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서는 레이서들이 욕심을 버려야 랩타임이 올라갈 겁니다 >
세 선수의 동시 어택에 가장 놀란 건 WD 레이싱의 코치진들이었다.
“케빈, 저 녀석은 1차전에는 충분히 워밍업 하고 들어갔잖아. 저런 풋내기가 왜 여길 따라 들어오는 거야!”
샤를의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 파우 옆으로 걸어가는 페르난도 감독. 당황스런 표정으로 피트 월 상황판을 살폈다.
“하, 저 녀석도 스메들리 레이서가 엄청나게 거슬렸나 보구만...”
페르난도가 곁에 서자, 라디오의 마이크 기능을 off한 파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흠,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할까요? 뒤에서 한 명이 더 붙을 줄은 예상 못 했네요...”
시작 전 초반 어택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던 샤를 가도. 엔지니어의 말을 들은 페르난도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다시 상황판을 바라봤다.
“케빈 프로스트...”
이번에도 서준하가 가장 먼저 초반 어택에 들어갈 것으로 예측한 WD 팀. 또 다른 경쟁자의 어택에 당황하고 말았다.
“예상 밖의 변수가 생겨버렸구만, 이거.”
1,2차전 모두 예선 1위를 만들고 3차전 카탈루냐에 온 서준하. 이번에도 폴포지션을 차지한다면, 그의 우승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어떻게든 그의 기록을 늦춰야 하는 상황.
“어떻게 할까요, 페르난도.”
고민이 길어질수록 베스트 기록을 만들 가능성이 떨어지는 상황에 파우가 당황하고 말았다.
“어차피 케빈은 2차전에서도 리타이어 했던 녀석이고, 리저브 였던 레이서라 금방 뒤처지지 않겠습니까?”
페르난도의 걱정과는 반대로 파우의 눈엔 케빈이 그닥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두 바퀴만에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떨어져 나갈 케빈의 포뮬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니야, 아니야. 카탈루냐는 오로라 팀도 여러 번 찾았을 거라고. 저번에 선두까지 올라간 건 우연이 아니야. 충분히 실력이 있는 선수야...”
파우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페르난도 감독. 서준하 만큼이나 케빈의 데뷔전은 인상적이었다. 케빈은 어리고 경험없는 선수였지만, 저런 자신감을 보이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 둬! 여기서 속도를 늦춰서 리듬을 깨는 건 좋지 않아. 연료량도 그렇고, 초반 우리 전략에서 너무 벗어나.”
레이스 초반 어택 전략에 맞춰져 있는 샤를의 차량 세팅 값. 템포를 늦춰 중반 어택을 노리는 건 자신들에게 불리해 보였다.
“샤를은 뭐래?”
“해보겠답니다.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넘쳐요. 다행히 지금까지 주행 라인도 연습 때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보죠.”
감독의 말에 다시 상황판을 살피는 파우. 어택 당시 자신의 뒤에 붙은 케빈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던 샤를의 무전 내용이 떠올랐다.
“뒤차는 신경 쓰지 말고, 원래 전략대로 최대한 압박하라고 해. 샤를은 그대로 간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페르난도가 다시 서킷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서준하가 폴포지션을 차지하면, 그땐 진짜 끝이야.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해.”
***
3차전 카탈루냐 서킷을 찾은 윌리엄. 특유의 흥미로운 표정으로 타임 트라이얼 중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윌리엄, 쟤들 왜 저렇게 준하 뒤에서 달리려는 거죠? 오늘은 본선 레이스도 아니잖아요.”
그의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한서윤. 혹시라도 서준하가 잘못될까 걱정스런 얼굴로 서킷을 바라봤다.
“이러다 뭔 일 날 것 같아. 진짜 초반부터 불안해 죽겠네, 정말...”
타임 트라이얼은 어느 정도 서킷을 익히다 자신감이 올라왔을 때 최후의 한두 랩으로 기록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 퀄리파잉은 초반부터 내지르는 본선 레이스가 아니었다.
서준하를 시작으로 스타트 라인을 통과한 3대의 포뮬러들.
“준하! 베스트랩!”
전광판에 표시된 랩타임에 한서윤이 소리를 질렀다.
