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 챔피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스티어링 조작이 부산스럽지 않습니다. 딱 필요한 구간에서만 사용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고속에선 스티어링 조작만으로도 속도가 준다. 실력 있는 레이서 일수록 스티어링 조작이 간결하고 일정하다. 3턴에 들어가기 전, 단 한번만 스티어링 휠을 꺾은 서준하. 타이어 그립력을 이용하며 코너 정점을 빠져나갔다.
“그렇습니다. 기본기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주법이 상당히 특이한 친구군요.”
특정 코너 진입 전 경주차의 앞머리를 먼저 누르고 코너링을 시도하는 주법이 페라리 관계자들의 눈에 들어왔다. 차체의 방향을 미리 틀어놓고 공간을 막는 드라이빙 스타일은 뒤차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줄 것처럼 보였다.
“맞네, 맞아.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저 친구 배포가 맘에 드는구만. 하하.”
고속 코너에서 악셀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진입을 시작하는 서준하. 선회 중인 차의 악셀을 풀며 뒷바퀴를 일부러 미끄러뜨렸다. 단 0.01초라도 빠르게 차의 방향을 틀어놓으려는 그의 테크닉이 마르치오네 회장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런 건 F1 그랑프리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데 말이야. 아직 어린데도 경험 많은 레귤러 같구만, 그래.”
웬만한 담력이 있지 않고서야 시도하기 힘든 고속 중에 거는 테크닉. 조금이라도 악셀을 푸는 일이 지나치다면,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차는 빠르게 스핀하고 만다. 하지만 페라리 팀이 눈여겨보는 레이서는 그야말로 스피드를 얻기 위해 특정 코너에서 엄청난 배팅을 하고 있었다.
“드라이빙 테크닉 만큼은 스토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 맞아. 자네도 이제 좀 생각이 달라졌나 보지?”
연습 주행 첫 날 서준하를 보고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 했던 페라리 F1 팀의 스카웃 책임자 로만 메이어. 지금 머릿속은 온통 서준하가 보여준 드라이빙에 대한 찬사로 가득했다. 확실히 자신이 점찍어 두었던 2015 GP2 시리즈 챔피언 레이서보다 코리안 레이서의 기량은 훨씬 뛰어나 보였다.
“아직 어리지만 초반 적응만 잘해준다면, F1에 가서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젊은 친구가 레이스 한 번에 우리 로만의 마음을 사로 잡았구만. 하하.”
젊은 드라이버 발굴에 있어 상당한 검증 절차를 가진 페라리 팀. 그 절차의 대부분은 까다로운 성격의 로만 메이어의 영향이 가장 컸다.
“사실 이렇게 급이 다른 선수인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언행도 깔끔하고, 대외적인 이미지도 상당히 괜찮고...”
마르치오네 회장이 서준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뒤로 선수의 과거사를 조사했던 로만. 그의 배경을 알고 난 뒤 지켜보는 레이스는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저 친구를 하스(Haas F1 Team)에 넣는 건 어떨까요? 하스가 다음 시즌 우리 쪽 엔진이랑 기어박스를 원하는 것 같더군요...”
페라리가 자신들의 B팀으로 여기는 F1 팀 하스. 페라리는 종종 자신들이 키우고 싶은 선수를 가지고 딜을 했다. 페라리의 엔진을 커스터머 팀(직접 엔진을 제작하지 않고, 다른 팀의 엔진을 구입해 사용하는 팀)에 넘기고, 페라리가 키우고 싶은 선수를 그 팀에 앉히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로만이 회장에게 서준하를 하스 팀 콕핏에 앉히자고 제안하는데,
“흠... 하스?”
로만이 제시한 건 일반적인 F1 선수들의 페라리 입단 루트이다. 페라리는 늘 F1에서 성과를 보인 슈퍼스타들을 팀에 데려왔다. 하지만 마르치오네는 다른 생각이 있는 듯 보였다.
