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대회 거의 움직이는 시케인인데요? >
“경기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가운데, 피트 레인을 빠져나오는 닐 앨런! 순위는 7위에 랭크합니다.”
닐의 앞으로 보이는 서너 대의 포뮬러카들. 적절한 타이밍에 피트 스탑했다면, 순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였지만, 결국 중위권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들! 레이스 막바지! 좀 더 과감한 드라이빙을 시도합니다!”
파이널 랩이 임박하자 코너링은 더 깊게, 브레이킹은 더 늦게 시도하는 레이서들. 중위권 싸움이 치열해졌다.
“졸트! 졸트! 4번 시케인에 진입합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과감한 코너링인데요!”
유로컵 2차전, 오늘 레이스를 끝으로 레이서들의 대략적인 순위가 결정되기에 레이스 막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미끄러지는 졸트의 포뮬러카. 카운터스티어링에 들어가며 차체를 돌려놓으려 하지만, 아! 역부족입니다! 그대로 미끄러지는 졸트!”
서킷 이곳저곳에서 발생한 흥미진진한 장면들. 무리하게 페이스를 올린 몇몇 선수들이 리타이어하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1번 시케인 보시죠! 터졌어요! 터졌어요! 키바이의 포뮬러가 그래블 배드 위로 멈춰섭니다.”
앞차와 접촉 사고를 낸 포뮬러카부터. 타이어 펑쳐로 정차한 포뮬러까지.
“파이널 랩이 가까워지자, 더욱 혼란스러워진 몬차인데요!”
서킷 이곳저곳 발생하는 크러쉬와 리타이어. 상황이 급변하는 몬차 서킷을 두고 중계진이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이러면 순위권 선수들도 더 정신없어지죠? 백마커를 피하랴, 뒤차 신경 쓰랴.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 선수가 있었으니,
“선두의 서준하! 파라볼리카를 빠져나오며 직선 주로에 올라탑니다!”
재가속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은 서준하. 탈출 속도가 떨어지지 않은 채로 홈스트레치로 향했다.
“서준하의 앞으로 이번엔 헝가리 팀의 마테 포뮬러가 보입니다! 최후미와 두 바퀴 가까이 차이나는데요!”
스타트라인부터 1코너까지의 직선 구간. 서준하가 나타나자, 마테 선수 근처 마샬들이 더 빠른 경주차의 등장을 알리는 청색기를 휘날렸다.
“선두와 꼴찌 포뮬러카가 만나겠군요!”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1코너에 진입하는 마테. 청색기를 보고 서킷의 우측 가장자리로 움직였지만, 타이밍이 조금 늦어 보였다.
“아! 마테 선수 이번 대회 거의 움직이는 시케인인데요? 덕분에 서킷 난이도가 한층 더 높아진 것 같아요...”
1차전, 2차전 연속해서 최후미를 달리는 마테. 결국 이번 대회 움직이는 시케인(장애물)이라는 별명을 얻고 말았다.
“마테! 빨리 비켜 줘야죠!”
백마커 덕분에 더 좁아 보이는 1번 시케인.
“어! 어! 이러다 1코너에서 부딪히겠어요!”
끼이이이이익.
1번 시케인에 진입하는 서준하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워후! 브레이킹 타이밍을 일찍 가져가며 마테의 인코스로 들어옵니다!”
백마커의 움직임을 예측한 서준하. 차량을 코너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백마커 옆으로 아슬아슬 빠져나오는데요오오오!!!”
게다가 마테보다 빠른 속도로 탈출에 성공하기까지. 그의 센스와 테크닉에 갤러리가 환호했다.
“서준하의 판단력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저런 상황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군요. 대담하기까지 합니다!”
서킷의 다양한 변수에도 놀라운 판단력을 보여주는 서준하.
“이제 완전 몬차에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는 서준하! 이제 파이널 랩입니다!”
중계화면으로 공중에서 바라본 몬차 경주장 전체가 등장했다.
“지금 서준하와 그나마 가까운 건 샤를입니다만...”
해설진의 말과 함께 중계 카메라가 선두와 샤를의 간격을 포착했다.
