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피트 스탑 기록은 우리가 제일 빨랐어 >
폴투피니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폴포지션 레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뒤차를 따돌리고 체커기를 받을 때까지 달아나야한다.
게다가 레이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제프의 눈에 선두차는 한계란 없어 보였다.
-제프, 이번 랩 마지막 추월 포인트다. 집중해!
‘쫓기는 사람이 쫓는 사람보다 힘들다.’ 이는 레이서라면 극히 공감하는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두차는 액셀을 최대한 밟고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고, 끊임없이 뒤차의 움직임을 신경 써야하기 때문이다.
-왔다, 버스 스탑! 어설프게 들어가서는 절대 안 돼!
“copy.”
사실 레이스 중에는 전방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거기다 계속 백미러를 들여다봐야 하니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윙미러를 너무 보다가 브레이킹 포인트를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결국 코스아웃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막았어?!”
추월 포인트가 여러 곳인 스파 서킷. 연이은 돌파가 선두 서준하에게 블락당하자, 제프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스메들리 녀석, 진로 방해 하는거 아니야? 지금 몇 번째 막히는 거야, 이거!
프리마 팀 레이스 엔지니어들의 예상과 달리 서준하의 블로킹은 정당했다. 지그재그로 달리는 디펜스 무브도 아니었고, 뒤차를 한쪽으로 밀어 붙이는 비신사적인 플레이도 아니었다.
서준하는 단 한 번의 진로변경으로 뒤차의 추월을 막았고, 그 한 번의 진로변경이 코너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후... 인라인이 막혔다. 다음 랩에 다시 시도하겠다.”
실로 놀라움의 연속, 자신의 추월 시도가 막힐 때마다 제프 역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제프, 이전보다 1턴 탈출에 서두르도록. 이전 랩보다 케멜 구간 진입 타이밍을 앞당겨!
몇 번의 추월 시도가 무산된 걸 제외하면, 제프 역시 한 턴에서도 실수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격차가 조금씩 벌어졌다. 선두차만 성능 좋은 엔진을 장착한 건 아닌지 어이없는 의심마저 드는 순간이었다.
-다시 오 루즈다, 집중!
블로킹도 블로킹이지만, 제프가 가장 놀라운 건 바로 여기, 오 루즈에 오른 선두차의 속도였다.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연습 주행과 타임 트라이얼을 통틀어 그 어느 차보다 지금 서준하의 스피드는 압도적으로 빨랐다.
-제프, 오 루즈에서 계속 격차가 벌어진다. 좀 더 스피드를 올려줘
확실히 선두차는 오 루즈를 지체 없이 통과했다.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 잠시도 가속 페달을 떼지 않고 달리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데,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케멜 스트레이트에 오른 제프. 그의 눈에 점점 선두차가 작아지고 있었다.
“서준하...”
***
“선두에선 서준하와 제프. 그리고 페트로와 제이크, 강민수의 순위권 싸움이 치열한데요!”
선두권과 어느 정도 격차가 벌어진 2차전 레이스. 3위 자리를 놓고 세 선수가 배틀에 들어갔다.
“1차전과 다르게 눈에 띄는 선수 한 명을 꼽자면, 스메들리의 강민수 선수입니다. 다시 한 번 제이크의 뒤를 노리는데요!”
코리안 레이서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스파 서킷. 이전과 다르게 보다 과감한 드라이빙을 선보이는 강민수를 향해 중계진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뿌옹(Pouhon)을 내려오는 강민수!”
무려 3G 이상의 G포스가 발생하는 10턴, 뿌옹. 예선전 이곳에서 약세를 보이던 강민수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리막을 탔다.
“강민수! 자신감 있어요, 지금!”
“제이크는 안쪽을 조심해야 하는데요!”
어제 예선 직후 미캐닉들과의 피드백을 떠올리는 강민수. 자신의 약점 구간인 뿌옹 앞에 도달했다.