“아직 레이스 안 끝났네. 좀 더 생각해보자고.”
서준하에 대한 판단은 이미 끝났지만, 페라리로 그를 데려오는 건 그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존 선수 한 명에도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터라, 제아무리 팀 수장이라도 독단적으로 선수를 고를 순 없었다.
쎄에에에엥.
“...!”
때마침 그들 앞으로 레이스의 행렬이 등장했고, 자신의 시선을 빼앗은 경주차에 놀란 마르치오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띠링.
[1위. 서준하 – 11 Laps]
[2위. 제프+ 13.404]
[3위. 크리스 + 15.102]
[4위. 딜런+ 16.569]
.
.
“11랩 스타트! 제프와의 격차는 13초 이상. 준하의 단독 질주입니다!”
2위와 13초라는 어마어마한 격차를 벌린 서준하. 레이스 종료까지 다섯 바퀴가 채 남지 않자, 스메들리 팀원들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 돼, 준하야!”
이번 레이스 유난히 미끄러웠던 17턴. 코너 진입 후 방향을 꺾던 서준하의 차량이 살짝 반스핀하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우어어어!!!”
“미끄러질 뻔 했어...!”
하지만 아슬아슬 차의 방향을 돌려 놓으며 카운터로 극복하는 서준하. 그 모습을 본 팀원들의 가슴이 순간 붕 떴다 가라앉았다.
“괜찮네. 괜찮아.”
스메들리 엔지니어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윌리엄은 표정의 변화 없이 차분했다. 예측 불가능한 돌발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서준하의 주행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으니까.
“걱정마. 준하는 반드시 피니쉬 라인을 통과할 거네...!”
파이널 랩의 마지막 턴을 돌 때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레이스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이번 만큼은 확신했다. 그가 이런 태도를 갖게된 건 그간 서준하가 자신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윌리엄은 레이스를 앞두고, 스메들리 팀이 서준하라는 행운을 얻게 된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서준하는 자신이 스메들리 팀에 오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을 건네며, 오히려 스메들리 팀에 감사함을 표했다. 그 후로 이 어린 레이서가 한없이 높아 보였고, 좀처럼 그의 실패는 생각하지 않게 됐다.
찰칵.
찰칵.
스메들리 피트에 연신 터지는 플래시 세례. 소속 레이서의 활약에 포뮬러 관계자들의 관심은 스메들리 팀에게도 돌아갔다. 지난 여름 몬차에서부터 시작된 취재 열기는 마카오에 들어와 절정을 이뤘다.
“뒤차와 격차는 15초! 이제 세 바퀴 남았습니다...!”
스메들리 팀은 포뮬러 르노 컵부터 F3 챔피언까지, 지난 3년간 총 3개 시리즈에서 전승 우승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다. 언론과 관계자들은 팀원들의 활약에도 조명을 비추기 시작했고, 헨리를 비롯한 퍼포먼스 엔지니어들과 롭이 대형 자동차 메이커 팀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 모든 게 서준하 덕분이었지만, 그는 겸손했고 팀을 추켜세웠다. 어쩌면 이런 선수의 실패를 떠올리지 않는 건 당연했다.
“두 바퀴! 끝이 보인다, 준하야 마지막까지 힘내!!!”
스메들리 팀 전원 윌리엄과 한마음으로 자신이 정비하고 다뤘던 파란색 포뮬러카가 앞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카오 대회 통틀어 이런 일이 있었나요?!”
선두 차량 앞으로 또 다른 차량이 등장했다. 또 한 번의 이변. 한 바퀴를 도는데 2분이 넘는 기아 서킷에 백마커와 선두가 만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24위 아르덴 하거가 우측으로 진로를 바꿉니다! 그에 서준하 또 다른 백마커까지 제치겠다는 의지로 앞으로 뻗어나갑니다!”
