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에도 이런 적 있었지만, 이번엔 더 강한 느낌이었어 >
“비켜야죠! 프리마 팀 비켜야죠!”
파라볼리카 탈출로에 휘날리는 청색기. 중계진의 말과 동시에 빨간색 포뮬러들이 우측으로 벗어났다.
“서준하! 연석 바깥으로 밀려날 듯 말 듯!!!”
연석을 최대한 사용하며 몬차의 마지막 코너 파라볼리카를 빠져나가는 서준하. 메인 스트레이트까지 충분히 속도를 살려내는데,
“진입 속도가 엄청났던 만큼 탈출 속도가 빠릅니다!!!”
에이팩스 잡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파라볼리카. F1 레이서들 가운데 공략하기 어려운 코너로 매번 이름을 올리는 곳이다.
엄청난 횡 G를 견뎌내며 조금의 실수도 내지 않은 서준하가 곧바로 탈출 속도에서 보상을 받으며 스타트 라인에 들어서는데,
“1분 39초 236! 와, 벌써...!”
“현재 참가 선수들 가운데 서준하가 최고 기록을 만듭니다!!!”
첫 어택 시도로 단숨에 폴 기록을 만들어낸 서준하. 멈추지 않고 계속 질주를 이어갔다.
“서준하에겐 아직 몇 바퀴가 더 남은 것 같습니다! 1번 시케인을 향해 진입하는 서준하!”
“그렇죠. 서준하는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워밍업이 끝난 선수들도 어택을 시작하거든요? 지금 기록이 분명 끝이 아닙니다!”
중계진의 말대로 몬차 서킷의 평균속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우승 후보 경쟁자들이 너도나도 스피드를 끌어올렸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잉.
1,2번 코너, 레티필로 시케인. 서준하의 눈앞으로 초록색 포뮬러카가 보였다. 어택을 시작한 듯 진입 속도가 다소 빨라보였는데,
끼이이이익.
보다 확 줄어든 탈출 속도로 레티필로 시케인을 빠져나가는 초록색 경주차. 급브레이킹은 훌륭했지만, 탈출이 늦어지며 결과적으로 손해를 봤다.
‘그게 아니야. 여긴 진입보단 탈출이 중요한 곳이야.’
어느 코너든 레이트 브레이킹이 먹히는 게 아니다. 레티필로에 들어간 서준하. 앞선 차와는 다르게 브레이킹 타이밍을 반 템포 빠르게 가져가며 진입 속도를 죽였다. 그리고,
3단, 4단... 5단!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재빠른 재가속 타이밍으로 탈출 속도를 높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순식간에 최고속에 도달하며 앞차와는 다른 테크닉으로 재빠르게 레티필로를 벗어나는 모습.
“확실히 다릅니다! 서준하가 빠른 이유가 있어요. 몬차를 공략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수 확실히 포인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보세요. 벌써 서준하보다 저 앞에 있었던 오란 선수와 만나지 않습니까?!”
서준하가 중고속 코너에 들어서며 초록색 차량과 더욱 가까워졌다. 두 선수 모두 6턴으로 진입하고,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빠른 속도로 코너링 하는 만큼 레이서에게 그 부담은 엄청나다. 이제 제법 끓어오른 콕핏의 온도가 레이서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데,
“오, 오란! 우측으로 비켜줘야죠!”
횡G와 열기를 견뎌낸 서준하가 결국 초록색 포뮬러카보다 먼저 7턴을 빠져나갔다. 또 다시 코리안 레이서의 질주가 시작되자, 갤러리의 시선이 쏠렸다.
“지금까지 완벽했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죠!”
7턴에서의 빠른 탈출 속도 덕분에 자칫하면 놓치기 십상인 쿠르바 델 세랄료 코너. 공식 코너로 지정되지 않은 터라 많은 선수들이 놓치는 포인트다. 하지만,
훼엥.
세랄료 앞에서 살짝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 서준하. 단 0.001초라도 이득을 보기 위해 세심하게 드라이빙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8턴. 또 다른 어택 주자가 보였다.
