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 덕분에 많은 걸 얻는구만 >
“자, 이제 미캐닉들이 물러나고 선수들이 포메이션 랩을 돕니다.”
선두 서준하를 시작으로 33대의 포뮬러가 하나의 기차처럼 기아 서킷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GT 월드컵 레이스 중간에 소나기가 잠깐 내렸었는데요. 아직 군데군데 노면이 살짝 젖어있다는 제보가 있긴 했지만, 지금 날씨는 괜찮죠?”
“그렇습니다. 비가 더 내리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안 그럼 마카오 레이스가 정말 지옥이 될 뻔했어요.”
F3 월드컵 시작 2시간 전 잠깐의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마카오의 메인 레이스의 하늘은 맑았다.
이점을 고려해 서준하는 포메이션 랩을 도는 동안에도 적극적인 롤링 대신, 스타트 랩에서 밟게 될 라인들의 특이사항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치중했다.
“메인 레이스는 어제보다 다섯 바퀴 더 많아진 열 다섯 바퀴를 돕니다. 설명해 드렸다시피 모든 선수 동일한 조건으로 드라이브하고요. 타이어 교체는 없습니다.”
“그렇죠. 세팅이나 레이스 엔지니어의 오더 말고는 사실상 팀이 관여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레이스 결과는 오직 레이서의 실력이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F3의 월드 챔피언을 가리는 마카오 메인 레이스. 이제 포메이션 랩을 마친 선수들이 각자의 그리드에 멈춰섰다.
“그린 플래그가 휘날립니다!”
마샬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녹색기를 흔들자 출발 신호가 하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섯 개의 신호 모두 빨간불이 들어오고,
“신호 모두 꺼졌습니다!”
불이 꺼짐과 동시에 경주차들이 쏟아내는 배기음이 마카오 도심에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기아 서킷은 스타트부터 3턴 리스보아 코너까지의 1.6km가 완만한 곡선과 직선 주로 구간이다. 물 흐르듯 막힘없는 클러치 조작으로 출발한 서준하가 쉼 없이 기어를 조작하며 재빠르게 속력을 높였다.
“선두의 서준하. 그 뒤로 크리스, 제프, 딜런...”
경주차가 만들어내는 흔들림 때문인지 아니면, 울퉁불퉁한 마카오의 노면 덕분인지. 스타트 직후부터 최고속에 도달하기까지, 서준하의 온몸으로 거친 진동이 전해졌다. 아마도 메인 레이스라는 중압감 때문에 진동은 평소보다 더 크게 흔들리는 듯했다.
우우우우우웅.
이 진동은 앞으로 40분 남짓한 긴 시간동안 서준하를 더 괴롭힐 것이지만, 한 바퀴를 돌고나면 결국엔 신경 쓰이지 않을 거다. 지난 경험이 그랬고, 그렇게 마음 먹어야 진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아! 이번 대회 우승 후보 딜런 피트! 딜런의 차가 3턴에 진입하지 않고 속도를 줄이며 멈춰섭니다!”
원인 모를 이유로 F3 오스트레일리아 챔피언의 차량이 서킷 바깥으로 멈춰섰다. 겉보기에도, 팀의 정비 내역에도 전혀 문제 없던 차량이 이렇게 단 세 코스만에 멈춰서기도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딜런이 고갤 떨구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합니다....!”
멈춰선 차량의 레이서는 분명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터. 이번 시즌 간절히 원했던 마카오 레이스가 한순간에 끝이 나버린 상황. 시간이 지나서도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머리를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끼이익.
타다다닥.
끼이익.
이번에는 프론트 윙이 주저앉은 브랜든의 차량이 엄청난 불꽃을 뿜어내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등장했다. 다른 경쟁자의 타이어에 밟힌 듯 보이는 프론트 윙은 노면을 긁어가며 괴상한 소음을 냈다. 속도가 현저히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브랜든은 질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턱.
투두두둑.
“아!!!”
결국 브랜든의 프론트윙은 부서져버렸고, 그 잔해가 서킷 위로 뿌려졌다. 그리고,
펑.
