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대회 챔피언 먹으려면, 무조건 여기서 우승해야 한다고 >
짝! 짝! 짝!
“튀르키예(Turkiye)!!!”
메인 스텐드 부근 수염이 덥수룩한 건장한 사내들. 무슬림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피니쉬 라인으로 다가서는 쿠쉬의 경주차를 향해 특유의 응원 구호를 보냈다.
끼익.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온 쿠쉬. 전방 시야로 이리저리 휘날리는 체커드 플래그가 눈에 들어왔다.
-피니쉬다, 쿠쉬!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환희에 가득찬 목소리. 쿠쉬와 함께 터키에서 건너온 매니저이자,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 역할 맡고 있는 오잔이 레이스의 끝을 알렸다.
“고생했어요, 오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 오잔의 라디오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쿠쉬가 무전을 보냈다.
“튀르키예에에에에!!!”
스텐드 가까이 쿠쉬의 포뮬러가 다가서자, 터키인 관중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깃발을 흔들었다. 다른 어느 팀의 응원보다 강렬한 사내들의 함성.
-계속 이렇게만 타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쿠쉬지금 이순간이 감격스러운 오잔. 같은 나라 터키인들의 희망에 찬 얼굴을 보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네가 이스탄불 파크(Istanbul Park)를 되살리는 거야 한국과 마찬가지로 단 한 명의 F1레이서도 존재하지 않는 모터레이싱 불모지 터키. 설상가상 얼마전 F1 터키 GP가 열렸던 이스탄불 파크 서킷이 개최를 포기하며, 터키의 모터레이싱 관계자와 팬 모두에게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그에 따라 모두가 반대했던 쿠쉬의 도전, 하지만 남유럽 카트 대회부터 입지를 다지며 터키 최고의 레이싱 유망주로 떠오른 그는 결국 포뮬러 대회에서도 성과를 드러냈다.
-아쉬워 할 거 없어. 어차피 2,3차전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이잖아?
“...”
다음 대회 서킷들 모두 쿠쉬가 카트 시절에 경험해본 유리한 서킷. 하지만 오잔의 말에 쿠쉬는 답이 없었다.
-영국에서 2위한 거면 정말 잘한 거야. 그리고 시간이 더 있었으면, 코리안 잡았을지도 몰라 부우우우웅.
위이이잉.
[Smedley Formula. Seo]
쿠쉬의 앞으로 스메들리 팀의 포뮬러 한 대가 보였다. 위닝 랩(winning lap)을 돌며 자신의 우승을 자축하는 모습.
“스메들리가 영국 팀이어서 그랬던 거겠죠?”
오잔의 말에 답하지 않던 쿠쉬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무전을 보냈다.
-무슨 말이지?
2위에 올라선 뒤 기세 좋게 남은 랩을 몰아붙였던 쿠쉬 메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선두 차의 꽁무니도 밟지 못했다.
“빠르던데요, 압도적으로...”
서준하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엄청난 실력 차이가 느껴질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그럴 수 있어. 스메들리 팀은 여기서 연습 주행도 여러 번 했었대. 서킷이 훨씬 익숙했을 거고, 주행 데이터도 다른 팀보다 훨씬 많았을 테니, 빠른 건 당연한 거야.
죽어가는 터키 모터레이싱에 다시금 열풍을 일으키고픈 야망을 가진 쿠쉬. 코리안 레이서를 노려보며 스티어링 휠을 움켜 잡았다.
“진짜 그런 거겠죠?”
***
레이스 종료 후 메디컬 체크와 검차(차량의 규정 준수여부를 확인하는 작업)를 마친 스메들리 팀. 피트로 복귀한 레이스들을 향해 수고의 박수가 쏟아졌다.
“6위면 괜찮은 성적이야. 아직 2차, 3차전이 남았잖아?”
서준하의 우승으로 최고 포인트를 차지한 스메들리지만, 다른 레이서들의 부진에 팀의 우승 가능성은 조금 낮아진 상황.
“맞습니다. 아직 팀 챔피언 자리가 멀어진 게 아니라고요.”
레이서들을 격려하는 롭과 아론. 그러나 포인트 권에도 들지 못한 에릭과 성적이 늘 아쉬운 닐이 고개를 떨궜다.
