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
띠링.
[30분 뒤에 도착 예정. 집앞으로 나와요]
한서윤으로부터 온 메시지. 주말 아침부터 데려갈 곳이 있다며, 서준하를 재촉했다.
“으...”
욕조에 앉은 서준하. 적당히 데워진 물의 온기가 그의 몸을 녹였다. 아침 조깅 후 느긋하게 즐기는 반신욕이 온몸의 피로를 풀어줬다.
빵빵.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밖으로 나오자 한서윤이 클랙슨을 울렸다. 함박 미소로 가득한 얼굴로 서준하를 반기는데,
“조용한 곳에 가고 싶다고 했지? 괜찮은 곳이 하나 있어. 근데 차로 두 시간 조금 넘게 걸리더라고, 괜찮겠어?”
광고 촬영, 방송 출연, 축하 파티 등등 한국으로 돌아와 다양한 행사에 참가했다. 그밖에도 서준하를 찾는 언론이나 행사가 많았지만, 이탈리아로 넘어가기까지 남은 몇 주는 조금 쉬고 싶었다.
“네, 괜찮아요. 조용한 곳이라면.”
서준하에게 대중의 관심과 인기는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전생에는 자신을 찾는 곳에 매번 얼굴을 비췄지만, 이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휴식 그 자체라는 걸 잘 안다.
화려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레이스에서 성과를 거둬 대중의 관심에 보답하는 것이 환생한 베테랑 레이서의 자세였다.
“아마 거기 가면 생각도 정리될 거고, 부담도 조금 줄 거야.”
한서윤은 포뮬러 원이라는 거대한 무대 앞두고, 선수가 부담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혹독한 훈련 과정은 물론, 이전까지와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곳이 에프원이니까. 그런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고,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와 안정감이 가득한 곳으로 서준하를 데려가기로 했다.
출발 전 휴대폰을 꺼내 서준하에게 보여주는 한서윤.
“어때, 여기 딱 준하 선수가 원하던 곳 아니야?”
화면 속 사진으로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 그 숲으로 하얀 속살을 드러낸 빈 가지들과 그 사이로 끼어든 겨울 햇살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좋은데요? 바로 출발 하죠.”
수묵화 같은 풍경 사진에 빠져버린 두 사람. 한서윤이 강원도 인제로 차를 몰았다.
***
‘어떻게 해야 끌어올릴 수 있을까.’
마라넬로에 입성하기 전까지 휴식 기간 동안 서준하의 머릿속은 온통 이 문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F3 유로피언 챔피언십 5차전 레이스에서 경험했던 무의식의 세계. 분명 또 다른 차원의 레이싱이란 것이 존재했다.
극도의 집중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드라이빙을 좀처럼 잊지 못하는 서준하. 이후 몇 차례 다른 레이스 상황에서 시도해봤지만, 오히려 결과는 더 나빠졌다.
‘이제는 놀이가 아니야.’
지금까진 어리고 경험 없는 레이서들과 경쟁했다면, F1부턴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레이서들과의 싸움이다. 전생부터 쌓아온 경험들이 있지만, 레전드가 되려면 아직 갈고 닦아야 할 것들이 많다. 어떻게든 무의식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야 했다.
“도착!”
“와...!”
이런저런 고민에 빠졌던 서준하. 인제 원대리에 도착해 자작나무 탐방로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끝이 없는 것 같은 자작나무 숲. 매끈하고 새하얀 나무껍질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서준하는 한국인이지만, 사실 한국을 잘 모른다. 환생 후 짧게나마 한국 생활을 한 게 전부.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무와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기서 잠깐 쉬었다가죠.”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숲속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작은 길이 보였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가니 작은 암자가 나왔다.
“와, 이렇게 바깥에서 보니까 나무가 진짜 높구나.”
숲을 빠져나와 멀리서 자작나무를 올려다보니, 그 길이가 족히 20m는 넘어보였다. 숲속에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그 높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숲속에선 나무가 높아 보이지 않던가요?”
지게를 지고 절간으로 들어온 스님 한 명. 암자 마루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네네, 안에선 저렇게 높은 줄 몰랐어요. 바깥에선 다르게 보이는 게 정말 신기하네요.”
홀로 암자에서 생활하는 듯 보이는 스님. 태어나 수행자를 처음 보는 서준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나무의 높이는 변한 게 없이 그대로지만, 나무를 보는 내 마음이 변한 걸지도 모르지요.”
“마음이요...?”
“추운데 잠깐 차 한 잔 하고 가시지요.”
해외 생활을 오래한 한서윤과 서준하에겐 다소 낯선 단어, 마음. 어떠한 통찰이 담긴 듯한 스님의 말씀에 두 사람이 스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와, 향기가 너무 좋아요.”
“지난 봄에 말린 쑥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이 더 진해지니, 그 차이를 느껴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어떨결에 들어온 조그마한 암자. 따뜻한 쑥차에 서준하의 몸이 조금씩 녹아들었다. 어느 정도 차를 음미하고 나니 스님이 다시 얘길 꺼내셨다.
“사람마다 같은 사물을 보고 다른 느낌을 받는 건 마음의 작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분별하고 판단하지요.”
“마음이요...?”
서준하는 직관적으로 느꼈다. 지금 눈앞의 수행자의 말이 어쩌면 자신의 고민을 덜어 줄지도 모른다는 좋은 예감을.
“사물을 보고 느낄 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럽다면, 내가 보는 세상도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태도입니다. 먼저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내가 보고 싶은 사물을 그것 그대로 보세요.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전보다 사물의 본래 모습이 명확하게 보일 겁니다.”
