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비켜줘야 합니다. 진짜 뭐가 나올 거 같거든요? >
“허허, 서준하 선수! 타이어에 온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건가요?”
워밍업을 생략하고 질주를 시작한 서준하의 포뮬러카로 중계진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마 타이어가 얇기도 하고, 타이어 워머(Tire Warmer)를 끼고 예열했을 테니, 열은 금방 오를 겁니다만... 출발부터 엄청난 자신감이군요.”
출발 전 타이어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덮어씌우는 타이어 워머. 초반 어택 전략을 위해 스메들리 팀에선 출발 전 예열에 포커스를 맞췄다.
“시작부터 속도를 높였던 서준하! 두 번째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면서 본격적으로 랩타임을 만들기 위한 주행을 시작합니다!”
지금 상황이 혼란스러운 중계진. 이제 막 서킷으로 들어서는 포뮬러카를 소개하려다가도 속도를 높이는 서준하에게로 곧장 시선을 옮겼다.
“1턴에 진입하는 서준하. 지금 기어는 6단! 최고속입니다!”
브레이킹 타이밍을 최대한 늦추며, 1코너를 도는 서준하. 그 앞으로 포뮬러카 2대가 청색기를 보고 우측으로 물러났다.
“믿을 수 없군요! 정말로 어택에 들어간 듯합니다! 이어서 삼연속 슬라럼에 진입하는 서준하! 속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에이펙스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속도를 살려 빠져나가기 어려운 연속 코너. 레이서의 정교한 테크닉이 요구되는 구간이다.
“진입속도가 엄청 빨라요!”
“횡 G가 어마어마할 텐데요오오오!”
심지어 많게는 3배에 가까운 중력 가속도를 견뎌야 하는 구간.
“우와아하하하하하!”
코너 탈출 속도를 최대한 유지하며, 이어지는 직선 구간에서 순식간에 최고속 250km/h에 도달하는 서준하.
“계기판을 보세요! 슬라럼 중간에서도 200km/h 아래로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배짱이 두둑한 선수입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부터 이번 랩이 기대되는데요?!”
프론트와 리어 모두 엄청난 그립감을 맛보고 있는 서준하. 평소보다 빠르게 코너에 진입하고 탈출한 상황에서도 결코 라인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후반까지 갈 생각이 없다면, 지금 서준하는 단 한차례 실수도 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떤 타이어보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울트라 소프트 타이어. 한 턴 한 턴이 레이서에게 소중하다.
“10턴 클럽(club) 코너를 빠져나오는 서준하! 다시 최고속에 오릅니다.”
“아직까지 미스 없었어요, 좋아요! 8,9턴 모두 완벽하게 돌아나왔어죠!”
코스 중반에 들어선 포뮬러카. 30초 가량의 주행에서 조금의 미스도 발생하지 않았다.
완만한 코너들을 돌아 기다란 직선 주로에 오른 서준하.
“15턴을 빠져나온 서준하! 제이크 옆으로 비켜섭니다!”
“그렇죠. 이건 비켜줘야합니다. 진짜 뭐가 나올 거 같거든요?!”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잉.
휑.
“자, 16턴! 17턴!”
“마지막 코너 1분 40초! 1분 40초에 빠져나갔어요 자, 과연!”
마지막 헤어핀 두 개를 빠져나가는 서준하.
“속도가 안 떨어졌거든요오오오!!!”
18턴 탈출 속도를 살려내며, 컨트롤라인으로 빠르게 접근하는데,
“41초! 42초! 43초!!!”
서준하의 포뮬러카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중계진.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잉.
휑.
띠링.
“Wooooooooooooooow!!!”
“워헤헤에에에!!!”
랩타임을 본 중계진이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1분 43초 299!!!”
“잠깐만요, 이 기록이면...”
역대 랩타임 기록을 살피는 중계진.
“와하하! F3 지난 시즌 폴포지션 기록 보다 2초나 더 빠른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 10랩이 아닙니다. 딱 두 바퀴만이에요!”
흥분을 채 감출새도 없이 다시 한번 질주를 시작하는 서준하.
“더 놀라운 건 이제 두세 바퀴 더 달릴 수 있다는 거예요!”
“서준하가 다시 달립니다!”
다른 선수들의 워밍업이 마치기도 전, 다시 서준하의 어택이 시작됐다.
