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스 당일, 아마 여긴 전쟁터가 될 거야 >
“정말 특이해...”
WD 모터즈의 오피스. 페르난도 감독이 이번 대회 유로컵 1,2차전 레이스 녹화 영상 이곳저곳 살펴보고 있었다.
“거기, 지금 1코너 빠져가는 부분만 다시 틀어봐.”
화면에는 스메들리 팀의 포뮬러 한 대가 스네트 서킷 1코너를 돌아나가는 장면이 등장했다.
“저렇게 먼저 프론트를 일단 집어넣고... 그 다음 스로틀을 확 당겨, 그렇게 생긴 오버스티어로 코너 초반 방향을 크게 트는 거지....”
보통이라면 과속으로 여겨질 통상적이지 않은 테크닉. WD 팀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서준하의 주행을 바라봤다.
“도대체 저딴 방식으로 코너링을 하는데 어떻게 안 미끄러질 수 있는 거죠?”
“...”
옆에 있던 샤를 가도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방향 전환 후에 모멘텀을 잃으면 득보다 실이 클 텐데. 용케도 저런 코너링에 여러 번 성공하네요.”
코너의 에이펙스(apex, 정점) 직전, 서준하의 포뮬러는 마치 드리프트를 하듯 차체가 순간적으로 방향 전환에 성공했다.
“게다가 쟤는 주법만 특이한 게 아니에요. 아까 1차전 영상에도 그랬던 거 같은데. 저 녀석 거의 보편적으로 따르는 레코드라인을 안 타요. 그런 건 진짜 서킷 오래 타본 베테랑들이나 쓰는 방식인데, 저런 걸 누가 알려줬을까요?”
서킷을 공략하는 정석이라고 볼 수 있는 레코드 라인. 하지만 서준하의 포뮬러는 여러 가지 라인을 시도하며 자신의 주행에 맞는 라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감탄만 할 때가 아니야. 녀석의 약점을 찾아야 해, 약점을.”
경쟁 팀 분석을 위해 팀 전략가들과 레이서가 한 데 모인 자리.
3차전을 대비해 이렇다 할 전략이 나오지 않자, 페르난도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볼 땐, 서준하는 매 코너 포뮬러를 굉장히 타이트하게 몬다는 느낌이 강해. 그렇다면 디팬딩 능력은 좀 떨어질 텐데, 안 그런가?”
페르난도가 자신이 체크해놨던 코너링 장면을 재생시켰다.
“계속 저렇게 코너링하면 슬라이드가 나올 수 있고, 아니면 리어 쪽이 미끄러질 수도 있지. 그러니 코너링을 할 때 뒤에서 타이밍 좋게 압박만 잘 가한다면... 녀석이 쉽게 페이스를 잃을 수도 있지도 모르지.”
말을 마치고, 샤를을 비롯한 레이서들의 얼굴을 향해 고갤 돌린 페르난도.
“만약에 이번에도 역시 서준하가 또 다시 폴포지션을 차지한다던가, 어떤 경우에서건 우리 팀 앞에 위치한다면...”
잠시 말을 멈춘 페르난도. 허공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레이서들을 향해 고갤 돌렸다.
“자멸하도록 만들어야 해.”
직접적인 추월 전략이 아닌, 상대의 페이스를 무너뜨려 실수를 만드는 압박 전략.
“레이스 초반 모든 코너링에 지속적으로 푸쉬를 가하는 전략이 좋을 듯하네.”
매번 초반 서준하의 질주를 막지 못하자, 그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었던 WD의 포뮬러들. 레이스 초반 서준하를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에 레이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 서준하의 약점은 리어가 불안정 하다는 거야. 이점 꼭 기억하게.”
카트 대회 패배는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이라 여겼던 샤를 가도. 하지만, 이번 2차전에선 서준하의 리어 윙조차 본 적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리어가 약하다, 이거죠?”
무슨 일이 있어도 3차전 서준하를 꺾고 챔피언에 올라야 하는 샤를. 비장한 얼굴로 감독을 바라봤다.
***
곧바로 3차전이 열리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동한 스메들리 포뮬러 팀.
하루라도 일찍 레이스를 준비하기 위해 참가팀 가운데 가장 먼저 서킷을 찾았다.