“먼저 들어갔어요! 강민수가 프론트 노즈를 집어 넣습니다!”
“제이크가 바깥으로 밀리는데요오오오!!!”
내리막의 관성을 최대한 이용해 통과 속도를 끌어올린 강민수. 피드백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며 밸런스를 유지한 채 오버테이크에 성공했다.
“4위! 강민수가 4위로 올라섭니다. 이번 대회 첫 포디엄에 오르겠단 의지를 보여주는 멋진 추월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코스에서 제이크를 잡아내네요. 뿌옹은 F1 레이서들도 엄청 조심하는 곳인데요. 아무튼 오늘 스메들리 레이서들이 연달아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강민수의 선전에 환호하는 스메들리 피트. 특히나 퍼포먼스 엔지니어와 미캐닉들이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4위 쟁탈전이 치열했던 사이, 페트로가 좀 더 달아났습니다. 역시 만만한 대회가 아니에요. 강민수가 포디엄에 오를 수 있을지 지켜 봐야겠는데요.”
어느새 2위 제프의 뒤를 추격하는 페트로 피터발디. 그 역시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사람이었다.
“레이스 중반, 이제 곧 피트 스탑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하위권 선수 가운데 몇몇은 이미 타이어를 바꿨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선두권의 피트 스탑 전략이 중요해 보입니다.”
참가팀의 피트를 번갈아 비추는 중계 카메라. 타이어를 집어든 미캐닉 크루부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미캐닉까지. 어느 누구도 쉽사리 피트 스탑 타이밍을 예상하지 못 하는데,
“어! 스메들리 팀, 피트 스탑을 준비합니다! 서준하인가요, 강민수인가요?”
분주해진 스메들리 피트와 함께 작전을 지시하는 윌리엄. 레이스 엔지니어들과 회의에 들어간 그의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스메들리가 지난 대회에서 피트 스탑 기록이 저조했던 것과 달리, 이번 대회 1차전에선 교체 속도가 참가팀 가운데 상위권이죠. 아마 피트 스탑에 굉장히 자신감이 붙은 상태일 텐데요.”
중계진이 각 팀의 피트 스탑 전략을 예측하는 사이, 버스 스탑 시케인으로 서준하가 들어섰다.
“자, 여기서 서준하가 피트스탑 하는지 볼까요?”
진입 속도를 급격히 떨군 서준하. 곧바로 이어지는 피트 레인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서준하군요.”
“스메들리 서준하! 선두권에서 가장 먼저 타이어 교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뒤따르던 프리마 레이싱의 포뮬러카들. 선두가 피트 스탑에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자, 그러면 프리마! 조르조 감독은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지...!”
***
“감독님! 서준하가 피트 인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피트 월의 상황판을 살핀 조르조 감독. 다행히 지금 제프와 페트로의 앞에는 백마커가 없었다. 이미 홈 스트레치에서 그들을 추월한 상황.
“냅둬. 일단 지금은 그냥 돌라고 해, 1분만 기다려 보지.”
1,2위를 달리는 자신의 팀 차량을 바라보는 조르조. 지금 이 순간의 결정이 오늘 레이스 순위를 결정 지을 게 분명해 보였다. 신중에 신중을 가해 전략을 세우는데,
“우선 제프는 피트로 들어오는 인랩(in lap)까지 타이어를 아끼지 말라고 전해. 지금 최대한 격차를 벌려야하네.”
이번 레이스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운 조르조. 페트로의 레이스 엔지니어를 바라봤다.
“그리고 페트로한테는... 랩타임 신경 쓰지 말고 뒤따르는 차들을 막으라고 전해주게. 내가 지시했다고 말하고.”
선두에선 두 차량 모두 같은 팀 레이서라는 사실은 뒤차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프리마 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우승. 그러기 위해선 2위 페트로가 최대한 뒤차들을 막으며 경쟁팀의 타이어를 소모시켜줘야했다.
-페트로... 감독님 지시다.