한편, 새하얀 얼굴 위로 미소를 보이며 팀원 앞에 나타난 서준하. 자신을 서포트한 팀원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굿 사인을 보냈다.
“롭, 덕분에 1코너 스핀 면했다.”
팀워크는 작은 교감 하나에서부터 시작되는 걸 잘 알고 있다. 특히나 이런 장기 대회에선 대회 종반까지 기세가 떨어져선 안된다.
옆에선 오늘 피트 스탑에서 저조한 기록을 세운 미캐닉들의 기죽은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다, 준하야.”
“에이, 괜찮아요. 내가 너무 잘 타서 난이도 높여준 거 다 알아요.”
미캐닉 리더, 레리에게 다가선 서준하. 농담을 던지며 활짝 웃어 보였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럴 때 일수록 레이서가 힘을 내준다면, 팀 전체 결속력을 드높일 수 있다.
“근데 윌슨이 안 보이네요?”
피트 스탑 타이밍에 대해 얘길 나누던 서준하. 항상 밝게 웃던 막내 미캐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잠깐 화장실 간 거 같네. 하루 종일 심각하더라고.”
“심각해요?”
“오늘 기록이 윌슨 쪽에서 딜레이나서 그랬던 거거든. 휠 넛(Wheel Nut) 조이는 타이밍을 자꾸 놓치나봐.”
타이어 회전축에 휠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풀림 방지 나사, 휠 넛. 서준하 이후 닐과 에릭의 피트스탑에서도 윌슨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아, 근데 진짜 화장실 간 거 맞아요?”
“으응, 걱정 마. 나도 불안해서 계속 붙어 있었어. 아마 팀원들 옆에 있기 힘들어서 잠깐 사라진 걸 거야.”
레리의 말에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 서준하. 피트 밖을 나오니 메인 스텐드 주위로 포디엄 행사가 한창이었다.
철컥.
화장실 건물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차. 그 옆에 쪼그리고 앉은 윌슨이 보였다.
“헤이, 윌슨.”
웃는 얼굴로 윌슨을 부르는 서준하. 갑작스런 부름에 윌슨이 뒤로 나자빠졌다.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얼굴.
“돌아가자. 검차 끝나고, 레이서들 복귀했어.”
“아...”
미안한 눈으로 서준하를 바라보는 윌슨이 안타까웠다. 미안할 게 없었다.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 게다가 오늘은 윌슨의 미캐닉 첫 데뷔 무대였다.
“괜찮아, 어차피 1위로 들어왔잖아.”
괜찮다며 환히 웃는 그를 보고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윌슨. 예상과 다른 서준하의 반응에 서러웠던 감정이 폭발한 듯 보였다.
“피트 스탑 기록이 쳐지는 건 별 것도 아니야. 전에는 피트 스탑에서 타이어도 빠지고도 이겨봤는데?”
웃으며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주니어급 포뮬러부터 F1까지.
연습 주행을 포함한 수많은 레이스에서 온갖 위기 상황을 겪었다. 전생 수천 번의 레이스를 하며 뒷바퀴가 빠지는 일도 겪어 본 서준하.
“정말 타이어가 빠져도?”
엉엉 울던 윌슨. 순수하고 어린 나이라 그런지 서준하의 말을 그대로 믿은 눈치였다. 덕분에 웃음을 보이는 윌슨.
“에이, 농담이지. F1 출신이래도 믿겠네. 빨리 가자. 땀 식어.”
***
“밀라노로 떠나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정비 철저히 하도록. 이상.”
1차전을 마치고, 하루 정비를 마친 스메들리 팀. 마이크를 쥔 프랭크가 게러지에 모인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레이서 팀은 잠깐 모여봐.”
레이서와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앉은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은 롭. 1차전이 끝난 어제 일요일. 곧바로 다음주 주말에 열릴 2차전을 위해 전략 회의에 들어갔다.
“다들 이탈리아에선 포뮬러카가 처음일 테고. 아마 우리 팀 레이서 모두 2차전 서킷은 생소할 거야.”
유로컵 2차전으로 채택된 이탈리아 국립 몬차 자동차 경주장(Autodromo Nazionale Monza) 롭이 걱정스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하필 2차전이 몬차입니까... 하.”