“준하가 또 제일 빨라요! 뒤에서 아무리 방해해봤자, 준하보다 느리네!”
“흠...”
기뻐하는 한서윤의 반응과 달리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윌리엄.
“허허, 뒤에 두 선수도 랩타임이 계속 오르고 있어.”
습관처럼 경쟁 상대의 랩타임을 모두 체크하던 윌리엄.
“내가 볼 땐, 뒤에 두 선수들도 이번 서킷만큼은 작정하고 나온 거 같네.”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서준하의 랩타임은 계속해서 빨라졌지만, 그건 서준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 초반에 기록을 만들겠다는 전략이야. 세 명 다 자신감이 엄청나.”
한 템포도 쉬지 않고 연이어 어택을 시도하는 샤를과 케빈. 레귤러 레이서들의 대회에서나 볼법한 초반 치열한 타임 트라이얼 접전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저! 저! 바로 뒤에 WD 모터즈! 어떻게든 준하 뒤에 붙으려고 안달이 났네, 아주.”
9코너 초소형 헤어핀을 빠져나가는 서준하의 포뮬러. 그 뒤를 추격하는 샤를의 차를 한서윤이 노려봤다.
“저 차는 아마도 초반부터 서준하 견제하려는 전략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든 준하의 페이스를 망가뜨리려는 거 같구만.”
“...우리 준하 선수 어떻게 해.”
타임 트라이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페이스다. 페이스를 유지해야 실수가 줄고, 그래야 클린랩이 가능하다. 윌리엄의 말에 심각해진 한서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그렇게 걱정할 거 없네. 그런 전략은 F1 레이서들도 버거워 하는 전술이니까.”
“그래요?”
서준하를 뒤쫓는 샤를의 포뮬러가 중계 화면에 포착됐다.
“앞차를 신경 쓰다보면 자신의 주행도 놓치기 쉬운 법이니까.”
서준하의 뒤이어 어택에 나선 세 포뮬러카들. 윌리엄이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누가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가 승부겠구만.”
***
“3코너 초대형 헤어핀에 진입하는 서준하!”
타임 트라이얼 5바퀴 째.
1,2코너 완벽한 트레일 브레이킹으로 최대한 속도를 살린 서준하가 카탈루냐 서킷에서 가장 큰 헤어핀에 진입했다.
“계속 첫 진입 시점을 다르게 잡고 있어요. 서준하! 자신만의 라인을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모습입니다.”
스메들리 포뮬러가 3코너를 탈출하는 모습이 중계화면에 담겼다.
“자, 이번엔 샤를 가도의 코너링을 한 번 볼까요?”
그와 동시에 3코너에 진입하는 또 다른 포뮬러 한 대. 중계진이 샤를의 코너 진입 지점을 살폈다.
“샤를, 가장 정석적인 코너링입니다. 첫 진입을 빠르게 하기보다는 CP를 조금 일찍 찍으며 진입하는 샤를 가도!”
탈출 가속 시점을 빠르게 가져가기 위해 보편적인 드라이빙 라인으로 코너링하는 샤를 가도.
“그리고 한 명 더 있죠! 샤를 뒤로 3코너에 진입하는 케빈 프로스트!”
대형 헤어핀을 빠져나간 샤를 가도. 뒤이어 케빈의 빨간 포뮬러가 코너에 진입했다.
“이번 서킷, 분석을 많이 한 듯한 케빈의 주행입니다!”
“데뷔전에서도 숏런이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죠? 3차전에서 침착한 주행을 보여주며 본인의 베스트 타임을 연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쉼 없이 어택하는 레이서들. 그 모습에 바쁜 중계진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지금 이거 레이스가 아니죠?”
“하하하, 말씀하신 것처럼 퀄리파잉이 이렇게 레이스 같은 느낌을 주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그러니까요. 최고 기록을 만들어 내겠다는 세 선수의 의지가 마치 레이스를 펼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쿨링 없이 연신 박차를 가하는 모습, 마치 본선 레이스를 중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준하를 시작으로 세 선수의 계기판이 차례로 중계화면에 잡혔다.
“샤를, 케빈 그리고 서준하. 아직도 템포를 늦추는 선수가 없습니다.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예선전인데요!”
