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44화 (44/200)

< 젖은 노면에선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지금 들어온 레이서들, 모두 피트 앞으로 서주세요.”

유로컵 1차전 본선 레이스 시작 전. 스메들리 팀의 마케팅 담당자 루시가 메디컬 체크(혈압, 균형감각 등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작업)를 마치고 복귀한 스메들리 레이서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요?”

스네트 서킷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 눈을 크게 뜬 닐이 루시를 바라봤다.

“레이스 끝나고 찍으면 더 힘들 거예요. 지금 빨리 찍어두는 게 나아요.”

스메들리 팀에 슈트 나 벨트 등을 후원하는 업체 레이싱맥스. 유로컵 대회 출전 선수들이 실제로 착용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경기 직전 포토 타임을 요청했다.

“엄브렐러 걸(레이싱 모델)들이 선수들 양옆으로 서주시고, 슈트가 비에 맞지 않게 우산을 잘 씌워주세요.”

우산도 없이 피트 앞으로 나온 루시. 온몸에 비를 맞으며, 포토존을 정비했다. 그런 루시 곁으로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는 롭.

“루시, 나도 한 장 찍을까?”

레오타드 유니폼을 입은 레이싱 모델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롭. 그러자 루시가 ‘너는 레이서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며 다시 선수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 찍습니다. 지금부터 계속 촬영들어갈 거니까, 모두 자연스럽게 웃어주세요.”

롭을 밀쳐낸 루시가 우산을 빼앗아 들고는 업체 소속 사진 기자 옆에 섰다. 모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선수들에게 ‘스마일’이라고 말하는 루시.

“준하, 에릭 둘 다 좋아요. 지금 포즈 자연스러워요. 레이디들도 선수들 옆에 좀 더 붙어주세요.”

레이서들을 향해 굿 사인을 날리는 루시. 레이싱 모델들 역시 상표 홍보에도 적극적이었고, 모델로서의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닐, 좀 더 웃어주세요. 힘든 거 아는데, 이왕 나온 거 빨리 끝내고 들어가요.”

서준하의 눈에 선수들을 달래가며 진땀을 빼는 루시가 보였다.

사실 다른 레이서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됐다. 정말 중요한 본선 레이스 출발 전이고, 심지어 바깥에는 비까지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스폰을 받는 레이싱 팀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서들이 있기 전에 팀이 있고, 그 팀 이전에 스폰서들이 있다. 이런 대회에 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스폰 업체들 덕분이었다.

“보면 볼수록 프로야, 이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안다니까?”

멀리서 포토존을 바라보는 롭. 그의 눈에 서준하는 프로였다.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 짜증스런 태도를 보이는 몇몇 모델들 및 레이서와 달리 서준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롭, 어젯밤에 내가 말한 거, 레이서들한테 전달했지? 계속 이런 식으로 비가 쏟아지면, 오히려 우리 쪽이 유리한 걸지도 모르겠어.”

흐뭇하고 므흣하게 포토존을 바라보던 롭의 곁으로 프랭크가 다가왔다.

“네, 아침에 전략 회의 다시 했어요.”

새벽부터 쏟아진 비. 서킷은 이미 흠뻑 젖었다.

“이런 컨디션에서 자신 있게 치고 나올 레이서가 몇이나 되겠어요?”

자신있는 얼굴로 서킷을 바라보던 롭이 손을 뻗어 빗방울을 적셨다.

***

독일 MA 레이싱 팀 피트. 창문 밖 그리드 위로 정렬한 포뮬러들이 보였다.

“영국 땅에서 3위면 괜찮지 않습니까, 감독님?”

이번 유로컵에서 제외된 독일 서킷이다. 이 불리한 조건에서 예선 3위를 차지한 MA 레이싱의 메인 레이서 루카. 피트 밖으로 팀의 자랑스러운 검정 포뮬러가 보였다.

“오후 기상 컨디션은 아직 오전하고 똑같나?”

엔지니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날씨를 체크하는 슈벤 감독. 서킷 위의 전략가로 유명한 그에겐 모터 레이싱도 야구와 같은 수 싸움이었다. 기상 변화를 보며 팀 전략을 체크하는 슈벤.

“예보에는 레이스 중후반쯤 비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지금 이렇게 비가 오는 걸로 봐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강수량 변화는 체크해 봤어?”

“아, 잠시만요.”

서킷마다 다양한 기상 정보를 제공하는 운영 사무국이 있다. 감독의 날카로은 지적에 팀 스태프가 데이터를 확인했다.

