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하, 우승 후보들이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
[포뮬러 3 마카오 그랑프리(Formula 3 Macau Grand Prix)]
총 나흘간 벌어지는 F3 월드 챔피언을 가리는 유서깊은 대회. 아일톤 세나, 미하엘 슈마허와 같은 레전드들이 챔피언을 달성했던 곳이다.
일요일 본선 레이스로 그 챔피언을 뽑는데 방식은 아래와 같다.
[목] 오전 프리 주행1, 오후 퀄리파잉1(40분, 토요일 그리드 결정)
[금] 오전 프리 주행2, 오후 퀄리파잉2(40분, 토요일 그리드 결정)
[토] 퀄리피케이션 레이스(10랩, 본선 그리드 결정)
[일] 메인 레이스(15랩)
참가 선수가 무려 30명이 넘기 때문에 본선 레이스 직전 세 단계에 걸쳐 그리드 순위를 정한다. 의무적인 피트 스탑은 없으며, 엔진, 섀시, 타이어 등 차량의 부품 모두 참가자 전원 동일한 조건이다.
[기아 서킷(Guia Circuit) 6.12km]
마카오의 서킷은 지옥의 서킷으로 유명한 곳이다. 실제 마카오 도심의 일반 도로를 임시로 가둬 만든 곳으로 트랙 폭이 좁고, 노면의 기울기가 괴랄한 코너가 수두룩하다.
이런 특성과 더불에 30명 이상의 참가자 덕분에 매년 커다란 사고가 빠지지 않고 일어나는데, 마카오 GP 사고 영상만 모아둔 클립이 존재할 정도로 정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서킷이다.
”마크의 Moto3가 곧바로 3턴으로 들어갑니다!“
마카오 GP는 F3 대회뿐만 아니라 투어링 카, WTCR, GT 월드컵 등의 다양한 레이스가 동시에 열린다. 서준하의 마카오 GP 연습 주행 1이 있는 오전. 수십 대의 모터싸이클이 마카오의 최대 추월 구간으로 들어갔다.
“오노오오오오오오!!!”
중계 스크린으로 모터사이클 한 대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장면이 등장했다. 모터싸이클 GP에서 사고가 나자, 이를 지켜보던 스메들리 팀 피트이 긴장감에 휩싸였다.
“...역시 3턴부터는 코스가 엄청 구불구불해. 어떻게 첫날 연습 주행부터 이런 일이...”
마카오는 연습 주행도 치열했다. 2시간 뒤 서킷에 들어갈 서준하 역시 사고가 난 모습에 긴장된 표정을 보이자, 윌리엄이 다가섰다.
“보다시피 기아(Guia)는 스피드보단 침착함이 우선시 돼야 하는 곳이지. 끝까지 침착하게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하네.”
비디오로 서킷을 분석하는 지난 며칠간 떠오른 포인트는 바로 침착함이었다. 기본적으로 높은 드라이빙 없이는 도전조차 못 하는 곳이지만, 모험을 걸기보단 사고 없이 집중력 있게 드라이빙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리스보아 스탠드(Lisboa Stand) 쪽으로 포뮬러 팬들에겐 익숙한 얼굴이 보입니다. F1 팀들도 이번 대회 관심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음, 그말이 정말이었군요.”
이어서 중계 카메라에 등장한 이탈리아 남성. 중계진의 말에 스메들리 팀이 스크린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서준하 역시 호기심을 갖고 남자의 얼굴을 살피는데,
‘...!!!’
동그란 안경 아래 다소 축 늘어진 볼살. 푸근한 인상을 풍기는 이탈리아인의 낯익은 얼굴에 서준하가 놀라고 말았다.
‘마르치오네가 여길 왔다고?! 그것도 연습 주행 첫날부터?’
예상 밖의 인물의 등장으로 서준하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피트 레인 런치(Pit Lane Launch)!”
