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5 스메들리 서준하 >
“어이, 프레드 내 말 안 들려?”
퀄리피케이션 레이스 파이널 랩 직전. HWA 모터즈의 감독이 레이스 엔지니어 프레드의 곁으로 다가섰다. 감독이 멀찍이 서킷을 보고 넋을 잃은 그를 향해 소리치는데,
“아, 아, 네... 그러니까, 그게.”
“8랩이랑 몇 초 차이냐고 묻잖아 지금! 정신 똑바로 안 차릴 거야?”
감독이 묻는 말에 한 눈 팔던 프레드는 죄송하단 표정과 함께 머릴 긁적였다. 안 그래도 레이스 결과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마당에 팀 엔지니어가 감독의 속을 긁어놨다.
“그러니까... 딜런이... 이전 바퀴보다 0.2초 빨라졌습니다. 파, 파이널 랩 기대해도 괜찮습니다.”
프레드의 집중을 빼앗은 건 다름 아닌 선두 차량이었다. 참가팀들의 피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22턴 전후의 직선 주로를 달리는 파란색 포뮬러카. HWA 팀은 물론, 다른 팀 엔지니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 잡은 건 바로 서준하의 차였다.
“...와!”
다시 한 번 22턴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 코리안 레이서. 팀 소속 레이서에게 집중하겠다던 프레드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스메들리 팀 엔지니어들이 부러웠다. 엔지니어에겐 그들이 정비해둔 차량을 성능 이상으로 몰며 성과를 내는 건 더없이 기쁜 일. 프레드의 시선이 파이널 랩을 달리며 멀어지는 선두 차량에게 고정됐다.
“빠르긴 빠르구만...”
다시 한 번 프레드의 행동을 보고 그의 곁으로 다가섰던 감독. 엔지니어를 꾸짖으려던 본래 의도는 새까맣게 잊은 채 프레드와 똑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서준하가 이제 파이널 랩을 달리기 시작합니다!!!”
HWA나 다른 참가팀 피트만이 그랬던 게 아니다. 그랜드스탠드부터 리스보아 스탠드까지, 마카오를 찾은 갤러리의 눈이 오직 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서준하의 주행은 많은 이들에게 F3 경주차의 한계 속도가 얼마였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카오의 토요일 오전! 기아 서킷이 다시 한 번 서준하의 이름으로 가득 찹니다!”
서준하가 피니시 라인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띠링.
“서준하! 퀄리피케이션 레이스 1위로 들어오면서, 메인 레이스의 폴포지션을 차지합니다!!!”
토요일 레이스에서 폴포지션을 차지할 경우, 메인 레이스 폴투피니시 성공 확률은 50%가 넘는다. 치열한 마지막 레이스를 앞둔 서준하가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순간이었다.
***
“Bravo! Bravo!!”
레이스를 마치고 검차대로 들어온 서준하. 그의 앞으로 하얀색 오버롤을 입은 중년 남성이 자신을 향해 박수를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취재진이 남자의 박수와 웃음을 보고 연신 플래시를 터트렸다.
‘이반 뮬러...?’
다양한 카테고리의 모터스포츠 챔피언들 중에서도 진짜 챔피언이 있다. F1에선 슈마허가, WRC에선 뢰브가, 르망 24에선 크리스텐센이 있다. 그리고 WTCC(World Touring Car Championship)에선 바로 이 남자, 이반 뮬러가 그러하다.
“모터레이싱에 30년 동안 있으면서, 마카오 서킷에서 이렇게 감동 받은 적은 처음입니다. 파이널 랩에선 온몸에 전율이 돋았을 정도예요. 정말 잘 봤습니다!”
월드 챔피언은 물론 29번의 폴포지션, 48회 레이스 우승과 125번의 포디움 기록. WTCC의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할 살아 있는 전설이 서준하를 추켜세웠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두 선수가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됐는데,
“고마워요, 내일도 응원해주세요, 이반. 오늘은 메인 레이스가 아니었으니까요, 하하.”
유명 인사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으며 농담을 던지는 서준하. 이반도 내일 꼭 자신의 경기가 끝나고 직관하겠다며 약속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덕에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의 손은 더욱 바빠지고,
“드라이빙 실력도 실력이지만, 확실히 어디서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외모도 훌륭하고, 진짜 기업들이 좋아할 만한 선수야.”
검차대를 벗어나는 짧은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팬들에게 인사를 보내는 서준하를 보곤 현지 기자들이 그의 칭찬을 늘어놨다.
“맥라렌이 서준하한테 접근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거 진짜 다음 시즌에 F1 가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마카오에 F1 팀의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어? 각 팀 수장들이 여길 올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데. 그거 다 누구 때문이겠어?”
영국의 F1 팀들이 서준하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포뮬러 기자들 사이의 빅 이슈였다. 서킷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서킷 밖에서도 관심을 끄는 레이서는 서준하.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기자들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 벌써 들어갔네. 아까 F1 얘기 좀 물어볼걸 그랬어. 저런 대박 물건을 누가 데려가려나...”
F3 마카오 월드컵 직후 F1에 진출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건 옛날 일이다. 많은 F1 팀들이 GP2까지 거친 검증된 선수를 새로 데려오는 추세로 변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서준하가 다시 한번 그 전례를 반복할 것 같았다. 이제 많은 모터스포츠 언론들은 서준하가 F1에 가느냐 못 가느냐가 아닌, 어느 팀으로 가느냐에 궁금증을 품었다.
