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데 이름을 가린다고, 실력까지 가려지겠어요? >
두두두두둥.
“어! 왔다!!!”
영국 벤버리에 스메들리 포뮬러 팀의 게러지. 5톤 대형 카고 트럭이 들어사자, 대기 중이던 미캐닉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치익.
척.
차에서 내린 기사들이 싣고 온 박스들을 게러지 앞으로 내리자, 미캐닉들이 박스를 들고 이동했다.
분주한 스메들리 팀원들. 박스 열댓 개를 들고 나르느라 진땀을 뺐는데,
“엔진, 섀시, 타이어... 다 제대로 도착한 거 같고.”
미캐닉들이 옮긴 박스들을 부품 별로 분류한 헨리 가슬리가 검품을 마쳤다.
“제이크랑 레리 그리고 내가 엔진 조립을 맡을게. 나머지 미캐닉들은 프레임을 이어줘.”
미캐닉들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7세 무렵부터 레이스카 정비사의 길로 뛰어든 숙련공들. 헨리가 팀원들에게 신형 F3 차의 조립을 지시했다.
“달라라(Dallara) 섀시네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3대의 포뮬러카. 곁으로 서준하가 다가섰다.
“응, 이번에 나온 F312 신형. 한 대에 10만 파운드가 넘는 녀석이지.”
F3의 시스템은 F1과 다르다. 팀이 직접 섀시를 제작해야 하는 F1의 컨스트럭터 시스템과 달리, F3는 섀시와 엔진을 여러 공급처로부터 구입한다.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이탈리아 섀시 메이커 달라라다.
‘와, 미치겠네. 이거...’
번쩍번쩍 광이 나는 프레임을 만지던 서준하가 흐뭇한 얼굴을 감추지 못 했다.
“하하, 기분 좋지? 엔진은 Mercedes-AMG의 F3-414, 전에 탔던 포뮬러보다 훨씬 빠를 거야.”
포뮬러 르노 대회에서 탔던 엔진과 비슷하게 4기통 2L 엔진이지만, 엔진 자체의 출력이 다르다. 어떠한 전자 시스템도 들어가지 않은 F3 차는 기어박스 또한 시퀸셜이 아닌 일반 수동기어다.
“자, 그럼 준하 너 먼저 셰이크다운(shake-down)을 해볼까?”
셰이크 다운, 조립차에 이상 유무를 알아보는 주행. 조립을 마친 헨리가 서준하를 향해 물었다.
***
“차가 많이 흔들릴 거야. 처음에는 너무 속도를 높이지 말고, 브레이크, 스로틀, 기어 박스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만 한 번 봐줘.”
미리 시동을 걸어 엔진을 데워둔 미캐닉들. 준비 사인이 떨어지자, 트랙으로 나가는 출구 근처로 차를 밀었다.
두두두두두두둥.
헨리를 비롯한 미캐닉들은 물론 서준하에게도 감격스러운 순간. 새로운 차량의 기막힌 엔진음이 피트로 울려퍼졌다.
“스메들리의 첫 F3 차야, 잘 부탁한다. 서준하.”
헨리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콕핏에 앉은 서준하. 그 역시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스티어링 휠을 잡았다.
‘그래, 이런 진동이 있었지.’
등허리로 느껴지는 묵직하고도 빠른 진동. 전생에 탔던 포뮬러 카의 감각들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셰이크 다운, 스타트!”
녹색기가 휘날리고, 서준하가 올라탄 새 경주차가 선웨이 서킷에 들어섰다.
부우우우웅.
슈웅.
‘확실히 민감한 차야.’
레이서의 움직임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포뮬러카.
‘그렇지, 시야가 이 정도 높이는 돼야지.’
이전보다 훨씬 커진 차의 바디 덕분에 높아진 시야.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노면에서는 허리로 찌릿찌릿한 감촉이 전해졌다.
피트 레인을 빠져나가며 선웨이 서킷에 오른 서준하.
-준하, 브레이크는 천천히 밟아야 해. 코너에 들어갈 때는 진입 속도를 무조건 낮추고, 너무 빨리 달려선 안 된다?
라디오로 들려오는 헨리의 목소리. 더욱 선명해진 음성이 듣기 좋았다.
부우우우웅.
끼이익.