감독의 지시대로 무전을 보내는 엔지니어.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엔지니어가 조르조에게 다가왔다.
“조르조, 왠지 예감이 불길해요. 페트로가 자존심이 워낙 강한 녀석인지라... 레이스 중반에 지금 전략은 레이스를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어요...”
조르조 역시 페트로의 돌발 행동이 다소 걸리긴 했지만, 오늘 레이스 전에도 수차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강조했었다.
“페트로를 믿어보자고,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야. 방어만 잘해준다면... 무조건 우승이야.”
걱정스러운 표정의 엔지니어들. 조르조가 선두의 빨간 포뮬러카를 향해 고갤 돌렸다. 그리고,
“감독님, 서준하가 피트 레인에 올라섰습니다!”
예상보다 빠른 타이밍. 무표정으로 서킷을 보던 조르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벌써?!”
***
윙미러로 보이는 피트 크루들의 모습.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흔들며 기뻐하는 미캐닉들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 피트 스탑 기록은 우리가 제일 빨랐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지난 1차전부터 새로운 피트 스탑 크루 몇몇이 합류한 후 타이어 체인지 기록이 눈에 띄게 빨라졌으니까.
롭의 무전과 동시에 서준하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프리마 팀은 계속 달리고 있어. 지금 둘 다 최대한 타이어를 태우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번 레이스 우승을 향한 서준하의 마지막 고비. 출구를 나가서 맞딱드리게 될 상황이 눈에 훤했다.
“copy.”
다행히 레이스 내내 서킷은 미끄럽지 않았고, 비 소식은 없었다. 옵션 타이어를 장착한 서준하. 무전을 날림과 동시에 서킷에 들어섰다.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끼익.
“다시 서킷으로 복귀한 서준하! 곧바로 내리막에 올라탑니다!”
“서준하가 빠진 사이 프리마의 두 포뮬러카는 7턴에 도착했습니다. 격차가 상당히 벌어졌는데요.”
프리마 팀의 피트 스탑 시기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다시 긴장되는 레이스가 시작됐다.
“서준하의 뒤로 강민수와 제이크가 따라붙습니다. 아직 피트 스탑에 들어가지 않은 두 선수인데요.”
3위로 밀려난 서준하. 그의 뒤로 또 다른 포뮬러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10턴에서 사고가 있었군요. 황색기가 휘날리는데요!”
내리막 헤어핀에서 발생한 크러쉬. 파비앙과 톰 베이크의 충돌. SC가 출동하며 추월 금지를 알렸다.
“아! 세이프티 카가 등장함과 동시에 피트 레인이 닫혔습니다!”
경기 규칙상 황색기가 휘날리는 동안에는 피트 스탑이 금지된다. 곧바로 피트 레인 입구가 통제되고,
“분주했던 프리마 레이싱 피트가 이제는 고요해졌습니다. 아, 미캐닉 몇몇이 주저 앉는 모습도 보이고요.”
내달려야 하는 프리마 팀에겐 엄청난 악재. 이번 랩을 끝으로 피트 스탑에 들어가려던 제프의 타이밍이 꼬이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되면 피트 스탑에 들어갔다 나온 레이서들에게 엄청 유리해졌죠!”
SC를 따라 서행하는 포뮬러카들. 잠시 후 경기가 재개 되는데,
“SC가 사라지고, 녹색기가 휘날리면서, 질주를 시작하는 포뮬러카들...”
“어?!”
사고 차를 중계하던 사이 갑작스럽게 스타트라인에 등장한 파란색 포뮬러카.
“...!”
잠깐의 경기 중단으로 페트로와 가까워진 서준하.
“언제 여기까지...!”
중계진의 시선이 2,3위에게 향했다.
“번개처럼 나타난 서준하! 페트로의 뒤에 붙었습니다!”
오 루즈를 빠져나온 서준하가 어느새 레드 포뮬러카를 압박했다.
< 오늘 피트 스탑 기록은 우리가 제일 빨랐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