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메들리 피트 뭐하나요? >
“내 저럴 줄 알았네. 허허.”
“다친 데가 없어야 할 텐데요... 타이어 펑쳐는 아닌 거 같고, 엔진 문제일까요?”
몬차 서킷의 메인 스텐드 구석. GP2(Formula 2)의 강력한 팀, 캄포드 레이싱의 총감독 파코와 케빈의 아버지 앙드레 프로스트가 걱정스런 얼굴로 서킷을 바라봤다.
“흠, 제가 볼 땐 엔진 블로우(Engine blow)일지도 모르겠네요.”
참가자 모두 1차전 그리고 그 이전 연습 때부터 사용한 엔진을 대회에 들고 나온 경우가 대부분. 몬차 서킷에선 엔진 출력을 최대한 뽑아 쓰는 만큼 그 부담이 엄청나다.
“몬차는 급감속 구간이 여러 곳이라, 스킵 시프트가 지나쳤겠어요.”
총 세 번의 급감속 시케인. 케빈처럼 경험 없는 레이서들은 급격히 기어의 단수를 낮추는 스킵 시프트를 내기 마련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차량에 문제를 만드는 행위다.
“그럴 수도 있지. 허허, 애초에 선두에서 달린 건 케빈한텐 독이 됐구만. 저렇게 몰아붙여서 타본 경험이 없었을 테니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엔진 회전수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여러 번, 아마도 구동 계통 부품에 파손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데뷔전 우승 타이틀이 물 건너 갔구만, 그래.”
“그래도 스페인컵도 아니고, 유로컵에서 데뷔전 예선 2위할 정도면 진짜 감각 있는 거죠. 엄청난 아드님을 두셨네요, 앙드레.”
막내 아들의 리타이어에 아쉬움을 표하는 앙드레였지만,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이번 대회에 내보낼 생각 없었고, 그저 대회 분위기를 느끼기만을 바라며, 예비 레이서로 참가했으니까.
“그나저나 뒤따라오던 스메들리 팀 레이서가 엄청 영리하네요.”
“그렇구만, 지금 이 상황은 저 한국 친구가 의도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네.”
“거센 압박 그렇고, 케빈 뒤에 붙어서 rpm 관리하다가, 타이밍 좋게 먼저 피트인 했어요. 몇 번 기회가 있었는데도 추월 안 했던 걸로 봐선 확실히 노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경기 초반부터 케빈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던 스메들리의 코리안 레이서. 타이어를 교체하고 나오자, 이전보다 압도적인 스피드로 서킷을 누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흠, 주니어 레이서가 몬차를 여러 번 주행해 본 티를 낸단 말이지.”
파라볼리카에 진입하는 서준하의 포뮬러를 유심히 살핀 앙드레 감독.
“주니어 선수들일수록 저 까다로운 코너에서는 항상 라인이 바뀌기 마련인데... 저 전수는 파라볼리카에 들어가고 나오는 라인이 항상 일정해.”
포뮬러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몬차 서킷의 재미는 선수들이 파라볼리카를 어떻게 공략하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전반적으로 서킷이 다소 무미건조한 만큼 이곳에서의 실수가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
그러나 한국 선수는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항상 일정한 라인을 그리며 코너를 돌았다.
“그러네요. 하하, 다시 보니 더 빠른 포뮬러카에 태워보고 싶을 정도에요. 게다가 드라이빙 스타일이 좀 특이하긴 한데, 신기하게 랩타임은 계속 빨라져요.”
현재 포뮬러 르노 경주차보다 3배가 넘는 마력. 최고속이 335km/h에 달하는 엔진을 장착한 F2의 경주차. 그 차를 탄 코리안 레이서의 질주가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온 선수라고 했나?”
“서. 준. 하. 요.”
감독에게 선두 차 레이서의 이름을 묻는 앙드레. 서킷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잘 타는 구만, 서준하.”
***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슈웅.
멈춰선 케빈의 포뮬러 옆을 가장 먼저 지나간 스메들리 차의 레이서는 닐 앨런이었다.
“닐 앨런! 스메들리 팀의 닐이 선두로 올라섭니다! 그리고 그 뒤를 달리는 팀 메이트 서준하!”
케빈이 리타이어하고, 서준하가 피트 스탑한 사이 1위로 올라선 닐. 3위를 달리던 그가 1위에 오른 상황이었다.