새 차량이라고 해서 다 좋았던 건 아니다. 보다 단단한 차체 탓인지, 타이어에 열이 잘 올라오지 않았다.
“헨리, 리어의 그립감이 많이 떨어져. 프론트가 딱 달라붙은만큼 뒤는 불안정한 느낌이야.”
셰이크 다운 시작부터 곧바로 상세한 피드백을 전하는 서준하. 그의 무전에 헨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이번엔 더 밟아보자, 6000 회전에서 마지막 시프트업. 그 이상을 넘어가면 무리가니까 조심하도록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와 백 스트레치에 접어드는 포뮬러 카. 헨리가 고속 주행을 지시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스타트라인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직선 주로. 계기판 속도계가 순식간에 200km/h를 넘어섰다.
끼이이익.
1코너 앞에 도달한 서준하. 빠르게 속도를 줄이며 코너링에 들어가는데,
-야! 준하! 방금 너무 빨리 속도가 떨어졌는데?!
급감속에 놀란 헨리가 곧바로 무전을 날렸다.
-스킵 시프트한 거 아니야?
기어 변속시 한두단 정도를 뛰어 넘어 변속하는 스킵 시프트. 자동 변속기능이 없는 이번 새 차량에는 무리가 갈 수 레이서의 실수다.
“아니, 제대로 내렸어.”
헨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재빠르게 시프트 다운하며, 능숙하게 기어 변속에 성공한 서준하.
-정말로? 급감속 했었는데...?
헨리가 아는 서준하는 수동기어 경험이 없었다. F3 레이스 카를 첫 주행하는 레이서의 테크닉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순간,
부우우우우웅.
끼이익.
4코너를 빠져나와 속도를 올렸던 포뮬러 카. 다음 코너 진입 전 또 한번 빠르게 속도가 줄며 코너링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준하, 너 수동기어는 처음 아니야?
연속적으로 부드럽게 변속에 성공하는 서준하. 피트에 선 미캐닉 모두 그의 능숙한 드라이빙에 감탄을 쏟아냈다.
‘흠, 처음은 아니고, 한 2천 번째?’
전생 역시 수차례 F3 레이스카를 몰았다. 다시 한 번 빠르게 속도를 줄인 서준하가 마지막 코너에 진입했다.
***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에 위치한 무젤로(Mugello) 서킷.
“제프. 파이널 랩에서 1분 59초 876를 기록했습니다!”
“역시 기대했던 그 이상이네요.”
F3 유로피언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이탈리아 최강팀 프리마 레이싱. F3 카의 기록으로 2분의 벽을 넘어선 레이서가 등장했다.
“2분을 넘었어요? 하하, 가르친 보람이 있는데요?”
“확실히 페라리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다른 것 같네요, 치로.”
프리마 레이싱의 총감독 조르조. 흐뭇한 미소와 함께 페파리 드라이버 아카데미 프로그램의 담당자 치로를 바라봤다.
“흠... 오늘 제가 좀 많이 놀랐습니다. 페트로의 기록도 지금 기존 프리마 F3 선수들보다 괜찮고, 이정도 실력들이라면... 대회 나가서도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합니다. 제프와 페트로, 두 선수 모두 유로피언 챔피언십에 내보내겠습니다.”
페라리 아카데미는 직접 팀을 꾸려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프리마 팀 소속으로 선수들을 출전시킨다. 테스트 통과에 치로가 감사를 표시했다.
“유로피언 챔피언십은 경력자들이 꽤 나오잖아요. 제프랑 페트로 둘다 아직 많이 어린데, 괜찮을까요?”
영국의 콜린과 루나 레이싱, 독일의 모터파크 그리고 네덜란드의 반 스페르트 레이싱. 지난 10년 간 프리마와 경쟁했던 강팀에는 실력자가 많았다.
“근래에는 영국, 독일, 네덜란드 모두 16,17세 선수들이 메인 레이서 자리를 꽤차고 있죠. 뭐, 나이는 크게 상관 없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되는 거죠.”
유럽 무대 전반적으로 어린 참가자들이 주를 이루는 상황. 조르조가 문제 없다며 어깰 들썩였다.
“그리고 저 역시 이번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오늘 주행을 보고 더 확신이 생겼고요. 팀에서도 최선을 다 할 겁니다. 걱정마요, 치로.”