일반적으로 레이스를 마친 선두와 꼴찌 차량의 토탈 랩타임 차이는 대략 1분 30초가량. 과거에 비춰볼 때 서준하가 얼마나 빠르게 서킷을 돌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
파이널 랩을 시작한 서준하의 주변으로 갤러리의 함성이 쏟아졌다. 레이싱 중인 서준하조차 미세한 기척을 느꼈을 정도로 환호는 엄청났다.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메인 레이스가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었지만, 지금 파이널 랩 만큼은 매우 느리게 지나갔다. 빨리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파이널 랩의 서킷 중간 지점을 지나서야 긴장이 풀렸고, 조금만 더 벗어나면 F3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스메들리 팀과 서준하의 팬들이 서킷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서준하를 쫓는 경쟁자들은 이미 뒤떨어져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반전이 없었던 서준하의 피니시 장면. 팀원과 팬들은 서준하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체커드 깃발이 휘날립니다!”
마지막 코너를 앞둔 서준하가 등장하고, 수많은 취재진과 사람들이 피니쉬 라인으로 모여들었다.
“피니시!!!”
90도로 급격히 꺾인 마지막 코너. 과거 마카오의 몇몇 레이스에서 탈출 직후 멈춘 차량이 있었지만, 그런 황당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15 마카오 그랑프리 F3 챔피언은 서준하가 차지합니다아아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서준하. 그의 단독샷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무전이 등장했다.
[Smedley Radio]
-예쓰! 예쓰!! 예쓰!!! 우어어어!!!
이번 생 총 7년간, 8개의 대회에서 19개의 레이스를 경험한 서준하. 오늘 우승으로 19전 19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 순간이었다.
***
“언제 나오는 거야?”
“어! 문 열렸어!”
준비된 포디엄 앞으로 모여든 팬과 참가 팀들. 검차와 메디컬 체크를 마친 선수들을 기다리는데,
“서준하아아아!!!”
가장 먼저 무대 위로 등장한 서준하. 포디엄의 가장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무대 아래 팬과 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데,
“2015 마카오 GP F3 챔피언 서준하 선수에게 상금과 FIA 슈퍼 라이선스, 그리고 챔피언 트로피가 지급됩니다!!”
2억 원에 달하는 상금과 골든 트로피를 건네받는 F3 월드 챔피언 서준하. 경쟁 팀 모두 그를 향해 밝은 얼굴로 박수를 보내자,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에 주변에 있던 갤러리들도 더 크게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자랑스러운 애국가가 기아 서킷에 울려 퍼졌다. 모터스포츠 불모지에서 탄생한 모터레이싱 히어로. 애국가를 듣는 순간 서준하는 물론, 이를 지켜보던 한국 팬들도 눈물을 흘렸다.
푸슈우욱.
치이이이.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샴페인을 건네받은 서준하가 세레모니를 했다. 곧이어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준 팀원과 에이전시 그리고 가족들을 향한 감사 인사까지 마쳤는데,
“서준하 선수, 축하드립니다! 와, 이게 그 라이선스군요...!”
감사 인사를 마친 서준하의 곁으로 다가온 시상식 사회자. 그가 들고 있는 슈퍼 라이선스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포뮬러 카테고리는 서준하 선수의 다음 행선지를 두고 엄청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GP2다. F1이다. 아니, 마카오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뭐 그런, 하하.”
F1 시리즈 말고는 관심 없는 모터스포츠 팬들조차 서준하의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지금. 레이싱 카테고리는 온통 그의 거취에 관심을 쏟았다.
“이제는 가고 싶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얘길 꺼내는 서준하.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시상식 앞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다음 시즌은 F1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또 다른 챔피언 자릴 노릴 겁니다.”
“또 다른 챔피언? 설마... 월드 챔피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서준하의 목소리와 그 내용에 당황한 듯한 사람들. 그런 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또 다른 챔피언이라... 그거 우리가 도와줘야겠군요.”
멀찍이 그의 발언을 지켜보던 페라리 팀의 로만 메이어. 흥미롭다는 표정과 함께 서준하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 월드 챔피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