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저 선수 약점이 하나도 안 보여요 >
출구를 빠져나온 서준하. 난타전을 예상했던 모두의 기대와 달리, 뒤차와는 다소 격차가 있었다.
“서준하! 선두는 다시 서준하가 가져갑니다!”
피트 레인 출구만 바라보던 해설진들. 곧바로 1코너 진입 전 홈스트레치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오히려 싸움은 뒤에서 벌어지는데요?!”
브레이킹 실력에 따라 추월의 성패가 갈리는 1코너. 순간적으로 브레이킹을 푼 케빈.
“케빈의 포뮬러가 샤를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갑니다!”
다시 살짝 가속해 차의 방향만 돌려 놓으며, 2코너 진입에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케빈! 샤를의 인코스를 파고듭니다!!!”
카탈루냐 서킷의 추월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구간에서 멋진 턴과 함께 성공한 케빈.
“그대로! 그대로 가속! 케빈 추월 성공입니다!”
보기 드문 테크니컬한 추월에 갤러리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짜릿합니다! 지루했던 관중들에게 멋진 오버테이크를 보여주는 케빈 프로스트!”
2코너 탈출, 재가속이 더 빠른 케빈이 샤를의 포뮬러 앞에 섰다.
“속도를 높이는 케빈! 기세로 봐서는 서준하까지 따라잡겠다는 모습입니다!”
이번 레이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추월 장면.
“와아아아아아!!!”
1코너 주변 스텐드에 자리한 갤러리들이 환호했다.
“샤를이 빈틈을 보인 것도 있지만, 좀전의 케빈의 오버테이크는 확실히 테크니컬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코너가 유일한 추월 구간이긴 하지만, 난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추월을 시도하는 차량 대부분이 중심을 잃고 모래밭으로 빠져버리는 1코너거든요. 확실히 이번 레이스 연습을 많이해 본 듯한 케빈입니다.”
1,2코너부터 추월 경쟁부터 3코너 헤어핀를 빠져나가기까지. 중계진의 칭찬에 따라 케빈의 단독샷이 계속 화면에 나타났다.
“자, 샤를도 포기하지 않죠. 이젠 샤를이 다시 케빈의 뒤를 추격합니다!”
“지금 두 선수 차의 컨디션이 굉장히 좋은 듯합니다. 앞선 랩보다 훨씬 공격적이에요.”
케빈의 윙미러로 보이는 샤를. 다시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려 열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오는 건 오로라 모터즈의 티아고 감독이네요. 굉장히 뿌듯한 미소를 짓는군요.”
이어서 등장한 오로라 팀의 피트 월. 피트 월 엔지니어들과 긴밀히 대화를 나누는 티아고 감독이 클로즈업 됐다.
중계진의 말처럼 오늘 경기 케빈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더 오른 티아고 감독. 레이서 팀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춰 무전을 날렸다.
“케빈, 선두 랩타임에 변동이 없어. 이번 랩부터 격차가 조금 줄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감독의 무전. 어딘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 케빈이 차분하게 답했다.
-해볼 만해요. 아직 선두가 안 보일 정도는 아니니까.
케빈의 시야로 13코너에 진입하는 서준하의 포뮬러가 보였다. 샤를 때문에 놓쳤던 서준하라는 타겟. 이제야 자신의 진짜 상대를 발견한 케빈이 좀 더 과감한 드라이빙을 시도했다.
***
끼이이이이이익.
쿵.
“오늘 바람도 많이 불어. 이런 날에 저기 턴4는 진짜 무서운 곳이라니까.”
F1 바쿠 시티 서킷과 더불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카탈루냐 서킷. 4코너에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바람으로 다운포스를 잃은 포뮬러 한 대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전반적으로 차들이 좀 느리긴 한데, 몬트멜로(Montmelo)치고는 꽤 흥미진진하네?”
2014년 현재 F1에서 활약하는 유일한 여성 드라이버 앨린 울프. 다음주에 있을 윌리엄스 팀의 F1차량 테스팅을 위해 바르셀로나 몬트멜로를 찾았다.
“그러니까요, 앙드레 프로스트의 아드님이 출전하셨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재밌어 보이네요.”
“앙드레 프로스트? 그 엄청 무섭게 생긴 아저씨?”
전 윌리엄스 팀의 공동 소유주이자 현재 메르세데스 AMG F1팀의 수장, 테오 울프. 그가 가장 아끼던 레이스 엔지니어 빅토르가 서킷 위에 빨간 포뮬러를 가리켰다.
“저기 선두 뒤에 빨간 차가 맞을 겁니다.”