피트로 들어오는 프리마의 포뮬러카를 바라보는 조르조 감독. 특히나 제프를 향해 고정된 시선이 치로의 눈에 포착됐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아참, 그리고...”
레이서들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치로. 잠시 멈춰서 감독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제프가 대회 때 사용하는 이름을 바꾸길 원해요.”
고카트 초창기부터 자신의 성을 바꿔 출전했던 제프. 이번 대회 역시 성을 바꿔 출전할 계획이었다.
“제프 베시. 이 이름으로 참가 신청을 해주세요.”
치로의 말에 다시 흐뭇한 미소를 띄운 조르조 감독.
“이번에도 아버지의 이름값에 편승하지 않겠다는 태도군요. 헌데 이름을 가린다고, 실력까지 가려지겠어요? 하하.”
수년간 가명을 사용해온 제프. 이번 F3 대회 역시 자신의 실력만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오직 자기 힘으로 F1까지 가보겠다는 의지가 강한 친구죠. 제프를 잘 부탁드려요, 조르조.”
제프와 페트로를 바라보는 치로. 두 선수의 헬멧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
모터스포츠는 봄부터 가을까지가 시즌. 겨울에는 F1을 비롯한 대부분의 리그가 경주차 개발과 이적을 진행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한다.
“고생하셨어요. 동식이 형.”
“오늘 좀 힘들 거예요, 준하 씨. 숙소 가서 식단 그대로 챙겨 드세요. 그럼 내일 그 시간에 또 봐요.”
유로컵을 마치고, 스토브시즌에 들어간 서준하. 팀의 레이싱 훈련 스케쥴이 나올 때까지 개인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허, 춥다.”
밴버리 시내 트레이닝 센터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진작부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헤이, 준하!”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뒤를 돌아보는 서준하. 장갑 낀 손을 흔드는 케이시 카버트가 보였다. 우아하고 세련된 헤어스타일. 미모 덕분인지 주변 사람들이 그녈 흘겨 보았다.
“케이시...”
아카데미 이후 스메들리를 벗어나 다른 팀 소속 레이서가 된 케이시. 종종 아카데미 동료와 스태프들이 그립다며 밴버리에 찾아왔다.
“나, 또 왔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휴식기를 맞은 그녀가 오늘도 서준하를 찾아왔다.
“지금 트레이닝 끝났구나? 그럼 이제 배고프겠다. 나랑 누들 먹으러 갈래?”
“흠, 오늘은 코치님이 식단 짜주신 음식 먹어야 하는데... 이걸 어쩌지.”
트레이닝 센터 앞까지 찾아올 정도로 그녀는 적극적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서준하는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너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안 먹었잖아... 한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식단과 훈련을 핑계로 몇 번 거절했던 서준하.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앞에서 고민에 빠진 순간,
“같이 가, 준하야. 나 할 말 있어.”
작고 새하얀 얼굴 위로 어딘가 슬퍼 보이는 두 눈. 살짝 떨리는 듯한 목소리는 이전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터벅터벅.
시내 한복판.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케이시를 데리고 식사 장소로 이동하는 서준하.
띠링.
철컥.
아늑한 분위기의 면 요리 전문점으로 들어온 두 사람. 창가 쪽 자리에 앉은 뒤, 각자 먹을 요리를 주문했다.
“카트 대회 이후로 포디엄에 한 번도 못 올랐어... 지난번에 포뮬러 BMW도 성적도 생각보다 잘 안나오고... ”
늘 밝고 긍정적이었던 케이시.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팀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돌아. 원래 여자 레이서는 안된다느니, 아빠 믿고 너무 버틴다는니...”
GP2 유명 레이서인 케이시의 아버지. 팀원은 물론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에 많이 상심한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붉어진 눈가. 무언가 말하길 망설이던 케이시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나 레이싱을... 그만 두려고.”
마지막 말과 함께 엉엉 울어버리는 케이시. 그러자 서준하가 재빠르게 그녀 옆에 앉았다.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하는데,
“준하아아아...”
설움을 토로하는 감정이 극에 달하자, 케이시가 서준하의 가슴을 파고들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똑똑.
갑자기 두 사람 주위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확인하는 서준하.
“...!”
창밖에선 놀란 눈의 한서윤과 낯선 남자가 멀뚱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헌데 이름을 가린다고, 실력까지 가려지겠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