“야, 아론. 한숨 쉬지 말랬지. 누가 보면 이미 진 줄 알겠다.”
인상을 찌푸린 아론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맬릭. 성적이 부진한 자신의 레이서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던 차,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에 신경질을 냈다.
반면, 아론의 반응을 이해 못하는 레이서들. 몬차 서킷엔 특별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자, 자. 집중해 봐. 이번 대회 챔피언 먹으려면, 무조건 여기서 우승해야 한다고.”
두 사람을 한번 흘겨본 롭이 모두를 주목시켰다. 매번 장난기 넘치는 그였지만, 회의 시간 만큼은 아주 진지했다.
“몬차는 단순한 서킷이야. 하지만... 단순한 만큼 가장 빠른 서킷이기도 하지.”
모든 F1 서킷 중 가장 빠른 평균 속도가 나올 정도로, 무엇보다 스피드 트랩 최고 스피드는 무려 350km/h에 달하는 곳이다.
“주의해야 할 건 속도야. 여기선 정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해. 몬차는 경기 내내 톱스피드로 달리는 곳이니까.”
“맞아, 메인 스트레이트가 엄청 길고, 코너가 11개 밖에 없어. 코너마저도 1코너 빼고는 전부 속도가 꽤 있는 상태로 통과하는 중고속 코너들이지.”
“잠깐 기다려봐. 트랙을 보면서 하자.”
테이블에 놓인 종이 위에 트랙을 그리는 롭. F1은 물론 수많은 레이스가 열리는 서킷인만큼, 그의 머릿속엔 서킷의 지도가 그려져있었다.
“첫 코너가 이렇게 생겼단 말이지. 이 시케인(Chicane)에선 무조건 파워 브레이킹이야! 그게 아니면 그대로 나가 떨어져. F1 차도 350km/h에서 80km/h까지 한 방에 떨어뜨려야 할 정도로, 엄청 하드해.”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설계된 S자 코너, 시케인. 특히나 몬차의 1번 시케인은 F1 캘린더에서 가장 강력한 브레이킹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여기 마지막 코너. 진짜 엄청 특이한 코넌데. 이름이 뭐더라...”
“아, 거기. 에이팩스(apex) 잡는 거 엄청 까다로운 곳?”
다시 펜을 들고, 변칙 U자형 코너를 그리는 롭. 그 모습을 본 맬릭도 아는 채를 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코너 이름을 기억 못하는 두 사람. 그러던 그때,
“파라볼리카(Curva Parabolica) 아니야?”
서준하가 입을 열었다. 너무나 자신있게 이름을 말하는 모습에 신기한 눈으로 보는 팀원들. 어떻게 알았냐는 롭의 물음에 서준하가 ‘F1 중계 방송 마니아’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아무튼 연습 주행 때 여길 완벽하게 파악해야 해. 여길 공략 못하면, 랩타임이 무조건 망하는 거니까.”
매년 레코드 라인이 바뀔 정도로 몬차의 까다로운 코너이자, 굉장한 진입 속도와 탈출 속도를 자랑하는 곳. F1에서 가장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 코너였다.
“이탈리아 팀의 홈그라운드 같은 곳이라, 자칫하면 2차전까지 WD 애들한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 사실 그러면...”
1차전 2위를 차지한 이탈리아 팀 WD 모터즈. 이번 대회 2차전 장소가 결정되는 순간, 그들의 우승을 예상하는 관계자들이 많았을 정도로, WD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서킷이었다.
“하... 몬차.”
랩타임이 망한다는 말에 굳어버린 레이서들의 표정.
“몬차, 거긴 나도 잘 알지.”
모두가 잔뜩 긴장한 가운데, 서준하가 자신있게 말했다.
“뭐? 야 서준하, TV로 보는 거랑 실제로 레이스 하는 건 달라.”
롭의 말을 웃어넘긴 서준하. 금세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몬차야말로 우리 집 앞마당 같은 곳이었으니까.’
티포시가 시뻘겋게 옷을 입고 가장 극성을 띄는 곳, 몬차 서킷. 전생 서준하의 F1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홈 그라운드였다.
< 이번 대회 챔피언 먹으려면, 무조건 여기서 우승해야 한다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