“조금이지만, 줄고 있습니다... 흠.”

불안한 눈빛의 스태프와 달리 입가에 미소를 띈 슈벤 감독. 자리에서 일어난 슈벤이 피트 월로 향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루카한테 전해. 오늘 목표는 3위가 아니라, 1위로 피니쉬 라인을 밟는 거야.”

“1위요? 젖은 노면에선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젖은 노면에서 추월 시도를 하다 보면, 제 풀에 꺾여 스핀하는 경우가 다반사. 특히나 엔트리 레벨에선 선수들 모두 레인 컨디션을 두려워한다.

모두가 순위권 변동없이 정적인 레이스를 예측했던 상황. 레이스 시작 직전, 슈벤 감독이 공격적인 전략으로 방향을 바꾸는 듯 보였다.

“단, 내가 지시를 내릴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해. 그때까지 선두 포뮬러의 리어 윙(경주차의 뒤쪽 큰 날개)을 놓치지 말라고 전해줘.”

선두와 2위는 보수적으로 경기를 운영할 게 뻔해 보였다. 하지만 30바퀴 동안 실수 한 번 안 나오는 건 드문 일.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달라진 노면 컨디션에 벌어질 일이 슈벤 감독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편, 예선 2위를 기록한 WD모터즈. 슈벤의 예상대로 그들 역시 스메들리 피트만큼 큰 기대에 차있었다.

“어차피 비가 계속 내리는 거라면 무리하지 않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1차전 우승이 유로컵 전체 우승을 뜻하는 건 아니다. 팀에게 불리한 서킷에서 2위를 차지하는 일은 우승만큼이나 최상의 결과.

“1차전만 잘 버텨내면 이번 유로컵 진짜 우승이야. 2차전은 밀라노니까.”

유로컵 2차전이 열리는 이탈리아. WD모터즈의 메인 서킷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팀 전체가 흥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게다가, 디펜스는 저 녀석이 제일 잘하는 거잖아?”

피트 위에 3번째 포뮬러를 가리키는 스테파노 감독. 새로 부임 후 이번 대회 처음 지휘봉을 잡은 그에게 샤를의 포뮬러는 가장 견고해 보였다.

“카트 탈 때부터 디펜싱으로 유명했습니다. 샤를이 조금 약은 구석이 있어도, 앞에서 다른 레이서 멘탈을 잘 부숴먹으니까요.”

“약은 구석이 있기는, 그런 건 영리하다고 하는 거야.”

포뮬러 르노 2.0 프랑스컵에서도 폴투피니쉬로 우승한 샤를 가도. 타고난 레이싱 능력으로 폴포지션을 차지한 다음, 본선 레이스에서 절대 빈틈을 주지 않는 선수로 유명세를 탔다. 따라오는 레이서들을 조급하게 만들어 자멸하게 만드는 영리한 드라이버.

“포뮬러로 넘어오기 전에 한 번 삐끗했다는데, 그때 말고는 아마 카트 대회에서 폴투피니시를 가장 많이 한 선수로 알고 있습니다.”

디펜스 드라이빙이 탁월한 샤를 가도. WD 모터즈 팀이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렇구만, 아무튼 샤를한테는 앞차의 실수만 노리라고 해.”

***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잉.

“세이프티 카를 따라 24대의 포뮬러들이 포메이션을 돌고 있습니다. 요리조리 롤링하며 노면 컨디션을 익히는 포뮬러카들!”

선두에선 메르세데스의 SLS AMG가 사이렌을 울리며 스네트 서킷을 한 바퀴 순회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는 영국 스네트 서킷입니다. 아직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저희는 혹여 중간에 경기가 중단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이네요.”

F1을 비롯한 모터레이싱도 최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우천에서도 경기를 진행한다. 다만, 기상이 악화될 경우, 오피셜의 판단에 따라 경기 중반 경기가 중단되기도 한다.

“이런 컨디션에선 레인 타이어가 나와야겠죠. 포뮬러 모두 풀-웨트 타이어를 장착한 모습입니다.”

포메이션 랩을 멈추고 그리드에 선 포뮬러들. 그립감은 떨어지지만, 배수량이 가장 많은 풀-웨트 타이어. 클로즈업 된 화면으로 선수들의 타이어가 비췄다.

“자! 2014 포뮬러 르노 2.0! 대망의 유로컵 1차전 경기! 시작합니다!”