“오, 이런!”
7턴에서 속도를 살리지 못 했는지, 다소 진입 속도가 느린 톰 베이크가 서준하의 앞으로 등장했다.
“서준하 앞으로 톰이 보입니다! 아! 서준하, 아쉽게도 속도를 줄여야할 것 같은데요?!”
8턴 앞에서 아웃 라인을 크게 그리며 진입하는 톰 베이크.
“...!!!”
청색기가 마구 흔들리지만, 연이은 9,10턴의 통로가 굉장히 좁은터라 진로 변경에도 티가 나질 않는데,
“살았어요! 살았어요! 아슬아슬 그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는군요!!”
앞차의 라인을 예측한 서준하가 최대한 코너의 안쪽으로 차량을 붙여 8턴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이 선수, 오로지 스피드를 살려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레코드 라인을 따르는 것이 좋은 기록을 낼 가능성을 높이지만, 상황에 따라 스피드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서준하는 앞차를 발견하자마자 머릿속으로 그 최적의 라인이 순간적으로 그려졌고, 대담성을 발휘해 좁은 라인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빠른 속도로 파라볼리카에 들어가는데요!!!”
서준하의 눈앞으로 나타난 마지막 코너. 파라볼리카 옆 그래블 배드로 튕겨져나간 하늘색 포뮬러카와 함께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 런오프가 보였다.
끼이이익.
연석 바깥의 아스팔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서준하. 연석 가까이로 방호벽이 있던 과거 파라볼리카에 비하면 쉬운 코스다. 200km/h에 가까운 스피드로 코너링을 시작하는데,
“파라볼리카를 빠져나오는 서준하! 레이트 브레이킹을 하며 당당히 마지막 코너를 탈출합니다!”
탈출속도와 라인까지 고려한 서준하의 브레이킹.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어중간한 타이밍으로 최적의 라인을 그려냈다.
-좋았어! 그대로 풀악셀!!!
서준하가 스타트 라인으로 접어들자, 라디오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또 다시 측정된 서준하의 랩타임.
“38초 일거야. 아까 7턴에서 살짝 죽었어. 후... 후...”
콕핏의 엄청난 열기 덕분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서준하. 롭이 무전을 보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랩타임을 예측하는데,
-엥?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안 거야?! 그리고 38초면 톱 타임이라고, 하하.
정말로 서준하의 두 번째 어택 기록은 1분 38초 491였다. 짧은 순간 최고속 홈 스트레치에서 전광판을 봤을리 없다. 순간 당황한 롭이 멍때리는데,
“집중해, 롭. 한번 더 간다. 후... 후...”
전생부터 수없이 타봤던 몬차 서킷. 한 턴 한 턴을 빠져나갈 때마다 서준하의 감각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보면 볼수록 엄청난 능력을 가진 역대급 레이서. 목표 랩타임을 달성하기 위한 또 한 번의 어택을 시작했다.
***
“소문대로 숏런에 엄청 강하구만.”
서준하의 세 번째 어택을 지켜보는 두 명의 이탈리인. 덥수룩한 흰수염을 쓰다듬던 남자가 스메들리 차량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그렇습니다, 대표님.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GP2의 강력한 팀 트리덴트 모터 스포츠의 페드리코 감독과 팀 대표 마우리지오. 팀 캠프와 가까운 몬차 서킷을 찾아 영입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GP2 엔진을 갖고선 저 선수가 어떻게 탈지 굉장히 궁금할 정도입니다...!”
엔진 출력이 600마력에 달하는 GP2 경주차. F1과 인디카를 제외하면 가장 빠른 레이싱카 중 하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F3에서 곧바로 F1에 가는 걸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허허, 그럴만한 실력이지. 근데 그게 쉽지 않을 텐데...”
서준하를 눈여겨 보고 있는 마우라지오 대표. F3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GP2에선 저조한 성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터라 매 시즌 선수 영입에 신중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왠지 서준하는 더 빠른 차를 타고도 변함없는 스피드를 뽑아낼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마카오에서도 이 실력을 보여준다면,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모르죠.”