“아아, 그렇구나아. 근데 아까부터 턴9에서 좀 불안해 보이던데...”
케빈의 포뮬러를 다시 바라보는 앨린 울프. 진입과 탈출의 높이차가 큰 9코너에서 2위 레이서는 매번 크게 흔들렸다.
“저러다 사고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자칫하면 큰 사고를 겪을 수도 있는 턴으로 어린 레이서들의 주행을 맘 졸이며 관람하는데,
부와아아아아아앙.
휑.
앨린과 빅토르가 자리한 메인 스텐드. 그 앞으로 선두 포뮬러카가 지나갔다.
“저렇게 계속 빨리 달리는데, 실수 한 번 없이 계속 선두를 유지하네.”
“그러니까요. 울퉁불퉁한 범프가 많아서 실수가 나올만도 한데. 선두 차는 중반 넘어서까지 잘 버티네요.”
“잉? 잘 버티는 건가?”
상설 서킷임에도 노면 상태가 좋지 않은 카탈루냐 서킷. 재포장을 앞두고 그닥 적절한 관리가 들어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잘 버티는 게 아닌 것 같아. 버거운 느낌이 하나도 안 드는데? 나는 저 선수 약점이 하나도 안 보여요.”
주행 중 참가자들의 단점을 쉽게 캐치해냈던 F1 레이서 앨린. 레이스 중반이 넘도록 단 한 랩에서도 흠을 남기지 않는 서준하의 레이스를 두고 감탄조로 말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야. 선두권에선 타이어도 제일 늦게 교체했어. 애초에 타이어 관리 능력이 압도적인데?”
“흠, 그러네요.”
케빈의 차량 말곤 관심이 없던 빅토르. 선두 차를 유심히 살피고는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선수는 마모도가 낮을 수밖에 없어요. 지금 턴1,2에 들어가는 걸 보면, 선두 차는 악셀을 어느정도 자제하는 게 드러납니다. 저 구간은 오른쪽 프론트에 하중이 심하게 걸려서 타이어가 오버 히트하게 만들 거든요.”
1코너 진입시 다소 속도가 떨어지는 서준하의 포뮬러카. 하지만 그 다음 헤어핀 진입 라인을 매끄럽게 이으며 떨어진 속도를 금방 회복했다.
“이제 뒤차를 보시죠. 저렇게 1코너 진입에서 풀스피드로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레이스 종반까지 오른쪽 프론트를 살리내는 게 쉽지 않을 거고. 마모도가 심해져서 결국엔 더 느려질 겁니다.”
앨린이 느꼈던 직관적인 느낌을 명확한 설명으로 풀어내는 빅토르. 오랜 세월 F1 무대에서 퍼포먼스와 레이스 엔지니어 생활을 겸임하며 쌓아왔던 안목을 드러냈다.
“그렇구나, 쟤는 스카우터들한테 말 좀 해봐야겠어. 여기 레벨이 아니데?”
2,3위 차량 간의 쟁탈전을 지켜보는 두 사람. 저 멀리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오는 서준하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어머, 쟤 좀 봐. 방금 봤어요?!”
1km에 가까운 카탈루냐의 홈스트레치. 무언가 발견한 앨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준하의 포뮬러카를 가리켰다.
***
“자, 다시 보시죠!”
중계화면으로 서준하가 홈스트레치를 지나는 모습이 리플레이 됐다.
“분명히 하늘로 찌르는 손동작이었거든요?”
“서준하 선수만의 세레머니인가요?”
홈스트레치에서 속도를 올리며 스티어링 휠에서 손을 놓은 서준하.
하늘을 향해 찌르는 듯한 동작을 보이며 고개를 든 후, 다시 휠을 잡는 모습이 등장했다.
“팀에게 어떤 사인(sign)을 보낸 거 같기도 하고요.”
레이스 종반, 의미를 알 수 없는 서준하의 손동작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중계진들.
“그렇죠, 무전이나 통신 오류가 생긴 경우에 레이서가 손짓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니까요.”
이어서 중계 화면에 등장한 스메들리 피트에서도 별다른 특이사항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레이스 다시 보시죠!”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수웅.
“자, 14코너 다시 샤를이 케빈의 슬립스트립에 들어갑니다!”
재빠르게 넘어간 화면, 2위 자리를 두고, 두 선수의 쟁탈전이 다시 벌어졌다.
“오늘 2위 싸움이 정말 치열한데요. 케빈 14코너 바깥쪽으로 밀리자, 샤를이 곧바로 치고 나옵니다!”