다른 서킷들과 달리 폭이 좁은 마카오의 피트 레인. 그 좁아터진 길로 33대의 차량이 하나둘 피트를 나섰다.
“헤이! 헤이! 나와! 나오라고!”
차량이 몰리는 바람에 피트 레인 출구는 이미 포화 상태. 포뮬러카들이 줄지어 늘어선 행렬에 기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나 특정 선수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기 위해 서로간 자리 싸움이 치열해지는데,
“나왔다, 서준하!”
“와우! 이쪽이요! 이쪽!”
방송 스태프는 물론,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든 사람들부터 응원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까지. 피트 레인 행렬에 대기 중인 서준하에게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두두두두두두두둥.
포뮬러 카에 오르니 기분이 달라졌다. 오전의 살벌했던 분위기 속 밀려왔던 긴장이 가라앉았고, 두 가지 색다른 감정이 서준하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새로운 무대와 관중들 앞에서 레이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였고, 이번 생에도 아무 탈 없이 F3 월드컵까지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콕핏에만 앉으면 목표가 또렷하게 보이고 할 일이 분명해지니, 레이서가 안 됐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부우우웅.
위이이잉.
하나둘 피트 레인을 빠져나가기 시작하며, 40분 동안의 연습 주행이 시작됐다. 서준하의 앞으로 일장기가 그려진 주황색 포뮬러가 보이는데,
[A-Max Morto Sports Japan]
[Kamui Endo]
이번 시즌 F3 아시안 챔피언십의 챔피언 레이서 엔도. 원래 느린 것 못 참는 성격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빨리 내달리기로 작정한 것인지. 서킷을 밟자마자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앞서 서행한 차량을 제치는 모습까지. 그리고,
[Team West-Tec]
[Ryan Morris]
이제 막 서킷을 밟은 서준하의 옆으로 또 다른 포뮬러카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 시즌 F3 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챔피언 레이서 라이언. 순간적으로 자신의 옆으로 붙었다가 떨어지는 모습을 서준하가 포착했다.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훼에에엥.
몇 번의 신경전이 있었지만, 서준하는 개의치 않고 천천히 롤링을 시작했다. 경쟁자들이 보이는 태도는 그만큼 그들이 서준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그들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순간,
훼에에에에에엥.
차량 간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이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연속 추월을 통해 스피드를 살려내는 선수부터 코너링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차량까지 서킷은 활발했다. 하지만,
‘느림은 빠름을 향한 답이다.’
서준하는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마카오는 전생에도 몇 번 경험해 보지 못한 서킷. 빠르게 달리고 싶다면 먼저 천천히 달려봐야 한다. 모든 모터레이싱 카테고리에서 적용되는 진리이자, 본격 레이스 전, 반드시 갖춰야할 자세였다.
끼이이익.
기아의 코스들을 빠져나가며 코너 공략보다는 차량과 노면이 어떤 감각을 주고 있는지를 관찰했다. 예상대로 노면의 기울기는 안쪽보다 바깥쪽이 훨씬 높았고, 대체로 울퉁불퉁했다.
위잉.
위잉.
윙.
연석의 높낮이, 곡면의 변화, 차량의 하중 이동 등등. 브레이크 페달을 수차례 밟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주행 속도는 느려졌지만,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 빠른 기록을 만들어 기선 제압에 들어가겠다는 의도로 탔다면, 결코 느끼지 못 했을 부분들. 소중한 데이터들이 서준하의 머릿속에 입력됐다.
-이제 10분 남았다, 준하야
30분 동안 롭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습 종료까지 10분이 남았을 때 무전을 전달하라는 레이서의 말이 있기까지는.
“오케이.”
시작 후 30분 동안 대부분 9바퀴 이상을 소화했지만, 서준하는 몇 바퀴 돌지 못했다. 적은 바퀴를 돈 만큼 서킷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지금 서준하의 머릿속엔 30분 동안 F1 레이서의 감각으로 그려낸 기아 서킷의 이미지가 선명했다.