정석 루트에서 벗어난 예외는 어딜가나 존재한다. F3에서 바로 입성한 키만 라이코넨과 같은 레이서는 물론, 심지어 포뮬러와 전혀 관계 없는 투어링카 대회의 상위권자도 F1 무대에 올랐다.
“내일 레이스 끝나고 곧바로 컨택해 보게, 페드리코.”
마카오를 노린다는 말에 다소 씁쓸한 웃음을 짓던 마우리지오, 무언가 결심한 듯 감독을 바라봤다.
“아직 시즌 중반인데, 벌써 제안을 넣는 건 좀 섣부르지 않습니까?”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쎼에에엥.
때마침 두 사람이 자리한 스탠드 앞을 지나간 서준하의 포뮬러카. 그의 등장에 주변 갤러리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GP2 관계자들도 서준하를 보기 위해 일어섰는데,
[5R. Qualifying Result]
[Track Record : 1: 37: 002]
[Smedley : No. 11 Junha Seo]
“트랙 레코드?!”
4번째 시도 끝에 트랙 레코드를 달성한 서준하. 마우리지오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지금 퀄리파잉 끝나고 당장 컨택하게! 지금 이 선수는 무조건 잡아야 해...!”
트리덴트 팀뿐만이 아니었다. 윌리엄스 F1팀도 관심을 두는 마당에 이탈리아를 본거지로 둔 다른 GP2 팀들도 몬차를 찾은 상황. 이번 F3 시리즈의 영입 대상 1호는 바로 서준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F1에 가고 싶은 게 꿈이라면, 그거 우리가 이뤄줄 수도 있지...! 안 그런가, 페드리코?!”
마루시아 F1 팀과 긴밀한 관계를 두고 있는 마우리지오 대표. 자신의 팀 에이스 루카 지오토와 서준하가 함께 GP2 차량을 탄 모습을 상상하며, 쿨링에 들어간 서준하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헉... 헉... 헉...”
오버롤과 차량 시트는 땀으로 범벅됐고, 입은 바싹 말라버렸다. 무엇보다 타는 듯한 갈증이 서준하를 괴롭혔다.
“준하야!!!”
자신을 반기는 팀원들의 환호 속에도 아무런 표현도 못하고 헬멧을 벗었는데,
“어떡해! 어떡해! 빨리! 물!”
차가 완전히 멈추자 콕핏에서 쓰러지듯 내려온 서준하. 곁으로 한서윤이 재빠르게 물을 가져왔다.
“도대체 음료도 없이 퀄리파잉 하는 레이서가 어딨어 정말...!”
50도 이상의 온도에서 30분이 넘는 시간과 사투를 벌인 서준하. 다시 한번 엄청난 성과를 낸 것에 더할나위 없이 기뻤지만, 무엇보다 탈수 증상이 온 레이서의 얼굴을 보고는 한서윤이 눈물을 흘렸다.
“준하는 진짜 미친놈이야...”
감탄과 우려가 섞인 팀원들의 목소리. 누구의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서준하도 그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조금씩 원기를 회복해가는 서준하. 좀전의 레이스에서 받았던 엄청난 영감을 돌이키며 명상에 잠기는데,
‘전생에도 이런 적 있었지만, 이번엔 더 강한 느낌이었어...’
트랙 레코드를 만들었던 폴 랩. 서준하 역시 경주차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운전했다.
‘의식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건 이런 건가.’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 전설의 레이서 아일톤 세나의 F1 첫 우승. 우승 직후 세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드라이빙했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다시 느껴 보고 싶어... 아직 배울 게 있어...’
콕핏 내부의 뜨거운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한 고도의 집중력 때문인지. 자신이 어떻게 무의식에 도달한 건지 아리송한 가운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분명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전설의 레이서가 겪은 신화적인 경험을 한 서준하. 레이싱의 또 다른 경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전생에도 이런 적 있었지만, 이번엔 더 강한 느낌이었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