안 내보낸다는 말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타이어 교체는 불가능하네.”
프랭크의 마지막 말에 가장 움찔한 사람은 서준하였다. 이어서 전생의 혹독했던 기억이 다시 떠밀려왔다.
***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슈웅.
테스트 레이스가 시작된 스네트 서킷. 5대의 포뮬러가 쏟아내는 배기음이 곳곳에 울려퍼졌다.
“다들 초반부터 미친 듯이 달리는데?”
피트 안에 설치된 서킷 상황판. 각 포뮬러들의 위치가 스크린 위에 표시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스메들리 레이스 엔지니어들.
“시작부터 속도를 안 높였다간, 대회에 못 나가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이어가 못 버틸 테니까.”
제한 시간이 없다고 여유를 부리다간, 절대 타깃 랩타임에 도달하지 못한다. 랩을 돌면 돌수록 타이어는 닳게 돼있으니까.
“그렇지. 지금 다들 머리가 새까말거야.”
레이스 초반, 저마다 자신들의 생각을 쏟아내는 엔지니어들. 지켜 보던 롭도 한마디 던졌다.
“데이터도 없는 새로운 서킷에... 실력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경쟁자들까지... 와, 레이서들 진짜 머리 아프겠는데.”
간단한 인사를 나누긴 했어도, 스메들리 팀 모두 에릭과 벤의 주행을 본 적 없다. 메인 레이서 한 자리를 두고 어느 누구도 섣불리 결과를 예측하지 못 하는 상황.
“지금 몇 바퀴 째지?”
서킷을 바라보던 프랭크가 엔지니어들에게 다가와 선수들의 랩 타임을 물었다. 신속하게 움직여 서킷 데이터로거의 타임 로그를 출력한 롭.
[TEST TARGET TRIAL]
[NO / 이름 / 랩 / 베스트타임]
[1. 닐 / 12 / 1분 35.232초]
[2. 에릭 / 14 / 1분 36.096초]
[3. 벤 / 13 / 1분 37.643초]
[4. 다니엘 / 12 / 1분 37.110초]
[5. 준하 / 7 / 1분 42.602초]
타임 로그를 살피는 프랭크.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출력지를 놓고 사라졌다.
“오, 닐이 타킷에 가장 가까워. 12바퀴 만에 35초대야.”
“아직 초반이긴 한데, 다들 속도를 높인 보람이 있네.”
출력지를 집어든 엔지니어들. 다소 긍정적으로 랩타임을 읽어 내려갔다.
“엥? 준하가 꼴지?”
“게다가 혼자만 40초 대야.”
서킷을 바라보던 롭. 서준하의 이름이 들리자, 롭도 출력지를 살폈다.
[5. 준하 / 7 / 1분 42.602초]
“차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닙니까?”
“아냐, 그런 연락은 없었어. 다들 포뮬러엔 이상 없어.”
정말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롭이 다시 출력지를 유심히 살폈다.
‘아니야, 아직 완주 횟수가 적어.’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 인상을 찌푸리는 롭. 자신이 서 있는 피트 앞으로 뜨문뜨문 지나갔던 서준하의 포뮬러가 떠올랐다.
“이러다 준하가 메인 자리 뺏기는 거 아닙니까?”
“메인은커녕 저런 랩타임으론 대회도 못 나가.”
“준하가 갑자기 왜 저러지. 이거 옛날 선발전 생각나네요.”
레이스 엔지너어 맬릭과 막내 아론. 두 사람의 호들갑에 피트가 다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혼자 심각한 롭. 자리를 옮겨 서준하 개인의 데이터 로그를 살폈다.
‘1랩은 완전 기어갔고, 2랩에 어택 그리고 3,4랩에 쿨링. 다시 5랩에 어택, 이어서 두 랩 쿨링. 랩타임은 점점 빨라지고 있긴 한데...’
한 바퀴에 타임 어택을 시도한 뒤, 나머지 두 바퀴를 서행하는 서준하. 로그를 보던 롭이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때,
“닐! 32초대! 타깃에 거의 가까워졌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한 선수들. 서서히 1분 30초 타깃에 가까워진 레이서가 나타났다.
‘뭐하는 거냐, 서준하.’
다시 서준하의 개인 주행 데이터를 살피는 롭. 하지만 여전히 똑같은 주행 패턴이었다.
당황한 롭. 이번에는 서준하의 ‘주행라인’ 기록을 살폈다. 그런데,
‘...!’
어택을 시도하는 랩마다 서로 다른 주행 라인들. 서준하는 트랙을 탐사하며 불규칙적인 드라이빙을 하고 있었다.
‘타이어를 최대한 아끼고 있다가... 한 방에 만들겠다는 건가?’
생각에 잠겼던 롭.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서준하의 포뮬러가 피트 앞을 지나갔다.
‘...애초에 방식이 달라!’
< 내가 유독 레이서에게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간단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