“케빈의 리타이어로 환호하는 스메들리 팀! 1,2위 모두 스메들리 레이서들이 자리합니다!”
“이대로 두 선수가 1,2위를 차지한다면, 스메들리 팀도 챔피언 자리를 노려볼 수 있게 됐는데요?”
닐의 뒤를 쫓던 샤를과도 격차가 조금 있었던 스메들리 팀. 1,2위 자리 모두 자신들의 팀 레이서가 차지하자, 피트 분위기가 환희로 가득했다.
“아쉽지만, 닐 선수는 아직 피트 스탑을 하지 않았습니다. 곧 팀 메이트에게 선두 자릴 내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땐 서준하의 우승 가능성이 높아 보이죠?”
피트 스탑을 한 번 하고도 닐과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은 서준하. 연이은 클린랩과 타임 로스가 없었던 피트 스탑 덕분이었다.
“서준하는 실수 없이 남은 랩을 완주하는 게 중요하겠고요. 이렇게 되면, 스메들리 팀에겐 닐 앨런의 피트 스탑이 굉장히 중요해지겠네요. 타이어 체인지 이후 순위가 어떻게 바뀔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몬차입니다.”
중계진 모두 서준하의 우승을 예측하는 가운데, 다시금 분주해진 스메들리 팀 피트.
“눈치를 보던 3위 샤를! WD의 샤를이 피트 스탑에 들어갑니다!”
“샤를이 들어가니까, 중위권 선수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죠?”
레이스가 후반부에 접어들자, 샤를을 시작으로 그와 경쟁 선상에 있는 선수들이 피트 스탑에 들어갔다.
“쿠쉬! 드미트리! 두 선수도 피트로 들어갑니다! 자, 이제 닐도 슬슬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요?”
하나둘 타이어를 바꾸기 시작하는 선수들.
“그렇습니다! 서준하도 거의 다 따라왔어요. 조금 있으면 뒤에 바짝 붙겠는데요?!”
타임 로그를 살피던 중계진. 카메라에 잡힌 선두 차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닐 앨런! 그의 피트 스탑 시기는 언제가 될 지!”
“이제 곧 새 타이어를 낀 샤를의 포뮬러가 트랙으로 복귀하거든요? 스메들리 피트 뭐하나요?”
해설진에 말에 중계 화면에 잡힌 스메들리 피트.
이전과 달리 다소 굳은 표정의 프랭크 감독이 화면에 잡혔다.
“다급해 보이는 스메들리의 피트 월. 지금 선수들의 라디오가 굉장히 뜨거울 것 같은데요?!”
그리고 화면에 등장한 피트 월. 스메들리의 레이스 엔지니어로 보이는 남자가 시뻘건 얼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맬릭 메이슨, 어딘가 심각한 표정입니다?”
닐의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 맬릭이 중계 화면에 등장했다.
***
스메들리 피트 월을 바라보는 프랭크.
“왜 피트 스탑을 안 하는 거지?”
“맬릭하고 의견을 조율 중이랍니다.”
“아직도? 더 늦기 전에 이번에 바로 들어오라고 해.”
레이서의 피트 스탑 타이밍이 늦어지자, 피트 월 담당 스태프에게 무전을 날렸다.
“맬릭! 너희 뭐 해. 빨리 들어가!”
마이크를 멀리 하고선 소리치는 롭. 감독은 물론 주변 엔지니어들의 시선이 모두 맬릭에게로 향했다.
“3위 샤를의 포뮬러가 피트 레인을 빠져나옵니다!”
경쟁자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당황한 엔지니어들. 하지만 지금 가장 속이 터지는 사람은 바로 맬릭이었다.
다시 한번 더 무전을 날리는 맬릭.
“닐, 더 이상은 안 돼. 이제 들어와.”
-아직 그립감이 좋아요. 좀 더 격차를 벌릴 수 있어요.
레이스 후반, 서킷에 익숙해지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무엇보다 트래픽이 없는 선두에서 더 빨리 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닐. 팀의 요청대로 지금 피트 스탑에 들어간다면 페이스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더 늦으면 안 돼! 무조건 다음 바퀴에 타이어 바꿔!”
-...아직 한 바퀴 더 가능해요!
서킷 상황판을 바라보며 닐에게 무전을 날리는 맬릭. 2바퀴 째, 레이서와 피트 스탑 시기를 놓고 부딪히고 있었다.
