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10화 (110/200)

< 우리는 늘 최정상에 머물러 왔다 >

“페라리 프로그램 선수도 아닌데?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스쿠데리아 페라리 F1 팀과 별개로 운영되는 페라리 드라이버 아카데미. 서준하의 이적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아카데미 담당자 치로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마르치오네의 눈에 제대로 들어온 모양이구만...”

일반적으로 F1팀의 테스트 드라이버는 아래 세 가지 루트로 발탁된다. 첫째, 페라리 드라이버 아카데미와 같이 팀에서 운영 중인 프로그램의 주니어 선수. 둘째, 현재 부상 등의 이유로 폼은 떨어졌지만, 이미 F1에서 활약했던 입증된 선수. 셋째, 페이 드라이버로 거액의 돈을 팀에 지불하고 콕핏을 차지한 경우가 그렇다.

이번 일은 F1 전례에 없던 일. 페라리 팀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왔던 선수 영입 방식의 틀을 깨부순 대이변이었다.

“다음 시즌이나 다다음 시즌이면 얼추 들어갈 것 같았는데... 훨씬 더 어려워졌어.”

아카데미의 입장에선 프로그램 소속 선수를 하루 빨리 F1 팀으로  흡수시키는 것이 목표였고, 쉴르 르클레르 다음으로 페라리의 테스트 드라이버 콕핏에 유력했던 선수는 제프 슈마허였다. 하지만 서준하에게 F3 챔피언 타이틀과 페라리 콕핏을 빼앗기며, 그의 F1 데뷔 역시 늦춰질 것으로 보이는데,

“...Hass 팀 테스트 드라이버로 있으면서, GP2 시리즈에서 성과를 보이라는 게 윗선의 지시네.”

“B팀으로 가라는 거군요...”

이 바닥은 냉정했다. 기존 프로그램 소속 선수와 슈마허의 아들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것이 바로 레이서의 실력. 소식을 전해들은 아카데미의 책임자 마테오 역시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서준하는 그럴 자격이 있는 선수니까요.”

어찌보면 페라리 팀의 눈밖에 난 걸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가슴 아파해야 할 제프가 본부장과 치로를 향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질투도 나고 화도 조금 나지만, 오히려 서준하를 F3에서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요.”

어리지만 솔직한 성격의 제프 슈마허. 서준하 덕분에 F1 데뷔 이전 자신의 기량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었고, 매 레이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기록을 내게 됐다.

모든 레이서들에게 메인 무대는 F1이다. 만약 먼 훗날 F1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F3에서의 경험이 제프에겐 큰 자산이 될 터. 서준하란 존재는 매 레이스 자신의 실력을 검증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무대이기도 했다.

“GP2 챔피언 타이틀을 들고 나타난다면, 그땐 페라리도 모른 척 할 순 없겠죠.”

“그래, 아직 시간은 많지.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거야. 훌륭한 마인드네, 제프 군.”

포뮬러 관계자들에게 서준하는 특별한 인물이다. 자신의 총 커리어 7년 동안 전 경기 우승을 차지한 괴물 중의 괴물. 제프의 말에 본부장과 치로 역시 치솟았던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배경이 아닌 성과로 당당히 콕핏에 오를 겁니다. 지켜봐주세요.”

겸손하면서도 결의가 담긴 말투. 아직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레전드의 아들이었다. SNS에 연신 오르 내리는 서준하의 사진으로 제프가 시선을 고정했다.

***

“이야, 사진 잘 나왔네. 하하하.”

영국 밴버리의 스메들리 포뮬러의 팀 캠프. 실시간 포뮬러 관계자들의 SNS에 오르내리는 토픽을 보고 스메들리 팀원들이 밝게 웃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마르치오네 회장과 악수를 나누는 서준하. 이탈리아와 영국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그의 이적 소식이 퍼져나갔다.

“아이고, 이거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는구만...”

팀원들의 호들갑에 곁으로 다가선 윌리엄. 이미 알고 있던 소식을 실제 이미지로 확인하자, 더 가슴이 벅찼다. 마치 제 자식의 꿈을 이룬 듯한 감정인데,

“사진으로만 봐도 얼굴이 좋아. 마라넬로에 가서도 기죽은 표정이 아니라고.”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월드 챔피언까지 해보겠다고 말했다네요. 자신감 하난 끝내준다니까. 하하.”