스님의 얘길 듣고 상념에 잠긴 서준하. 이는 경험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또 다른 차원적 레이싱에 대한 집착은 레이스를 망쳤다. 궁극의 경지에 오른 드라이빙을 보여주겠다고 머릿속으로 떠올릴수록 이전과 같이 집중된 상태로 레이싱할 수 없었다. 점점 스님의 말씀에 빠져들게 되는데,
“사물의 모습을 명확하게,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음이 차분하고 집중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그런 상태가 되어야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한 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죠.”
철학적이고 아리송한 말에 고갤 갸우뚱하는 한서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감사합니다, 스님.”
스님의 말이 끝나고 온화한 미소로 답하는 서준하. 스님 역시 합장하며 고갤 숙였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레이싱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발휘하기 위해선 마음이 하나의 집중된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주변의 환경, 차량과 레이서의 상태 등등 레이서는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궁극의 경지에 달하는 퍼포먼스를 내겠다는 생각 등의 어지러운 집착을 버려야 한다. 결국 그때야 비로소 또 다른 차원적 레이싱에 도달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또 뵙겠습니다, 스님.”
우연히 갖게된 수행자와의 대화에서 고민의 무게를 던 듯한 서준하. 감사 인사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암자를 떠났다.
***
“처음 소식 들었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이탈리아 마라넬로에 위치한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본사. 프레스 룸(Press Room)으로 스포츠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F1에 단번에 올라온 것도 엄청나지만, 페라리라니요. 정말 대이변입니다.”
프레스 룸에 모여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 이탈리아의 F1 전문 언론사 코리에르 델로 스포츠와 오토 스프린트 기자들. 서준하의 페라리 드라이버 계약 체결식을 취재하기 위해 마라넬로를 찾았다.
처음 SNS로 전해들은 소문이 공식적인 체결식까지 이어지자, 소문은 곧 진실이 됐다. 다들 아직까지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인데,
“주전 싸움이 엄청 치열할 텐데. 어린 레이서가 이걸 어떻게 이겨낼지 궁금하네요.”
“페텔이나 라이쾨넨이 부상으로 아웃되지 않는 이상.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주전 자릴 꽤 차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거기다 르클레르라는 쟁쟁한 경쟁 상대도 있고요. 서준하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쉬운 길이 아닌 건 확실해요.”
지난 오랜 시간동안 페라리 팀 콕핏은 많은 실력자들이 차지했다. 메인 레이서 대다수가 월드 챔피언 이력이 있는 선수들. 이태리 언론들 대부분이 서준하의 행보가 쉽지 않다고 점쳤다. 그리고,
찰칵.
찰칵.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준비된 자리로 등장한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페라리 회장. 그의 옆으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서준하가 자리에 앉았다.
“F1계에 젊은 드라이버가 늘고 있고, 우리 페라리는 이에 발맞춰 젊고 패기 넘치는 드라이버를 기용하게 됐습니다. 소개합니다...”
회장의 짤막한 인사와 함께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오늘의 주인공이 누군지 잘아는 마르치오네. 평소 성격답게 긴말 없이 곧바로 서준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프레스를 진행했다.
“이번 시즌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새로운 테스트 드라이버, 한국의 서준하 선수입니다!”
서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인사하자, 박수와 환호가 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안녕하세요, 서준하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하는 서준하. 잠시 후, 회견장으로 질문들이 쏟아졌다.
“오토스프린트의 다닐로 기자입니다. 서준하 선수를 페라리로 부른 구체적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프레스 초반 질문의 성격은 비슷했다. 페라리라는 F1 최고 명문팀이 왜 어린 서준하를 선택했느냐는 질문. 그러자 미소를 띤 마르치오네 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데,
“서준하는 이미 실력을 갖춘 선수입니다. F3 역사 이래 전승 우승 챔피언과 마카오 챔피언 달성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죠. 그리고, 슈퍼 루키가 최고의 팀으로 이적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우리 페라리는 F1에서 서준하의 성공 가능성을 100% 확신합니다.”
팀의 고위 관계자들은 물론 임원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준하. 특히 실제 레이스를 봤던 마르치오네 회장 역시 그의 주변에서 풍기는 엄청난 승리의 기운을 보고 놀란 인물이었다. 회장의 답변에 몇몇 기자들이 공감의 박수를 보내는데,
“그렇다면, 이 질문이 빠질 수 없겠죠. 서준하 선수...!”
회장을 향한 인터뷰가 끝나고, 이제 기자들은 서준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라렌과 윌리엄스도 서준하 선수를 원했던 걸로 압니다. 서준하 선수가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페라리 말고도 다른 F1 팀들로부터 좀 더 획기적인 제안을 받았던 서준하. 이 사실을 잘 아는 영국의 기자들이 그를 향해 물었다.
“제가 페라리를 택한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레이서라면 누구나 꿈꾸는 팀. 특히나 서준하에겐 페라리가 전생 자신의 팀이라는 엄청난 메리트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이유가 있었는데,
“저는 월드 챔피언을 꿈꿉니다. 그러기 위해선 최고의 팀이 필요하죠. 저를 최정상에 올려줄 유일한 팀은 스쿠데리아 페라리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과 선명하고 또렷한 목소리. 서준하의 의지와 진심이 드러나는 답변을 꺼내놨다.
“답변 한 번 시원해서 좋구만. 하하.”
서준하의 답변을 끝으로 종료된 프레스. 서준하의 옆으로 다가온 마르치오네가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제 인사 나누러 가지. 다들 기다리고 있네.”
회장과 함께 마라넬로 본사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서준하. 붉은 유니폼을 입은 스쿠데리아 페라리 팀원과 명장 아리바베네가 서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