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를 벗어나는 차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
토토토톡.
3차전 본선 레이스 아침.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비가 떨어지는 걸 확인한 서준하.
터벅터벅.
아침 7시. 신속하게 준비를 마치고, 곧장 스메들리 피트로 향했다.
“헉... 헉.”
숙소에서 피트까지 2km 남짓한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온터라 숨을 헐떡이는데, 지이이잉.
아직 8시가 되지도 않은 이른 시간. 피트에 도착한 건 서준하 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하나씩 진 미캐닉 몇몇이 벌써 빗속 주행 준비에 들어갔다.
“에헤이,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고 그러냐.”
뉘르부르크 산속에 위치한 서킷. 뒤죽박죽한 날씨 덕분에 종종 레이스 참가자들에게 당혹감을 선사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부 새로 짜야겠는데, 이거.”
서준하가 아침부터 불이나게 달려온 이유. 웨트 컨디션에선 차량의 세팅 값이 달라져야 한다.
“일단 스프링부터 좀 더 유연한 걸로 바꾸자. 타이어도 0.2kg 정도 공기압을 줄여줘.”
엔지니어링 책임자 헨리의 지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미캐닉들. 엔진 파워를 더 살리기 위한 부품 교체가 시작됐다.
쏴아아아아.
쏴아아아아.
조금 더 거세진 비바람. 레이스가 시작되는 3시간 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은 빗속 주행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게 급선무다.
“리어 쪽 스테빌라이저도 부드러운 걸로 바꿔야겠어. 레리, 지난번에 사용했던 걸로 교체해줘.”
차량이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이는 현상인 롤링을 제어하는 스테빌라이저. 빗속 주행 땐 강도가 약한 것으로 바꾸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트랙션(차량이 발휘할 수 있는 그립의 증감, 구동력)을 높이기 위해 흔히 뒤의 것을 한층 부드러운 것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헨리, 잠시만.”
그 모습을 보던 서준하가 포뮬러 카 앞으로 다가서는데,
“그냥 뒤쪽은 완전히 떼줘.”
리어 스테빌라이저를 그냥 제거해달라는 서준하. 그 요청에 헨리를 비롯한 다른 미캐닉들이 당황한 채 눈만 껌뻑였다.
“그냥 떼달라고? 그러면 롤링이 심해질 텐데...”
“맞아, 스테빌라이저를 완전히 제거하면, 시케인에 들어갔을 때 좌우로 무게 이동이 늦어질 거야. 그냥 부드러운 걸 껴서 적절한 롤링을 택하는 게 어때, 준하야?”
일반적이지 않은 세팅 요구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서준하 자신도 처음 이 방법을 권유 받았을 때 의문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주행 경험 상 빗속 주행에선 뒤쪽 트랙션을 최대한 높이는 게 도움이 됐다.
“헨리, 난 웨트 컨디션에도 스피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스테빌라이저가 있다고 해서 안 미끄러지는 건 아니잖아?”
생각에 잠긴 미캐닉들. 헨리도 머릴 긁적이며 답하길 망설이는데,
“오케이, 레리. 스테빌라이저는 떼줘. 우린 레이서가 원하는대로 간다. 대신...”
차량 세팅을 자유자제로 하는 상급자들도 헷갈리는 부분들. 자신의 주행 스타일에 맞게 차량의 세부 사항까지 조정할 줄 아는 서준하의 모습이 놀라웠다.
“반드시 성과를 가져와야 한다, 준하야.”
이론적으로 문제 없는 조정으로 F1에서도 종종 쓰이는 세팅법. 서준하는 자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수많은 경험이 그걸 증명했으니까.
“그래, 빗속에서 가장 빠른 레이서가 누군지 보여줄게.”
차량 세팅부터 실제 주행까지, 웨트 컨디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서준하. 레인 마스터라는 별명을 괜히 얻은 게 아니었다.
***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빗속 레이스는 ‘어렵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노면의 마찰력이 뚝 떨어지며, 타이어의 그립이 저하되고, 언더스티어와 오버스티어가 일어나기 쉽다. 시야가 극도로 악화되는데, 레이서는 겁을 먹고 초긴장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레이스 시작 전 몇몇 선수들이 레인 컨디션에서 자신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실제 결과는 어떨지.”
서준하를 비롯한 순위권 경쟁자들이 빗속 주행에 무리가 없다는 인터뷰를 마친 가운데, 포메이션 랩이 시작됐다.