[Circuit de Barcelona-Catalunya]
구름 한 점 없는 카탈루냐 서킷으로 탐사에 나선 레이서 팀.
“나도 여길 들락날락하는 게 꿈인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현역 시절 서킷을 몇 번 와봤던 롭이 옛생각에 잠긴 얼굴로 1코너로 향했다.
‘후, 여긴 항상 더운 곳이라니까.’
아스팔트 트랙 위로 내리쬐는 바르셀로나의 강렬한 햇빛. 서준하가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 그대로네.’
F1팀들은 매년 새로운 경주차를 개발해 프리시즌에 테스트한다. 그 테스트 주행이 열리는 서킷이 바로 이곳 카탈루냐. F1레이서들에겐 굉장히 익숙한 곳이자, 각자의 공략법이 있는 서킷이다.
1코너 진입까지 이어지는 내리막 코스로 들어선 스메들리 팀.
“카탈루냐에선 여기 말곤 추월 가능성이 높은 구간이 없어. 다만 주의해야 할 건 경사야. 자, 보이지?”
롭이 레이서들을 주목시키며 브레이킹과 코너링 조향 방법을 설명했다.
“여기서 대부분이 실수하는 게, 내리막에 주의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걸 까먹고 속도를 높였다간, 브레이킹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이지.”
레이스 전략을 설명할 때만큼은 진지한 롭. 그의 말에 레이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어 컨디션도 좋고, 브레이킹도 조절도 자신 있으면, 여기서 1코너에서 무조건 한 번은 추월 시도를 한다고 생각해. 다른 턴에서는 사이즈가 안 나오니까.”
정확한 추월 방법을 묻는 레이서들. 인코스 오버테이크 전략에 대해 물었다.
“그렇지, 앞차보다 조금 빠르게 타이밍을 잡아야해. 그렇게 순간적으로 브레이킹을 풀고, 살짝 가속해 차량의 방향만 돌려놓은 다음, 다시 감속해서 2코너를 돌아가면 멋진 추월이 나올 거야.”
구체적인 테크닉을 질문해도 마치 포뮬러에 탄 듯이 상세하게 설명하는 롭.
‘그게 말은 쉽지. 대부분은 저기 처박힐 텐데...’
롭의 말에 1턴 옆으로 널따란 자갈밭을 흘겨보는 서준하. 내리막 코스에서 추월은 그리 간단한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코너가 재밌는 건, 이런 테크닉한 방법으로 추월이 어려워도, 앞차를 압박하기 딱 좋은 곳이라는 점이야.”
카탈루냐의 1코너는 여러모로 뒤에 경쟁자를 둔 레이서에게 부담이 심한 코스다.
“그 말은 곧, 앞차를 압박해서 상대의 브레이킹 포인트를 망가뜨리는 테크닉이 흔히 나오는 곳이란 거지.”
“브레이킹 타이밍을 망가뜨려요?”
“멘탈 브레이킹이나 페이스 브레이킹이라 말, 처음 듣나?”
롭의 말에 그저 눈을 감았다 뜨는 에릭과 닐.
“계속 추월을 시도할 듯한 뉘앙스를 보이면서, 상대방의 감속이랑 조향하는 타이밍을 망가뜨리는 거야. 그러면 한 번쯤은 탈선하게 되는데, 그때 추월을 노리는 거지.”
레이서들의 표정을 살피던 롭이 서준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준하야, 3차전 만큼은 너한테 모든 압박이 집중될 거야.”
1,2차전 우승을 차지한 서준하. 3차전 만큼은 많은 팀들에서 서준하의 질주를 방해할 게 뻔해 보였다.
“레이스 당일, 아마 여긴 전쟁터가 될 거야.”
걱정스런 표정의 롭을 향해 그저 고갤 끄덕이는 서준하.
‘전쟁터라...’
이런저런 옛생각에 잠겼던 서준하. 경각심을 불러세우는 그의 말에 익숙한 1코너 라인을 바라봤다.
***
3차전 연습 주행이 있는 날. 오로라 모터즈 피트로 손님이 찾아왔다.
“오, 선배. 바르셀로나까지 오신 겁니까?”