“이제 스피드를 올려볼게. 주변 트래픽 정보 전달 바람.”
무전을 보내며 스타트 라인에 들어선 서준하. 전방 시야를 더 넓히며, 좀전보다 강하게 악셀을 밟았다.
***
“하하, 우승 후보들이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F3 브리티시 챔피언 팀 포르텍 모터즈. 본격적인 퀄리파잉 시작 전 피트에 대기 중인 카일 감독에게 레이스 엔지니어 메튜가 웃으며 다가섰다.
“슈마허 아들은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요. 오전 연습 주행에서 여덟 바퀴밖에 못 돌았네요. 원래 마카오 오면 긴장하는 애들이 있는데, 딱 그런 케이스 같군요.”
“긴장이라... 그냥 연습 주행 공략 방식이 다른 걸 수도 있지.”
메튜의 말에 회의적인 카일 감독. 우승 후보 몇몇이 느리게 연습 주행을 마친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메튜, 자네가 잘 못 봤나 본데. 제프도 그렇고, 다른 우승 후보들도 그렇고. 다들 트랙 탐사를 아주 철저히 하더구만. 특히 한국의 서준하말이야. 트랙의 세밀한 부분까지 체크하는 것 같더구만. 아무튼 긴장한 걸로 보이진 않아.”
카일 감독의 눈엔 보였다. 트랙을 천천히 돌며 서킷 이곳저곳을 체크하는 몇몇 참가자들이.
특히나 시작부터 주행 종료까지 노면 전체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인상적인 한 선수. 서준하의 주행은 경험 많은 레이서가 운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렇군요... 전 우리 팀이 기선 제압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요.”
연습 주행 초반 레이서들에게 주변 차량들에게 쉽게 자릴 내주지 말라고 주문했던 메튜. 감독의 말을 듣고 나니 연습 주행 결과가 완전히 달리 보였다.
“이제 곧, 시작하겠구만.”
사람들로 분주한 컨트롤 타워(심판관들의 통제 장소)를 포착한 카일 감독. 퀄리파잉 1 시작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2015 Formula 3 Macau GP]
[FIA F3 World Cup]
[Qualifying 1 Start]
[39 분 : 59 초]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전광판에 표시된 초록색 타임 라인. 시작을 알리는 중계 방송과 함께 갤러리들의 함성 쏟아져나왔다.
“너무 서두를 필요없어, 크리스. 우린 후발 주자로 나간다.”
40분 동안의 장기 퀄리파잉. 타이어 교체 없이 기록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많은 팀들이 플라잉 랩 공략 시기를 늦추는 후반 어택 전략을 세웠다. 포르텍 모터즈 역시 전형적인 공략과 다름 없는 수를 택하는데,
“...!”
시작과 동시에 정적이 흘렀던, 피트 레인. 10초 후 피트 레인에 튀어나온 차량 한 대가 카일의 눈에 들어왔다
“꽤 이른 시간에 나오네요... 타이어 관리에 자신 있다는 건가.”
오전 주행에서 보여준 서준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공략법. 연습 주행의 부진함을 털어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
“XX! 뭐야!”
피트 레인 출구로부터 밀려온 엄청난 배기음. 나홀로 서킷에 나간 포뮬러카가 시작부터 굉음을 뿜어냈다. 그리고,
“달린다고? 벌써?!”
1 섹터(sector)를 롤링하던 서준하가 눈에 띄게 빨라진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포르텍 팀은 물론 참가 팀 전원의 시선이 집중되고,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서준하 단독 질주! 계속해서 스피드를 높입니다!!!”
중계진의 말과 동시에 등장한 서준하의 온보드 카메라. 격렬히 운전 중인 레이서의 모습이 등장했다.
‘진짜 기선 제압은 여기서 하는 거야!!!’
연습 주행은 연습일 뿐이다. 스타트와 동시에 단독 어택에 들어간 서준하. 참가팀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 하하, 우승 후보들이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