“비가 오는 바람에 레이스 결과를 예측하기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코스를 벗어나는 차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그렇죠, 오늘 참가자 모두 안전에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뉘르부르크링은 별칭 그대로 녹색 지옥(Green Hell)이거든요. 특히나 코스 이탈 차량들과의 충돌로 인한 순위 변동 가능성이 높겠네요.”
서준하를 시작으로 천천히 서킷을 한 바퀴 돌아온 포뮬러카들.
“폴포지션에 서준하, 그 뒤로 세 명의 독일 선수들이 있네요. 제프, 파비앙, 마르셀. 확실히 독일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는 서킷입니다.”
각 그리드에 대기 중인 선두를 시작으로 뒤쪽으로 넘어가는 카메라. 그리고 가장 마지막 그리드의 선수가 화면에 잡혔다.
“최후미에 콜린 팀의 제이크 러셀이 위치합니다. 어제 받은 페널티로 예선 순위가 강등됐는데요.”
스메들리 피트 난동 이후 곧바로 스튜어드들에게 조사를 받은 제이크. 벌금과 함께 예선 꼴지 출발이라는 페널티를 받았다. 그리고, 띠. 띠. 띠.
우우우우우우우웅.
띠.
띠.
부우우웅우우우웅.
“신호 꺼졌습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 스타트라인 주위가 사방으로 물줄기와 함께 스모그가 가득찼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요...!”
“아! 나옵니다! 서준하, 제프, 파비앙...”
잠시 후 스메들리 팀의 파란 포뮬러카를 시작으로 선수들이 치고 나오는데,
“스타트부터 곧바로 실력 차이가 보입니다! 루나의 데니스, 아트 그랜드 파크의 오란! 시작부터 휠 스핀을 일으키며 뒤차들을 가로 막습니다!”
빗속에서는 휠 스핀이 일어나기 쉽다. 클러치를 뗄 때 엔진 회전수를 보통 때보다 낮춰야 하지만, 뿌연 시야와 조급해지는 마음은 실수를 만들어낼 확률을 높였다.
“홈 스트레치를 달려나가는 선수들! 1코너에 접어드는데요!”
“첫 코너! 선수들 주의해야 합니다. 아직 타이어에 열이 충분히 오르지 않았거든요?!”
비가 오면 어느 서킷에서나 평균속도는 15∼20% 떨어진다. 덕분에 평소보다 타이어의 열도 쉽게 오르지 않는데, 끼이이이이익.
“아슬아슬, 어! 서준하, 미끄러질 것 같아요!”
빗속에서 레이서는 언더스티어와 싸워야 한다. 액셀을 밟으면 밟을수록 앞바퀴의 슬립 각도가 벌어지기 마련. 코너의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언더스티어 경향이 커진다. 하지만,
“와우! 순식간에 카운터 스티어링에 성공하며 스핀을 피합니다!!!”
능숙한 핸들링을 통해 코너를 빠져나가는 서준하. 뒤따르던 차들도 이어서 코너에 진입하는데, 끼이이익.
액셀을 빠르고 크게 밟은 후미 차량들. 토크가 지나치게 걸려버리며, 뒷바퀴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쿵.
쿠구구구쿵.
“스핀하며 밀려나는 트레게! 뒤따르던 에르만과 부딪힙니다!”
멈춰선 차량을 피해 코너링을 도는 뒤차들. 덕분에 탈출 속도가 굉장히 느려졌다.
“첫 코너부터 순위가 급변하는 3차전 레이스! 하지만 선두는 아직 서준하군요!”
이번 시리즈 첫 빗속 레이스. 진정한 웨트 컨디션 최강자를 가리는 주행이 시작됐다.
***
“휠 락도 없고, 아직까지 정말 훌륭하군요.”
빗속 주행 때 코스에서 벗어나는 제일 큰 원인은 브레이크 실수다. 어느 정도 밟아야 하는가를 계산하기 어려워 바퀴가 쉽게 록(lock)되는 경향이 있다.
“차량 컨트롤이 유연하고 부드럽다는 게 멀리서도 느껴지네요. 앞에서 실수가 나올 때까지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프리마 팀의 피트. 조르조 감독과 치로가 흐뭇한 표정으로 레이스를 지켜봤다.
“제프가 유난히 레인 컨디션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치로?”
평소 시니컬하고 무뚝뚝한 성격의 제프. 팀 전원이 비 소식에 당황한 아침, 혼자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조르조가 묻는데,
“아마 프로그램의 드라이빙 테크닝 시간 때문이지 싶네요.”
인위적인 웨트 컨디션 속에서 수차례 연습했던 제프. 건조한 코스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기술을 익혔다. 웨트는 바로 레이서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뛰어오를 수 있는 기회. 치로가 자신있게 말했다.