홈스트레치에 올라선 샤를과 케빈의 포뮬러. 샤를이 2위에 오르며, 케빈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자! 이번엔 샤를이 서준하를 뒤쫓습니다!”
샤를에게 주목된 중계진의 관심. 케빈에게 고전하던 샤를이 막판 스퍼트를 냈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에 잡힌 서준하의 포뮬러.
“...!!!”
“언제 저기까지 간 거죠?!”
서준하의 위치를 보고 깜짝 놀란 중계진들. 턴9의 아주 작은 헤어핀을 돌아나가는 포뮬러가 화면에 잡혔다.
“서준하! 어느새 뒤차와의 간격을 어마어마하게 벌렸습니다!”
이상한 행동 이후 압도적인 스피드로 주행하는 서준하. 한 코너에서도 조금도 초(sec)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못 따라가요! 못 따라가요!”
2,3위 경쟁을 지켜보던 잠깐 사이 너무 멀어진 스메들리의 포뮬러카에 모두의 시선이 고정되는데,
“이거 갑자기 부스터를 쓴 것도 아닐 텐데요!”
이전보다 확연히 차이나는 속도. 날카로운 코너 각도에도 브레이킹을 깊게 가져가며, 조금의 여유도 없이 코너링에 성공하고 있었다.
“서준하 갑자기 어딘가 달라졌어요. 그나마 흠잡을 데라면 여기였죠, 14코너! 아까는 탈출 속도가 조금 늦었었는데요!”
중계진의 예측과 달리 이번에는 코너 안쪽 연석을 물고 재빠르게 탈출하는 서준하. 다시 홈스트레치에 들어섰다.
“와우, 방금 이 턴은 거의 예술인데요. 밀려날듯 말듯 연석 끝까지 올라타 치고 나갑니다, 서준하.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번 랩 작정했습니다!”
“계기판 보시죠! 게다가 탈출 이후에는 속도를 안 줄입니다아아아!”
후미와 격차가 계속 벌어지자, 이번엔 서준하의 개인 화면이 등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하늘을 찌르는 서준하!!!”
직선 주로에서 또 다시 등장한 손동작. 지켜보던 중계진 한 명이 재빠르게 말을 꺼냈다.
“저건 서준하 선수만의 루틴(routine)이지 싶은데요?”
“루틴이요?”
“야구 선수들은 타격 자세를 취하기 전에 예비 동작들을 취하잖아요. 갑자기 확 변하는 걸 보니까 왠지 그런 비슷한 게 아닐까요?”
해설자의 말이 맞았다. 하늘을 찌르는 행위는 최상 수행을 위해 몸에 기억해둔 감각을 이끌어 내는 ?서준하만의 루틴이었다.
‘단 한 턴에서도 미스를 내지 않는다.’
파이널 랩에 가까워지자, 이번 대회 진짜 목표를 위한 자신만의 동작을 취했던 서준하.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고, 다가오는 코너에 집중했다.
“빨라요! 확실히 빨라졌습니다. 누가 카탈루냐 서킷이 지루하다고 했습니까!”
이전보다는 조금 빠르게 안으로 파고들어 순간적으로 차의 방향을 바꾸는 서준하.
“9코너를 빠져나오는 속도가 엄청난데요!!!”
이어지는 코너에서도 미스 하나 없이 빠져나가는 그의 차량.
“와하하!! 여태껏 단 한차례 실수도 없었는데요오오오!”
최소한의 브레이킹만으로 코너링하는 서준하. 그만큼 압도적으로 스피드를 냈다.
“와! 서준하! 1코너, 9코너, 14코너. 이렇게 세 군데가 아쉬웠었는데요. 이번 랩에선 세 곳 전부 흠잡을 데 없는 주행을 보여줬습니다!”
파이널 랩 직전, 서준하의 포뮬러가 단독샷에 잡히는데,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끼익.
컨트롤라인을 통과하고, 서준하의 랩타임이 측정됐다.
띠링.
“와아아아아아아!”
놀라운 결과에 자리에서 일어난 갤러리들.
“서준하! 마지막 레이스에서 환상적인 드라이빙을 보여줍니다!”
누구보다 빠르고, 빠른 것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줘야 하는 무대.
F1 프리시즌 테스트 주행에서 목표로 삼았던 슈퍼 클린랩(Super Clean lap)이 나온 순간이었다.
“서준하! 3연속 우승으로 유로컵 챔피언 달성을 합니다!!!”
이 레이스의 마지막 몇 바퀴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니어 포뮬러 대회에서 처음으로 스피드에 전율을 느꼈다고.
< 나는 저 선수 약점이 하나도 안 보여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