“준하가 바로 뒤에 붙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 이번엔 랩타임도 떨어질 거야!”
유로컵이라는 무대에서 서준하를 뒤에 두고, 선두를 달리고 싶었던 걸까. 지난날 서준하를 바라보던 닐의 눈빛이 맬릭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 진짜...
랩타임이 떨어진다는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쉰 닐. 짜증섞인 목소리와 함께 무전을 날렸다.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피트 레인을 빠져나오는 샤를 가도! 새타이어를 장착하고 나왔습니다! 막판 뒤집기를 노리는 모습입니다!”
파이널 랩까지 몇 바퀴 안 남은 상황. 피트 스탑 기록이 좋은 샤를이 다시 서킷에 등장했다.
“자, 그리고 닐! 피트 스탑에 들어갈 준비를 하나 보군요! 분주해진 스메들리 피트!”
중계화면에 잡힌 닐의 포뮬러카. 이어서 타이어를 들고 피트 박스에 대지 중인 미캐닉들이 화면에 잡혔다.
“닐 앨런! 피트 레인으로 들어갑니다! 최대한 빠르게 나와야 할 텐데요!”
“피트 스탑 타이밍이 아주 늦은 닐입니다. 지금 팀 챔피언의 가능성은 닐과 미캐닉 크루에게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는데요!”
피트 레인에 들어서는 닐. 이어서 뒤따르던 서준하의 포뮬러가 1위 자리로 올라섰다.
“닐이 빠지고 선두에선 서준하! 앞차가 사라지고 더 빨리진 듯한 서준하입니다!”
“심지어 9위 우스만 선수와도 1바퀴 가량 차이가 나요. 압도으로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듯 보입니다!”
선두라고 해서 트래픽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레이스 후반, 순위권과 격차가 많이 뒤처진 백마커(Backmarker)들이 서준하의 앞길에 나타났다.
“자! 그리고 닐 앨런! 피트 스탑은 어떻게 됐나요?!”
트랙을 질주하는 서준하와 그 뒤를 따르는 경쟁자들이 번갈아 카메라에 잡히고, 이제 다시 스메들리 피트로 넘어간 화면. 그런데,
“닐이 아직 안 들어왔나요?!”
아직 피트 박스에서 대기 중인 스메들리 미캐닉들. 타이어와 휠 건을 손에 든 채, 닐의 포뮬러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저희가 놓친 건가요? 벌써 교체하고 나갔을 리가.”
중계진의 말에 피트 레인과 출구 근처가 화면에 잡혔다.
“그리고 마침 MA 레이싱의 베르튼! 베르튼이 피트로 들어옵니다!”
또 다른 포뮬러 한 대가 피트 레인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이는 가운데,
“...허!”
중계화면에 잡힌 MA 레이싱의 피트. 낯선 포뮬러 한 대를 발견한 중계진이 모두 놀라고 말았다.
“아! 이런 닐! 거기 아니에요!”
다른 팀 피트에 스탑한 닐 앨런. 허겁지겁 주위를 살피며, MA 피트를 빠져나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닐 앨런! 황당한 실수가 나옵니다!”
복귀까지 혼란스러웠던 과정. 스메들리 팀과 비슷한 파란색 계열의 다른 팀 피트 박스로 정차하고 말았다.
“이러면 시간 손해가 엄청난데요!”
다시 스메들리 피트 박스로 들어서는 닐의 포뮬러카. 멈춰선 닐이 시트 뒤로 머리를 부딪히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자! 샤를, 쿠쉬, 드미트리! 계속 달립니다!”
경쟁자가 없는 틈을 타 치고 올라오는 레이서들.
“아! 닐 앨런 망했어요!”
타이어 체인지를 마치고, 피트 레인에 올라선 닐의 포뮬러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스메들리 팀원들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이제 2위는 샤를이 확정이고요! 뒤이어 쿠쉬, 드미트리...”
풀샷으로 서킷을 잡은 중계 카메라.
“자, 그러면 선두를 달리는 서준하! 과연 뒤차들이 따라잡을 수 있을지!”
레이스 종반, 서준하를 뒤따르는 추격자들의 모습이 하나 하나 카메라에 잡혔다.
“이제 스메들리에겐 서준하밖에 없습니다!”
무전으로 닐의 소식을 들은 서준하. 한 번 싱겁게 웃고는 브레이크로 올라선 발을 뗐다.
< 스메들리 피트 뭐하나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