“페트로도 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제프는 달랐어요.”
“허허, 그런가요?”
자신이 직접 드라이빙 교육을 맡았던 치로. 연습 기간 동안의 기억이 생각난 듯한데,
“제프는 오히려 레인 컨디션에서만 연습하길 원하더군요. 무엇이 레이서에게 이로운 것인지 명확하게 아는 친구죠.”
대체로 카레이서가 자진해서 빗속연습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당장은 싫더라도 기록을 단축하는 기술을 터득할 수 있다. 제프는 그 고통을 참아낼 줄 아는 레이서였다.
“왜 운전 관련해서 그런 말 있잖아요, 감독님.”
제프의 칭찬을 이어가는 가운데, 뜻깊은 표정으로 감독을 바라보는 치로.
“빗속에서 잘 달리는 레이서가 진짜 레이서다.”
“그렇죠,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웨트 컨디션은 워낙 난이도가 높으니까요.”
“저는 오늘 제프가 진짜 실력을 보여주리라 믿어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조르조.”
마침 홈 스트레치로 들어오는 제프의 차량. 남다른 굉음이 피트에 울려퍼지며 선두 차량의 뒤를 쫓는 모습이 보였다.
***
“슬슬 순위권과 뒤차들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죠?”
예선보다 전반적인 평균 속도가 떨어지는 빗속 레이스. 일곱 바퀴를 넘어서자, 실력 차이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타이어의 그립감도 조금은 올랐을 거고요. 상위권 선수들도 본격적으로 추월을 노려볼 타이밍이 왔습니다.”
서준하를 뒤따르는 포뮬러카가 중계 화면에 잡혔다.
“독일 선수들 이번 레이스에서는 반드시 서준하를 잡겠다고 말했었는데요.”
“그렇습니다. 2,3위 모두 서준하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데요. 하지만 결코 빈틈을 보이지 않으며 선두 자릴 지키는 서준하입니다.”
몇 번의 배틀이 있었지만, 코너에서만큼은 속도가 남다른 선두 차. 중계진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향하려는데,
“자, 그리고 제프! 제프가 나옵니다!”
8턴 완만한 곡선 주로에서 속도를 살린 제프가 서준하의 뒤에 붙었다.
“이어지는 시케인! 과연!”
추월 타이밍을 잡고 9턴 입구에 다가서는데,
“아! 제프가 코너에서 조금 늦어요!”
“제프의 과감한 공격도 멋졌고, 서준하의 빠른 대응도 인상적이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추월 시도를 예측한 선두 차량이 브레이킹 타이밍을 늦추며 코너링 속도를 살려냈다. 진입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미끄러질 확률이 배로 커지는 상황. 두 선수 모두 추월과 방어를 위해 대담한 레이스를 펼치는데,
“자, 제프 또 시작할 거 같죠?!”
“그렇죠, 다음 턴에 기회를 노리는 것 같은데요...!”
공격적인 주행으로 11턴에서 속도를 살려낸 제프가 서준하의 뒤에 붙었다.
“홈 스트레치를 빠져나가면...!”
웨트 컨디션에서의 추월 포인트는 모든 코너다.
“들어갑니다!!!”
제프가 다시 한번 코너를 공략하는데,
끼이이익.
“아! 제프 살짝 흔들렸어요. 진입속도가 너무 빨랐나요?!”
“또 다른 코너! 서준하는 점점 멀어지는데요!”
반면 흔들리지 않고 다시 한번 완벽한 코너링에 성공하는 서준하.
“세 번 연속 레이트 브레이킹! 서준하! 보란 듯이 우수한 코너링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2턴, 3턴, 4턴 모두 브레이킹을 늦춘 대범한 코너링을 보여주는 서준하.
“정지! 회전! 가속! 빗속에서도 이 삼박자가 완벽합니다!!!”
코너링 탈출 속도의 차이는 곧바로 뒤차와의 격차로 벌어졌다. 숨 죽이고 지켜보던 해설자. 선두의 진입과 탈출 라인을 유심히 살피는데,
“...!!!”
또 다시 서준하의 코너링을 보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선수 아웃-인-아웃 라인으로 달리지 않는데요?!”
“아! 설마...”
이론적으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라인을 택하지 않고 코너를 탈출하는 서준하. 하지만 탈출 속도는 경쟁자보다 빨랐는데,
“서준하가 코너링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빗속 주행 공략의 또 다른 열쇠. 아웃-아웃-아웃 라인을 타는 레인 마스터가 나타났다.
< 코스를 벗어나는 차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