일반적으로 어린 선수라면 권위와 명성에 주눅들기 마련이지만, 서준하는 당당해 보였다. 수많은 베테랑 취재진들로부터 쏟아지는 질문에도 자신 있게 답하며 포부를 드러냈다는 사실이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섭섭하네. 내가 GP2 포디엄에 올라도 눈물 한 번 안 보이시던 분이. 사진 한 장에 완전 눈물 바다야, 크큭.”

눈가가 촉촉해진 윌리엄을 보고 다가선 롭. 그 역시 자신감 넘쳐 보이는 서준하의 사진에 흡족해했다.

“롭, 근데 너 진짜 안 갈 거니?”

2015 시즌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스메들리 팀. 시즌을 마치고 헨리를 비롯한 미카닉 몇 명이 F1 팀 레드불 레이싱으로 이적을 제안 받았다.

롭 역시 레드불 팀으로부터 서브 레이스 엔지니어 직책이라는 엄청난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보류하고 있었다.

“다 이적하면 스메들리 팀은 누가 이끌어요.”

“걱정마. 스메들리도 준하랑 같이 몇 시즌 치르면서 다들 많이 성장했으니까.”

연속 우승으로 스폰서 파워가 막강해진 스메들리 팀. 충분히 훌륭한 인재들을 데려올 자금이 풍부했고, 기존 팀원 대부분이 서준하 없이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음... 사실 서준하 같은 레이서가 아니면, 레이스 엔지니어를 하고 싶은 맘이 잘 안생길 것 같아요.”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와 레이서 사이 호흡은 드라이빙 스타일이 좌우하는데, 롭과 서준하 두 사람 모두 흔치 않은 주법을 가진 레이서였다.

반대로 말하면 거의 대부분의 레이서와 호흡을 맞추기 힘들다는 의미. 본래 레이서였던 롭이 단번에 레이스 엔지니어 자릴 승낙했던 건, 레이서가 바로 자신과 비슷한 주법의 서준하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레이스 엔지니어말고, 전략 책임자 자리에 있으면서 디렉팅 업무를 해볼게요.”

“흠...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근데 말이야...”

롭의 말을 듣고 고갤 끄덕이던 윌리엄. 무언가 생각난 듯 롭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는데,

“준하가 혹시...”

“준하가 뭐요.”

“자리만 잡는다면...”

“자리? 뭔 자리?”

“아이, 아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

자신이 이상한 소릴 내뱉었다며 손을 내젓는 윌리엄. 이제 막 팀의 테스트 드라이버로 입단한 서준하에게 왠지 모르는 또 다른 기대를 걸게 됐다.

“아무튼 준하가 잘 돼야 할 텐데...”

롭은 물론 윌리엄 역시 꿈꿔왔던 레전드 팀 페라리. 윌리엄이 잠시나마 페라리 유니폼을 입은 아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

페라리의 헤드쿼터 마라넬로(Maranello)는 실로 거대하다. 로드카를 만드는 팩토리부터 뮤지엄, 전시장, F1 팀의 팀 하우스와 작은 서킷까지. 세계 경주차 제작의 끝판왕 업체답게 다양한 시설과 설비를 갖추고 있다.

[Essere Ferrari(우리는 페라리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스쿠데리아 페라리(F1팀)의 거대한 팩토리로 들어온 서준하. 그의 앞으로 팩토리 건물의 거대한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담당 스태프의 인도를 받으며 팩토리 내부로 들어섰다.

[우리는 늘 최정상에 머물러 왔다]

F1 그랑프리에서는 시즌 우승컵을 드라이버와 팀에게 각각 수여한다.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은 선수를 월드 챔피언, 소속팀 드라이버의 포인트를 합이 가장 높은 팀에게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준다.