세 선수의 계기판 모두 스로틀 게이지가 연신 풀로 찬 모습. 직선 주로에서 최고속에 달한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자, 말씀하신 순간. 4코너를 빠져나오는 포뮬러들. 이번에는 5코너입니다!”
내리막 헤어핀과 한계속도가 100km/h 미만인 작은 헤어핀. 정확한 브레이킹 타이밍과 부드러운 릴리즈 그리고 재빠른 재가속 3박자가 맞아야 쉽게 돌 수 있는 구간이다.
“여기서는 레이서들이 욕심을 버려야 랩타임이 올라갈 겁니다. 한 번 보시죠!”
먼저 5코너에 진입한 서준하의 포뮬러.
“서준하! 어중간한 에이팩스를 잡고 진입하는데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서준하의 어정쩡한 진입 시점에 캐스터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니에요. 저건 일부러 저렇게 잡은 것 같은데요?”
캐스터의 말과 달리 크게 속도를 떨어지지 않고 탈출 내리막에 들어간 서준하.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끼이익.
좀전과는 다른 진입시점에 중계진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특정 코너에서 다양한 라인을 그리는 서준하! 어정쩡했던 진입 시점과 반대로 깔끔하게 5코너를 빠져나갑니다!”
이어서 뒤따르던 샤를 가도가 5코너에 진입했다. 서준하와 달리 최대한 브레이킹 타임을 늦게 가져가는 샤를.
“샤를처럼 레이트(late) 에이팩스도 괜찮지만, 그렇게 되면 탈출시간이 늦어질 텐데요. 자, 샤를의 코너링을 볼까요!”
모든 코너마다 그에 맞는 적합한 진입 방식이 있는 법. 중계진의 말처럼 샤를은 5코너 탈출 시간이 느려 보였다.
“그렇죠. 아쉽게도 속도가 확 줄었습니다, 샤를!”
탈출 속도가 떨어지자, 이어진 내리막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스로틀을 당기는 샤를. 그리고,
“타이밍이 좀 빠른데요!”
끼이이이익.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에요오오오오!”
6코너로 향하는 내리막. 빠르게 재가속 하는 샤를이 카메라에 잡혔다.
“아아아아아아!”
“실수가 나옵니다!”
뒷바퀴가 미끄러지며 스키드음을 내는 WD의 포뮬러.
“아! 샤를 이번 랩 망했습니다. 언제 다시 속도를 올리나요!”
재가속 타이밍에 욕심을 부린 샤를 가도가 결국 뿌연 스모크를 내며 스핀하고 말았다.
“그리고 케빈! 뒤따르던 케빈이 샤를의 옆을 지나갑니다!”
서준하와 비슷한 라인으로 5코너에 들어선 케빈 프로스트.
“케빈도 어중간한 지점에서 브레이크를 밟죠!”
마치 서준하의 주행을 보고 배운 듯, 진입 시점을 다양하게 가져가는 케빈의 포뮬러.
부우우우우웅.
끼이이익.
“탈출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 케빈. 차분하게 속도를 올리며 5코너를 빠져나갑니다!”
5코너를 나와 재가속 타이밍을 보던 케빈. 안정적으로 속력을 높이며 6코너로 들어섰다.
“7바퀴를 마치고 스타트라인을 통과하는 스메들리의 서준하! 그 뒤를 추격하는 오로라 모터즈의 케빈 프로스트!”
띠링.
컨트롤 라인을 통과하자, 측정된 랩타임.
“케빈 프로스트! 샤를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2위에 올라섭니다!”
7바퀴째 2위 샤를의 기록을 넘어선 케빈. 오로라 피트가 난리가 났다.
부우우우우우웅.
-준하, 이제 8랩이야. 잠깐 템포를 줄여
벌써 쿨링에 들어갔어야 하는 상황. 롭이 다소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케빈?”
윙미러에 케빈의 포뮬러카가 보였다. 7바퀴를 전력으로 달린 서준하.
“아니, 한 번 더 간다.”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다시 어택에 들어갔다.
< 여기서는 레이서들이 욕심을 버려야 랩타임이 올라갈 겁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