“단독 질주입니다! 경쟁자들과 격차가 어마어마한데요?”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타이어, 가벼워진 차량.
서준하가 베스트 랩타임을 연신 기록 갈아치우며 달렸다.
“똑같은 차량을 탔는지 의심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체커드 플래그가 휘날립니다!”
그렇게 서준하가 마지막 파라볼리카를 빠져나왔다.
“2차전 우승 역시 서준하입니다!”
“이번에도 폴투피니시! 압도적입니다!”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는 서준하. 서킷 우측으로 가까이 붙으며 팀원들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코리안 레이서! 이번 대회 챔피언 자리에 가까워집니다!”
***
피트를 떠나기 위해 정비에 들어간 엔지니어링 팀.
레이서들이 사용했던 타이어를 살피던 미캐닉들 곁으로 헨리가 다가섰다.
“앞쪽에 있는 게 에릭이 교체한 타이어지?”
“네, 우측 프론트에 오버히트가 심해요. 그리고 저기 있는 게 닐의 타이어인데. 거의 펑쳐 직전이에요...”
몬차는 뱅크(노면의 기울기)가 있어, 자칫하면 타이어 일부분이 심하게 마모되는 오버히트가 발생하기 쉽다. 이런 세심한 부분에서 레이서들의 타이어 관리 능력이 들어나는데,
“확실히 다르네요. 여기는 마모도가 일정해요.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게 신기할 정도네요.”
“그러네, 이건 미캐닉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히트인데.”
“풀브레이킹을 수십 번 했을 텐데. 그때마다 신경 써서 하중을 옮겼다는 거잖아요. 이정도면 타이어 안 바꾸고 달릴 수도 있었겠는데요.”
다른 레이서들과 대조적인 서준하의 타이어. 소모품인 타이어마저 아껴쓴 주행에 미캐닉들이 흡족을 넘어 존경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나저나 레이스 엔지니어들은 완전 죽상이네...”
한편, 2차전 역시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스메들리의 피트 월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닐이 포디엄에 오를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7위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냈기 때문. 그리고,
“레이서들 왔으면, 레이스 팀 전부 오피스로 들어오게.”
닐을 시작으로 레이서들이 복귀하자, 오피스에서 프랭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본선 레이스 시작 전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표정의 변화가 없는 프랭크 감독. 팀원 모두가 자리에 앉는 걸 확인했다.
“2차전을 마친 현재 1위 팀의 포인트는 이탈리아의 WD 모터즈와 우리가 58점으로 같아.”
프랭크의 첫마디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남은 3차전에 대한 얘기였다. 대회 포인트 결과지를 손에 쥔 프랭크.
“하지만 이건 3.4위 팀과도 큰 차이가 없는 점수지. 이렇게 되면 다음 경기에 모든 게 걸려있네. 팀 레이서 한 명이 리타이어를 한다거나, 다른 팀에서 3명 모두 포인트 권에 들어가는 상황이 온다면, 스메들리가 순위권에도 못 들 수 있는 거지.”
한 팀에 출전 선수가 3명이나 되는 유로컵. 이는 곧 한 팀에 포인트를 가져다 줄 선수가 3명이란 소리다.
“다들 잘 알다시피, 3차전이 열리는 곳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야. 사실 여긴 레이서들의 기본기가 가장 중요한 곳이지. 무엇보다도...”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서킷. 추월이나 사고의 변수가 극히 적은 서킷으로 유명한 곳이다. 실제 F1 선수들의 폴투피니시 확률은 50%가 넘을 정도.
“특히나 타이어 관리 능력이 가장 중요한 서킷이네.”
서킷에 포장된 아스팔트 특성 때문에 타이어 소모가 극심한 카탈루냐 서킷. 피트스탑 횟수나 박스에서 타임 로스가 가장 큰 변수다.
“헨리, 여기선 특히 피트 스탑이 흔들려서는 안 돼. 자네가 미캐닉들을 잘 이끌어줘.”
타이어 관리라는 말과 동시에 레이서들을 바라본 프랭크. 마지막으로 헨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됐어, 코치진들은 잠깐 나가게.”