[포뮬러 원 월드 컨스트럭터 챔피언 16회 달성]

페라리가 위대한 건 실제 그들이 세운 업적 때문인데, 1958년부터 2015년 시즌을 끝낸 시점에서 페라리는 16번 타이틀을 따냈다. 그 다음 2위 윌리엄스가 9번이라는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이는 실로 압도적인 성과다. 게다가,

[월드 챔피언 배출 횟수 15회 달성]

컨스트럭터별 월드 챔피언을 배출한 횟수 역시 최고 기록을 달성하며,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50개 스포츠 팀 중 매년 빠지지 않고 등록된다. 게다가 현재 F1 레이싱 팀 중 가장 가치 있는 팀으로 평가되는데, 덕분에 한 시대를 평정했던 레전드 레이서들은 모두 페라리를 거쳐갔다.

[알베르토 아스카리, 니키 라우다. 후안 마누엘 판지오, 나이젤 만셀, 미하엘 슈마허...]

팩토리 내부로 들어서는 길목으로 팀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고스란히 서준하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페라리의 식구가 된 걸 환영하네.”

높은 천장 위에서 쏟아지는 조명. 넓디 넓은 메인 게러지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서준하를 반겼다.

“마루치오 아리바베네라고 하네. 팀 총책임자 자릴 맡고 있지.”

뒤로 넘긴 흰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 60대를 넘어섰지만, 흰수염과 터프한 인상에서 나오는 카리스마가 엄청난 인물이다. 전생에 이어 다시 한번 아리바베네를 마주하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린 원래 새 식구가 오면 이렇게 곧바로 환영식을 갖네. 자, 다들 인사 나누게.”

친근한 말투와 함께 서준하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리바베네. 마르치오네 회장이 그를 신임하는 이유가 보이는 듯했다.

아리바베네는 팀원들과 격 없이 지내는 몇 안되는 감독이다. 팀과 F1 그리고 메카니즘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인물이지만, 평소 선수들과 친구처럼 지낼 정도로 신뢰 관계 형성에 공을 들인다. 때문에 선수들은 물론 팀원들과 소통을 자주하는 감독이다.

“이분은 기술 감독(Technical Director) 제임스 알리슨. 이쪽이 우리 팀 CTO 엔진 담당자(Chief Engineering Officer) 마티아 비노토. 여긴 전략 감독(Chief Strategy Officer) 안토니아치와 루에다 아마 초반에 가장 많이 얘길 나누게 될 거야. 그리고 여긴...”

서준하 앞으로 늘어선 수십 명의 팀원들. 각 부서의 책임자부터 미캐닉 피트 크루까지 감독의 소개와 동시에 서준하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자, 여긴 다 아는 사람들이지?”

감독의 말과 동시에 서준하의 앞으로 다가서는 세 사람. 페라리의 레이서들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서준하와 경쟁하게 될 지도 모르는 사내들.

“왠지 볼 것 같았어. 반가워, 라이쾨넨이다.”

2007년 페라리에서 월드 챔피언을 달성하고, 재작년 다시 팀으로 복귀한 키만 라이코넨. 지난번 몬차에서 서준하를 봤던 기억이 떠오른 듯 보였다. 옆에선 또 다른 레이서도 고갤 끄덕이는데,

“그래 맞아, 잘타더라 너. 난 페텔이야. 환영한다.”

서준하의 입단 소식에 놀란 건 페텔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역시 F3 이후 곧바로 F1에 데뷔했지만, 데뷔 팀이 페라리 같은 강팀은 아니었다. 살짝 여유로운 듯한 미소를 지은 페텔이 악수를 건넸다.

“고맙다, 잘 부탁해.”

월드 챔피언들 앞에서도 서준하는 주눅들지 않았다. 특히나 챔피언 이력을 가진 레이서들과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곁에선 팀원 몇몇은 이런 당당한 한국의 어린 레이서를 보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쉴르 르클레르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작은 얼굴. 모나코의 신성이자 페라리의 또 다른 기대주 르클레르가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 서준하다.”

르클레르의 손을 맞잡은 서준하.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첫 타겟은 너야.’

다른 선수들과 달리 별다른 말이 없는 르클레르. 그의 긴장한 눈빛을 서준하가 포착했다.

< 우리는 늘 최정상에 머물러 왔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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