***
퀄리피케이션 레이스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서준하.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다는 에이전시의 얘기도 내일로 미뤄두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레이스가 끝나고 별다른 휴식 없이 카메라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다.
‘결국엔 이런 것도 내일 피니시를 못하면 다 물거품인 거지.’
어느 스포츠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선수의 인기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지난 며칠간 아니, 지난 수년간 노력해왔던 과정이 어쩌면 내일 단 한 번의 레이스로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일은 정말 신중히 달려야 해.’
메인 레이스는 전쟁터와 같다. 서준하 뿐만 아니라 모든 참가자들이 전력을 다 할 게 분명하다. 실제로 마카오 GP의 사망자 발생률은 메인 레이스 날이 가장 높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니까.
모터스포츠가 잔혹한 건 목숨을 잃을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서준하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또 다시 전쟁터에 뛰어드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 받았으니까.’
레이서가 아닌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서준하의 재능은 경주에 특화됐다. 어느 경주에서건 또래보다 잘 탔고, 모두가 그의 재능을 추켜세웠다. 시속 200, 300이 넘는 스피드를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서준하에겐 있었다. 그리고,
‘모터레이싱은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스포츠니까.’
자동차의 발명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초고속의 세계가 등장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스피드를 다루는데 미숙했고, 그에 맞춰 진화하지도 못 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진화를 이뤄낸 존재들이 등장했다. 그들이 바로 레이싱 드라이버였다. 그들은 시속 300km/h가 넘는 속도를 넘나들며 인간이 가진 미지의 가능성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이것이 바로 서준하가 다시 한 번 모터레이싱을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15 바퀴 쉬지 않고 스피드를 완성해야 해.’
많은 사람들이 모터스포츠를 찾는 이유는 한계를 넘어서고픈 자신들의 꿈을 싣고 싶어서가 아닐까? 바로 이 불가능한 진화를 이뤄낸 레이서들에게.
레이스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목표와 의지를 되새긴 서준하. 2015 이번 시즌 마지막 레이스 승리를 위해 전의를 불태웠다.
***
“관계자들이 엄호를 받으며 나옵니다.”
2015 마카오 포뮬러 3 GP 메인 레이스 시작 전. 경호원들의 엄호를 받으며 마카오의 행정장관(마카오 총독의 역할) 페르난두 추이가 서킷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행정장관 앞으로 한 줄로 엄숙하게 대기 중인 선수들의 모습이 보이고요.”
마카오 GP는 국가적 행사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회. 나라의 주요 인물은 물론, 여러 유명 인사들이 메인 레이스에 참석한다. 선수들을 향해 다가선 행정장관이 33명의 레이서들과 악수를 시작했다.
“하하, 서준하 선수가 맞지요? 어제 레이스 정말 잘 봤습니다. 오늘 레이스도 놀라운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며 간단히 인사만 나누던 행정장관. 대열 중간, 코리안 레이서 앞에 멈춰서며 잠시 동안 서준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빠르게 지나치던 다른 선수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또 한 번 이목이 집중되는데,
“가는 곳마다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서준하 선수입니다. 오늘 기대한다, 뭐 이런 얘길 나눈 거 같은데요.”
“오늘 본선 무대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선수는 단연 서준하입니다.”
장관이 인사를 끝내자, 마카오 전통 노래와 함께 오프닝 행사가 시작됐다. 선수들의 안전을 기리는 특별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오늘 서킷을 찾은 갤러리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레이스 시작 전, 지금 이곳은 축제 분위기입니다. 세계 각지의 모터스포츠 팬들이 마카오를 찾으신 듯 보이는군요.”
“그렇습니다. 마카오 GP의 최근 5년 레이스 중 가장 많은 관중 숫자를 기록했다고 들었는데요. 확실히 시작 전 응원 열기가 뜨겁습니다.”
알록달록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국기를 얼굴에 그린 사람들부터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흔드는 갤러리까지. 선수들이 대기 중인 차량 옆으로 이동하자 갤러리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No.5 스메들리 서준하(kor)]
[Macau / Macau / Macau]
“33대의 차량이 2열로 줄지어 늘어섰습니다. 곧바로 차량에 탑승한 서준하의 모습이 잡히네요.”
마카오 대회용 리버리킷을 부착한 서준하의 포뮬러카. 차량의 전후면 바디로 커다랗게 보이는 ‘Macau’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없는 마카오의 리버리킷. 마카오 레이스에 한국인 최초로 서준하가 나서는 순간이었다.
“소문이 맞습니다. 정말 소문이 맞군요...!”
갑작스럽게 메인그랜드스탠드 좌측으로 넘어간 중계 화면. 와이셔츠 차림의 중년 남성들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마르치오네 회장이 자리했습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아까 로널드 데니스와 하이폰 더핀도 잠깐 얼굴을 비췄거든요? 정말 이번 대회 F1 팀의 관심이 엄청난 듯합니다.”
마르치오네가 오늘 레이스에 등장할 거라는 소식은 서준하도 들었다. 또한 그의 드라이버 영입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오늘 레이스는 정말 모든 걸 걸어야한다.
“오늘 레이스 결과에 따라 F1 GP로 레이스 장소를 옮기는 선수가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윌리엄스, 맥라렌, 하스, 포스 인디아 등등 여러 F1 팀들이 서준하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준하는 원하는 게 있었다.
‘반드시 페라리에 들어가야 해.’
출발 준비를 마친 서준하.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전생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선택을 받기 위한 이번 시즌 최후의 레이스에 들어갔다.
< No.5 스메들리 서준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