전략과 함께 대회 준비 계획을 설명한 프랭크. 레이서를 제외한 다른 팀원 전부를 오피스 밖으로 내보냈다.
철컥.
“닐, 오늘 왜 그런 건지 설명해보게.”
정적을 깨고 나온 첫마디에, 닐이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경주차엔 자네 혼자만 타고 있는 게 아니야.”
“...”
“전날부터 밤새 차를 점검하고, 머리를 싸매던 다른 팀원들 모습을 못 본 건가?”
손을 뻗어 창밖을 가리키는 프랭크. 피트를 떠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한 팀원들이 보였다.
“포뮬러에 입문한 레이서가 유로컵 선두 자릴 달리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은 드물지. 하지만...”
말을 멈추고 다시 닐의 얼굴을 바라보는 프랭크 감독.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놀이가 아니야, 닐. 자네 혼자만의 레이스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게.”
오랜 세월 포뮬러 리그에서 감독직을 맡아온 프랭크. 레이서들의 욕심으로 팀이 패배하는 걸 수차례 봐왔다.
“한 번 더 어린애처럼 행동했다간, 다시는 포뮬러카에 탈 수 없을 거야.”
따끔한 충고가 필요한 시점. 마지막 말을 던진 프랭크가 그대로 오피스를 나갔다.
***
포디엄에 오른 한국인 레이서. 태극기를 흔들며 오늘의 승리를 자축했다.
“저번에 카트 대회에서 봤던 레이서 맞지?”
“스메들리면 영국 팀이잖아.”
“그러네, 언제 유럽으로 온 거야. 일본에서 포뮬러 탈 줄 알았는데.”
페라리 드라이버 아카데미의 주니어 육성프로그램 담당자들. 본사와 가까운 몬차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관했다.
“한국의 서준하...”
동료들 곁에 앉은 치로. 그의 눈에도 코리안 레이서의 모습이 보였다.
“아쉽네. 저렇게 잘 탈 줄 알았으면, 진작 페라리에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때 내가 말했잖아. 저 녀석 컨택 한번 해보자고. 근데 이제 와서 무슨.”
“응? 치로, 네가 그랬었나?”
지난 카트 시절, 서준하를 페라리 주니어 프로그램에 입단시키자고 제안했던 건 치로였다. 하지만 정작 본부장에게 보고할 때 동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치로.
“저쪽은 영국에서 온 아저씨들 같은데, 포뮬러 베이스를 영국에서 시작한 코리안이 매력적이긴 하겠네.”
“그렇지, 특히 영국의 F3 팀들이 자국 베이스를 선호하니까.”
동료들의 근처로 F3 팀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들이 보였다. 서준하를 바라보며 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관심 집중이구만. 나도 벌써 저 코리안 다음 무대가 기대되네.”
“다음 무대라... 곧바로 F3에 가지 않겠어? 영국 베이스니까, F3 브리티시 챔피언십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영국,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등 다양한 나라에 리그를 둔 F3. 그 가운데 브리티시 F3는 오랜 역사가 있는 리그다. 아일톤 세나, 넬슨 피케, 미카 하키넨 등 F1의 전설들은 모두 브리티시 F3 출신.
“근데 옛날에 비하면 브리티시 챔피언십은 많이 죽지 않았어? 어쩌면 유로피언 챔피언십에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오호, 그럼 조만간에 보는 거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지역 F3 팀들이 참가하는 유로피언 챔피언십. 페라리 아카데미 역시 이 대회에 관여하고 있었다.
“한국 출신 레이서가 유럽 무대에서 우승이라... ”
환호 속에서 트로피를 흔드는 서준하. 그를 보는 치로에게 어딘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밀려왔다.
“그러게, 곧 레이스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 치로. 그리고 곧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녀석이랑 맞붙을 수도 있겠다...”
페라리 드라이버 아카데미에 입단한 역대급 유망주. 그의 빨간색 포뮬러카가 치로의 머릴 스치고 지나갔다.
< 이번 대회 거의 움직이는 시케인인데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