뒤따라오던 차량 두 대가 데브리를 밟고 무너졌고, 터져버린 타이어는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지며 움직이는 경주차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다. 3턴 이후 다음 코스까지의 짧은 직선 주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타이어 펑쳐가 난 오드웰과 코디가 계속 달립니다...!”
“아,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잘잘못을 떠나 정말 가슴이 아프네요.”
제구실을 못하는 타이어와 윙을 달고도 끈질기게 레이스를 이어나가는 모습들. 첫 바퀴에서 참가자들이 이 레이스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드러났고, 중계진은 물론 이를 보는 갤러리의 가슴은 미어져왔다.
“아! 결국엔 멈춰서는군요!”
하지만 완주라도 하겠다는 선수들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내 얼마 못 간 경주차들 주변으로 황색기가 흔들렸다.
“역시 마카오 레이스군요...! 선두가 첫 바퀴를 마치기도 전, 총 아홉 대의 선수가 중도 포기합니다...!!”
우승 후보를 응원하던 갤러리들이 넋을 잃고 멈춰선 차량을 바라봤다. 곧바로 SC가 등장하며 서킷에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
[5/15 Laps]
[SC]
“아! 왜 자꾸 자빠지고들 난리야!!”
1랩 크러쉬 이후 또 한 번 발생한 SC 상황. 이를 지켜보던 포르텍 모터즈 코치진들 가슴 속엔 열불이 났다.
“아, 이번 랩 진짜 좋았는데... 그냥 못하면 조용히 멈춰설 것이지...!”
2위를 달리는 포르텍 팀의 레이서 크리스. 다섯 번째 바퀴 본격적으로 맹추격에 들어서려던 참이었지만, 이내 SC 차량이 등장했다. 레이스 엔지니어 메튜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성을 내는데,
“흠...”
메튜의 목소리는 피트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컸지만, 카일 감독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이 짜증스러웠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대회 시간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오늘 레이스 크리스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으니까.
“저거 봐! 저거! 앞에 차가 몇 대인데 저길 저 속도로 진입하냐고...!”
리플레이 되는 사고 장면을 지켜 보던 메튜가 다시 한 번 성을 냈다. 순위권에도 못 미치는 20위권들의 배틀에서 벌어진 크러쉬였고, 중위권들의 그런 시도가 무의미하단 생각에 더욱 열불이 났다.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메튜의 목소리는 포르텍 피트 바깥으로도 세어나갔고, 바로 옆 프리마 팀 피트에서도 듣게 됐다. 프리마 팀 조르조 감독의 생각은 포르텍 팀과 다른 듯한데,
“지금 상황이 더 낫다고 보시는 건가요, 조르조?”
“선두가 더 치고 나갈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우리한텐 훨씬 좋은 상황이야.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상황. 조르조가 피식 웃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선두가 서준하니까.”
3위를 달리며 선두 자릴 노리는 프리마 팀의 레이서 제프 슈마허. 이번 시즌 F3 유로피언 대회를 겪어본 프리마 팀으로선 최대한 랩 수를 줄여 막판 추월을 노리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아. 그, 그렇죠...”
스메들리와 경쟁하는 팀 감독으로선 굉장히 굴욕적인 생각이고, 부하들 앞에서 창피한 발언이다. 하지만 서준하라는 레이서를 겪어본 프리마 팀에겐 그와 격차를 줄여주는 지금 이 상황이 오히려 더 감사하게 다가왔다.
“달리면서 선두를 견제하고 압박해야 하는데, 애초에 서준하는 그럴 틈을 안 주니... 차라리 억지로라도 뒤에 붙어 있다가 마지막에 어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남은 열 바퀴에 어떻게든 서준하를 견제해 선두에 오르겠다는 포르텍 팀의 생각은 우스웠다. 계속해서 중단 없이 레이스가 흐른다면, 견제는커녕 서준하의 뒷모습이 영영 뒤차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건 경험적으로 잘 안다.
“SC 덕분에 많은 걸 얻는구만, 하하.”
SC 상황으로 포르텍 팀의 전략을 알게 됐고, 덕분에 오늘 레이스 목표인 2위 자리에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스 종반 SC가 터져준다면, 우승도 노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프한텐 계속 페이스를 유지하라고 전하게. 혹시 몰라, 우리한테도 마지막 기회가 떨어질지도...”