흥분한 목소리로 레이스 시작을 알리는 캐스터. 메인스텐드 가득 포뮬러들이 뿜어내는 배기음이 지붕을 강타했다.

“이번 유로컵의 다크호스죠! 스메들리의 서준하가 선두를 달립니다. 그 뒤로 WD의 디펜스 마스터 샤를 가도. 3위에는 MA의 루카가 달립니다. 4위 오로라의 쿠쉬...”

시작과 함께 1코너를 향해 달려간 포뮬러들. 비가 오는 탓에 어제 예선보다 눈에 띄게 느려진 속도로 스타트라인을 벗어났다.

“물웅덩이가 있나 봅니다. 화면이 잘 안보이는데요. 저희도 이게 안개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가네요.”

화면에 잡힌 포뮬러들의 질주. 타이어가 뱉어내는 물줄기가 포뮬러들 주위로 분수처럼 퍼졌다.

“서두르지 않고, 레코드라인을 따라 트랙을 도는 선수들. 놀랍게도 아직 포뮬러들이 큰 무리없이 트랙을 달립니다.”

24대의 레이서가 하나의 기차처럼 꼬리를 물고 달리는 상황. 모두가 나서지 않는 모습에 관중석 갤러리들이 지루한 눈으로 레이스를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경기 중반.

빗줄기가 조금 약해지자, 각 팀마다 타이어 교체를 준비했다.

“선두권 몇 팀이 타이어 교체에 들어가려는 모습입니다. 이번 대회 꼭 지켜야 할 룰이죠. 레이스 중 무조건 한 번 타이어를 교체해야 합니다.”

저마다 피트로 복귀하는 포뮬러들. 큰 문제가 없다면, 타이어 교체 타이밍은 경기 중반인 지금이 일반적이다. 경주차들이 복귀하자 각 팀 피트가 분주해졌다. 그리고,

“말씀하신 순간, 선수들! 피트 스탑에 들어가는 타이밍을 노리죠!”

“아! 포인트에 목말랐던 선수들이 치고 나옵니다!”

순위에 따라 포인트가 차등 적용되는 유로컵. 24명의 레이서 중 승점 포인트가 주어지는 레이서는 단 10명. 포인트 권에서 멀어졌던 선수들이 코너 곳곳에서 추월을 시도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선두권 레이서들은 기다려 주지 않거든요!”

부우우우우웅.

끼이이익.

쿵.

하지만 바다 위 폭풍우를 만난 선박처럼 트랙 위를 나뒹구는 포뮬러들. 트랙에 적응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미끄러운 서킷에서 몇몇 포뮬러들이 스핀을 하며 타이어 월(안전장벽)에 부딪혔다.

“서킷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선두권! 선두권에선 WD의 샤를이 가장 먼저 피트 스탑에 들어갑니다!”

빗줄기가 조금 약해지자, 피트 스탑에 들어가려는 선두권 포뮬러들.

“재빠르게 타이어를 교체하는 2위 샤를의 포뮬러카. 피트 스탑에서 타임 로스가 거의 없어 보이네요! WD 팀 미캐닉들 능숙한 피트 스탑을 보여줍니다.”

신속한 움직임으로 타이어를 교체한 WD 모터즈. 전보다 그립력이 우수한 인터미디어트-웨트 타이어로 교체하며, 재빠르게 피트 레인에 올라선 샤를. 그리고,

“서준하도 다음 바퀴 피트 스탑 오더가 내려졌습니다!”

2위 포뮬러가 타이어를 교체하러 들어가자, 1위 서준하에게도 피트 라인으로 진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리고 MA의 루카! 계속 치고 나오는 루카! 피트 스탑 없이 계속 달립니다!”

오랜만에 선두권 순위가 바뀌자, 흥분한 중계진들. 이이서 샤를의 포뮬러가 피트 레인을 빠져나왔다.

“서준하! 피트 박스에 들어섭니다!”

곧바로 스메들리 피트로 넘어간 중계 화면.

“서준하가 들어가고, 샤를이 아직 피트 레인에 있는 가운데, 선두는 루카가 차지합니다!”

“그렇습니다. 서준하, 빠르게 교체하고 나와야 하는데요! 경쟁자들 속도가 무섭습니다!”

피트 스탑에 들어간 서준하. 긴장된 모습의 스메들리 피트 크루가 중계화면에 잡혔다.

“자, 스메들리! 피트 스탑 한 번 볼까요?!”

포뮬러카가 박스에 들어서자, 미캐닉들이 분주해졌다.

< 젖은 노면에선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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