***
시간은 흘러 퀄리파잉 종료 6분 전.
부우우웅.
위이잉.
초반 세 바퀴를 연속 어택하며 잠정 폴포지션에 랭크한 서준하. 연료량이 밑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코스 바깥을 저속으로 돌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9바퀴부터는 참가자 모두 과감한 주행을 보여주는데요.”
전광판을 포착한 중계 카메라. 퀄리파잉 종료 시간과 잠정 1위의 기록을 번갈아 화면에 잡았다.
“아, 레이서들 서준하한테 완전히 당했어요. 초반에 저렇게 기록을 만들어 버리면, 경쟁자들은 엄청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거든요.”
해설진의 말이 맞았다. 대부분의 레이서들이 랩타임 압박과 더불어 자신들의 페이스를 잃은 상황.
“과연 43초대의 서준하의 기록을 따라잡을 선수가 나올 수 있을지...”
종료까지 남은 서너 바퀴. 중계진의 눈엔 더 이상 좋은 기록이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자, 이때 치고나오는 반 스페르트의 마르코! 10랩 45초대를 기록했거든요! 15턴을 빠져나와 직선주로에 오른 지금, 페이스 아주 좋아요!”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쎄에엥.
띠링.
기대를 한 껏 받으며, 스타트 라인을 통과한 마르코.
“아, 여전히 45초 벽을 못 넘는군요.”
“뒤따라들어오는 파비앙 쉴러! 빨라 보이는데요!”
“1분 45.282초! 파비앙 본인의 베스트 랩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여전히 순위권에 못 올라간 상황.”
서준하의 잠정 1위 기록 43초는커녕 45초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참가자들.
“허허, 지난 시즌이었다면, 무조건 폴포지션에 오를 수 있는 랩타임인데요. 확실히 이번 대회 참가자들이 잘 타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 같은 환경에서 45초를 간신히 넘은 선수가 폴포지션을 차지한 상황. 중계진이 아쉽다며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콜린의 제이크 러셀! 제이크가 무서운 속도로 18턴을 빠져나옵니다.”
“좋아요, 제이크! 이번 랩 제가 유심히 봤습니다! 탈출! 탈출 속도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띠링.
이번엔 콜린 팀과 프리마 팀의 기대주들이 스타트 라인으로 들어오는데,
“44초 687! 벽을 깹니다. 제이크! 기세가 좋습니다! 한 바퀴 정도 더 해볼 수 있어요!”
“자! 그리고 프리마의 제프 베시! 이 선수도 지금 세 바퀴 페이스 좋습니다!”
“페트로 피터발디도 그 뒤로 붙었습니다. 그렇죠, 마지막 피크 타임이군요!”
종료 3분 전, 잠정 1위의 기록에 가까워진 랩타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 어! 제프 빨라요!”
스타트라인을 통과한 제프 베시.
“제프! 44초 303! 제이크 앞에 섭니다!”
이전 랩타임보다 1초 가량 단축하며 잠정 2위에 랭크하는 제프 베시.
“자, 그러면 지금 스메들리 팀 입술이 바싹바싹 마를 겁니다. 제이크, 피터발디, 그리고 제프! 파이널 랩에 들어갑니다!”
이어서 긴장된 표정의 윌리엄이 카메라에 잡히고,
“자! 마지막 1분! 지금 11코너를 못 지나가면, 이번 랩 끝난 겁니다!”
16,17턴 헤어핀으로 진입하는 제이크의 황금색 포뮬러. 이를 시작으로 빨간색 프리마의 포뮬러카 두 대가 따라붙었다.
“긴장되는 순간!”
“우어허허허! 제프를 보세요! 지금 제프가 제이크와 더 가까워졌거든요!”
제이크를 시작으로 18턴을 빠져나온 포뮬러카들.
최후의 랩타임 측정에 갤러리의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라요! 세 선수 모두 빠른데요!”
전속력으로 스타트라인을 향해 들어오는 선수들.
부와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메인 그랜드 스텐드 지붕을 강타했다. 그리고,
띠링.
“피니시!!!”
모두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향한 가운데,
[Qualifying Time Trial]
[순위/ best lap time/ 랩]
1.서준하(스메들리) /1:43:299 /2
2.제프(프리마) /1:44:001 /11
3.제이크(콜린) /1:44:103 /12
4.페트로(프리마) /1:44:255 /11
.