F3 유로피언 챔피언십을 마치고, 서준하를 이기려면 성능 좋은 다른 차를 타야한다고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탁월한 레이서였다. 하지만 변수가 끊임 없이 벌어지는 마카오 레이싱. 조르조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경기 스타트부터 계속해서 같은 코스를 빙빙 돌다보면 레이서의 예리한 감각이 둔해질 때가 온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쉼 없이 달리는 모터레이싱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집중력이 떨어지는 시간대가 분명히 존재한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지루했던 SC 상황이 끝나고, 선수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서준하는 자신의 주행 라인이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10턴 진입과 동시에 악셀 페달에서 발을 떼고 일부러 차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곧장 대응했다.
끼이익.
시간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위험을 피할 조작에 들어가는 서준하.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테크닉을 구사했다.
훼에에엥.
이어지는 고속 코너에서도 한 차례 주행선이 바깥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 같이 대응해선 안 된다. 코너의 성격에 따라 대책은 달라져야 한다.
완만한 고속 코너 1턴에 진입하는 서준하가 핸들을 좌측으로 꺾기 시작함과 동시에 악셀을 조금씩 풀었다. 그러자 차량이 선회를 시작하며 뒷바퀴가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고속 중에 거는 테크닉이므로 레이서의 담력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악셀을 성급하게 푼다면 속도 덕분에 그대로 스핀이다.
끼이익.
서준하라고 레이스 내내 위기를 겪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서준하는 그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뛰어났다. 특정 순간 베테랑 레이서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이 빛을 발휘했다.
“선두는 계속해서 서준하! 레이스 끝까지 절대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5랩의 SC 상황으로 경쟁자들이 다시 가까워졌다. 서준하가 먼저 강하게 감속하는 구간에선 뒤차가 진입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와 제프가 서준하를 맹추격합니다! 멜코 헤어핀에서 선두와 가까워졌는데요!”
특정 코스와 SC 상황 덕분에 잠시 동안 격차가 줄어든 것일 뿐, 다시 곧 격차는 벌어질 거다. 추월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다. 헤어핀을 빠져나온 서준하가 빠르게 재가속하며 탈출 속도를 높였다.
“아! 서준하가 훨씬 먼저 나오는군요! 다시 금세 격차가 벌어집니다!”
다른 코스에서 벌어진 격차도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마법 같은 공간. 하지만 헤어핀은 진입과 동시에 추격자들에게 앞차를 넘어설 수도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코스일 뿐이다.
“와, 서준하! 헤어핀 탈출 이후 코스 돌파가 상당히 날카로웠습니다!”
“그렇습니다. 21, 22턴 각각 0.05초씩 차이를 벌려냈군요...!”
아주 조금의 차이지만, 매 턴 서준하는 뒤차들보다 빨랐다. 한 턴에서도 실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듯한데,
“스타트 라인을 통과한 서준하! 페스티스트 랩을 기록합니다!”
SC 상황이 끝나고 한 바퀴를 다시 달리자, 포르텍 팀의 생각은 급변했다.
“이. 이게...”
오히려 SC 상황에 큰소리로 화를 낼 게 아니라 고마워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경기 재개 후 크리스는 오버 히트까지 해가며 추월을 노렸지만, 서준하와 계속 멀어졌다. 그리고,
“억...!!!”
뒤따르던 제프 슈마허가 3턴 진입 전 크리스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서준하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무지가 낳은 비극이었다. 날카로운 인라인 오버테이크. 기회를 노리던 제프 슈마허에게 크리스가 당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붙어 크리스! 아직 해 볼 만하다고!”
프리마에게 한방 먹은 포르텍 팀은 여전히 꿈꾸는 중이었다. 금방 다시 2위 자릴 되찾을 거라는 희망은 물론, 계속 달리다 보면 선두를 노릴 기회가 분명 오리라는 믿음을. 이젠 포르텍도 레이스 종반 SC라는 최고의 기회가 오기만을 고대하는 팀이 돼버렸다.
< SC 덕분에 많은 걸 얻는구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