“밀라노에서 그냥 떠나려고 했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말이지. 3차전도 보고 가려고 하네.”
피트에 들어서자마자, 서킷 위를 살피는 앙드레. 그를 발견한 티아고가 한걸음에 달려나왔다.
“막내 아드님을 보러 오신 거죠?”
“아니 뭐, 우리 직원들이 보고가자고, 그렇게 난리를 피워서 말이야...”
자신과 대화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트랙 위 포뮬러카로 향한 앙드레. 그 모습을 티아고 감독이 포착했다.
“걱정 마십쇼, 선배.”
“무슨 걱정?”
“제가 예전에 케빈이 선배를 많이 닮은 거 같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는데, 기억하세요?”
“허허, 또 이상한 소릴 하네.”
데뷔전을 치루고 돌아온 스페인으로 돌아온 오로라 모터즈. 티아고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길 꺼냈다.
“엔트리급 팀이 주니어 레이서들한테 기대하는 건 사실 빠름이나 능숙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제가 선배 앞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케빈은 모터레이싱 이해 능력이 다른 아이들 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 같아요. 우리 팀 테스트 드라이버들 가운데 흡수력이 가장 좋습니다.”
팀이 어린 선수들에게 기대하는 건 바로 적응력. 다년간 많은 주니어 레이서들을 디렉팅했던 티아고에게 케빈 프로스트는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은 제가 좀 일찍부터 큰 무대에 데리고 다니고 싶었어요.”
“그래, 고맙네, 티아고.”
“여태껏 연습하고 빠른 녀석들은 있지만, 처음 타보고 즉석에서 빨라지는 녀석은 없었어요. 하지만 케빈은... 모든 트랙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한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뷔전엔 리타이어 했지만, 3차전엔 우승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해요.”
“그럼, 그래야지. 저 나이에 유로컵을 경험할 수 있는 레이서가 몇이나 되겠어.”
천부적인 모터레이싱 능력을 타고난 레이서는 많지만, 그 레이서가 연습 벌레인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케빈은 부족한 서킷 경험을 채우기 위해 짬이 날 때마다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는 노력형 천재였다.
두두두두두둥.
때마침 연습 주행을 마치고 피트로 복귀한 케빈 프로스트. 피트에 대기 중인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2차전이 끝나고부터는 케빈이 달라졌어요. 이번 대회에서 레이스가 어떤 건지 제대로 느낀 듯해요.”
평소 밝고 천진난만했던 막내 레이서의 눈빛이 어딘가 달라져 보였다.
“아마도 저 친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구만, 나도 놀랐어. 주니어 선수 답지 않은 실력이더구만.”
피트 레인 주변을 걷는 코리안 레이서. 두 사람 모두 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케빈 말로는 레이스하면서 그렇게 기분 나빴던 적은 처음이었다네요. 시작부터 끊임없이 압박이 심했죠. 몇 번은 일부러 안 들어오면서, 자기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을 받았나 봐요...”
“기분 나쁠 거 없지. 케빈 스스로 공부가 됐을 레이스였네.”
앙드레 역시 거슬렸던 코리안 레이서의 드라이빙. 레이스 이후 아들의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다.
“맞아요, 오히려 큰 자극이 된 거 같다니까요. 무엇보다 2차전 레이스 이후에 선배랑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어요.”
역대 F1 월드 챔피언 4회에 빛나는 레이서, 앙드레 프로스트. 아일톤 세나와 함께 8,90년대를 풍미한 모터스포츠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3차전은 기대하셔도 괜찮습니다.”
비장한 표정의 티아고 감독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자기 아버지를 똑 닮았어요. 선배 별명 그대로더군요.”
항상 철저한 분석과 연구로 경기에 임했던 전설의 F1 레이서 앙드레.
“서킷의 위의 교수(professor). 부자가 완전 판박입니다.”
데뷔전을 마친 케빈. 온갖 주행 데이터를 비교해가며 3차전 출전 차량의 세팅 값을 직접 조정했다.
“이번 레이스에선 절대 지지않을 겁니다.”
감독의 말에 앙드레가 흡족한 얼굴로 케빈을 바라봤다.
< 레이스 당일, 아마 여긴 전쟁터가 될 거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