.
“예선 종료입니다!”
0.01초 단위 싸움이 벌어진 1차전 예선.
막판 스퍼트를 올린 경쟁자들. 어느 누구도 서준하의 기록을 넘지 못했다.
“1차전 폴포지션은 서준하가 차지합니다!”
***
“치킨 립 콤보. 지금 그걸 먹어야 겠어요.”
배가 너무 고팠다. 예선이 끝나고 메디컬 체크를 마친 서준하. 싱글벙글 한서윤과 함께 실버스톤 맛집 The Flying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치킨 립 콤보? 그걸 어디서 팔지?”
“제가 알아요, 절 따라오세요.”
전생부터 실버스톤을 찾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먹었던 음식. 서준하의 걸음이 빨라졌다.
“잠깐만요, 서준하 선수!”
서킷 주변, 식당들이 자리한 푸드 파크로 뛰어가는 서준하. 카메라맨과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세상에! 사람들 너무 많다. 준하 선수, 잠깐 인사만 하고 가는게 어때?”
연습주행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기자들. 영국 포뮬러 잡지사부터 지역 방송국 관계자로 보이는 스태프까지, 많은 인파가 서준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서준하 선수! 예선 우승 축하드립니다! 이번 대회 다크호스! 아니 챔피언 후보까지도 거론되고 있는데, 한 말씀 해주시죠!”
르노 유로컵 챔피언을 차지한 서준하의 이력을 저평가했던 영국 기자들. 워낙 쟁쟁한 참가자들이 많았기에 신생 팀의 데뷔전을 치루는 루키 레이서에겐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하지만,
“폴포지션 축하드려요, 잠깐 얘기좀 나눠요, 서준하 선수!”
데뷔전에서 폴포지션을 차지한 그가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아버렸다. 그중에서도 단 두 바퀴만에 기록을 세운 것이 압권.
쏟아지는 질문에 웃으며 답하는 서준하. 인터뷰가 길어지자, 타이밍을 재던 한서윤이 나섰다.
“네, 다음 질문 하나만 더 받고 이동할게요. 미안합니다.”
서준하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난 한서윤.
“현기증 날 것 같네요. 빨리 가죠. 마이 치킨 립 콤보!”
빠르게 식당가로 들어가는 두 사람.
“와... 이러다 조금 있으면, 밖에서 밥도 못 먹는 거 아냐?”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한서윤. 식당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이러니까 너무 당황스럽네. 다들 우릴 보고 있어.”
“언제는 관심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요.”
“그, 근데 이 정도는 너무...”
확실히 F3의 열기는 뜨거웠다. 식당에서조차 자신들의 테이블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눈빛에 한서윤은 부담스러운 듯했다.
“이쪽도 참가자들인가 보다. 어머, 저기도 레이서들이 있어. 이 집 무슨 레이스 애프터 파티하는 곳이야?”
곳곳에 자리한 참가 레이서들. 몇몇은 서준하의 테이블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살아 있달까? 다들 엄청 강해 보이는데, 준하가 이런 선수들보다 훨씬 잘 탔다는 거잖아. 정말 대단해.”
젊고 생기 넘치는 레이서들. 멀리서 참가자들의 테이블흘 흘겨보던 한서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준하 선수가 엄청 신경 쓰이나봐. 자꾸 이쪽을 쳐다보네.”
당연했다. 예상에 없던 레이서가 혜성처럼 등장해 압도적인 기록을 내버렸으니까.
“나왔다! 오 맛있겠는데?!”
갓 튀긴 감자칩과 함께 그릴에 구운 치킨 요리가 접시에 담겨져 나오고,
“누가 그러는데. 치킨 립 콤보, 실버스톤 예선이 끝나고 이걸 안 먹으면 큰일난다네요.”
치킨을 한 조각 썰어 집어든 서준하.
“응? 큰일?”
그대로 치킨을 입에 넣고는 그 맛을 음미하는데,
“어느 F1 선수의 징크스래요.”
전생의 실버스톤 레이스 전날이면 항상 치킨 립 콤보를 먹은 서준하.
“이거 안 먹고 뛴 레이스는 1위로 못 들어왔다나.”
거짓말처럼 단 한 번의 본선 레이스에서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 이건 비켜줘야 합니다. 진짜 뭐가 나올 거 같거든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