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안토니아치. 이 팀의 전략 감독이네 >
“갈리에라, 같이 한 바퀴 돌면서 포뮬러 워모(Formula Uomo)를 소개해줘요.”
페라리 팩토리의 애칭, 포뮬러 워모. 오직 최고만을 추구하는 페라리의 경영관리 시스템을 가리키는 이 말은 페라리의 어제와 오늘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다.
아리바베네 감독이 시니어 VP 마케팅 커머셜 담당자 갈리에라에게 서준하를 부탁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준하 선수. 이렇게 만나게 돼서 너무 반갑습니다. 엔리코 갈리에라라고 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 서준하를 데리고 머신 제작 작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엔진 제작부터 차체 도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하나의 공장에서 진행하는 세계 유일의 시설이죠. 자, 한 번 둘러보시죠.”
70여 년 전, 엔초 페라리가 꿔왔던 꿈을 현실로 재현해내는 공간. 비현실적인 무형의 꿈이 이곳에선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안내를 받고 들어서자, 머신의 강렬한 엔진 사운드가 서준하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페라리의 슈퍼카 제작은 물론 F1 경주차 역시 이곳에서 만들어집니다. 앞으로 새로운 시즌 준비를 위해 이곳을 많이 찾게 되실 겁니다.”
엔초 페라리의 마지막 작품, F40 앞에선 서준하. 전생 처음 자신이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강하게 올라왔다. 미스터 페라리의 영혼이 담긴 듯한 이 강렬함은 다시 한 번 이곳을 찾는 이의 몸에도 전율을 일으켰다.
“근데, 많이 놀랍지 않으신가 봅니다. 보통 이곳에 오시면 입을 다물지 못 하시던데요. 하하.”
페라리의 새식구들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라넬로 소개에 나섰던 갈리에라. 메인 팩토리 이곳 저곳을 훑어보는 서준하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꺼냈다.
“아마 여기가 엔지니어링 파트가 메인이라 큰 감동을 못 받으신 듯한지만, 이번에 갈 곳은 아마 레이서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죠.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가시죠.”
자부심이 넘치는 듯한 갈리에라의 태도. 새로운 식구에게 잔뜩 기대감을 심어주는데,
“잉?”
페라리 워모 내 레이서들이 천국이라 부르는 곳. 사실 갈리에라가 어디로 가려는지 서준하도 잘 알았다. 그 공간 역시 하루 이틀 드나들던 곳이 아니었으니까.
“이쪽인가요?”
먼저 메인 팩토리를 나선 서준하. 바로 옆 실내체육관 만한 규모의 거대 차고를 가리키며 마치 어려 번 이곳을 찾은 사람과 같은 얼굴로 갈리에라에게 물었다. 익숙함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갈리에라가 당황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굉장하군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역대 페라리 F1 경주차들과 한정판 슈퍼카 FXX가 서준하를 맞이했다. 수십 대의 F1 경주차가 거대 차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미지는 그야말로 장관. 수차례 이곳을 지나쳤지만, 새로운 삶의 눈으로 새빨간 머신들을 마주하자, 다시 한 번 깊은 전율이 밀려왔다.
“지난 70년 간 페라리 팀과 함께 했던 경주차들입니다. 스티어링 휠만 일반 공도용 휠로 교체됐고, 나머지 부품은 모두 순정 상태 그대로죠. 아참, 한번 앉아보셔도 괜찮습니다.”
실제 그랑프리에 출전했던 경주차들. 은퇴 후 2년이 지난 머신들은 일반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다. 평균 가격은 대략 15억 원 가량. 오너들은 페라리 테스트 트랙에서 ‘자신의 F1 머신’을 운전할 수 있는 엄청난 혜택까지 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FXX를 훑어보며, 게러지 문 앞으로 고갤 돌린 서준하. 짧은 머리의 금테 안경을 낀 이태리 남성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전생에도 본 적 없는 남자. 조금 전 메인 팩토리를 빠져나올 때도 자신을 흘겨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었다. 직원 수가 수백 명에 달하는 만큼 이내 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팩토리 작업 환경을 높은 곳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페라리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갈리에라의 안내와 함께 통로를 거쳐 거대 차고의 위층으로 올라간 서준하. 어른 키에 몇 배는 됨직한 커다란 고무나무가 가장 먼저 그를 반겼다.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이 인간에게 좋을 리 없죠. 마라넬로에는 총 1천여 그루가 넘는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공장 면적의 30%가 녹지로 이뤄져있죠.”
“녹지와 조화가 아름답네요.”
“이곳이 꿈의 공장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녹지 덕분입니다.”
최고의 퍼포먼스는 사람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믿는 페라리.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믿는 그들의 철학은 이런 작업 환경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또한 페라리를 전생에 걸쳐 다시 또 선택한 이유. 환경, 기계, 사람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 페라리의 심장에 서준하가 다시 왔다.
“오늘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안토니아치가 서준하 선수를 찾으시더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멀찍이 홀로 서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갈리에라. 그가 가리키는 건 조금 전 금테 안경의 남자였다.
***
기업들이 모터스포츠에 투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투자에 비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 전 세계 420억 명이 시청하는 F1의 경우, 브랜드 인지도가 늘어남에 따라 매출이 증대될 가능성도 매우 크다.
“지금 관심을 보이는 곳 가운데, 가장 굵직한 곳이 티엘 은행입니다.”
필립 황의 집무실로 들어온 유건석 실장이 밝은 미소로 좋은 소식을 전했다.
“오호, 티엘 은행이요?”
사실 서준하의 페라리 이적 소식에 가장 놀란 건 국내 기업과 언론들이었다. 덕분에 서준하 개인을 후원하겠는 문의가 쇄도했다.
“그렇습니다. 서준하 선수의 개인 스폰서를 희망하더군요.”
“티엘 정도면 페라리 팀을 스폰해도 될 정도 아닌가?”
레이싱 팀의 운영자금은 대부분 기업의 투자로 충당된다. F1 팀은 굵직한 타이틀 스폰서 말고도 10여 개 이상의 여러 기업과 손을 잡고 있다. 한국에서도 규모가 있는 티엘 은행 정도면 페라리 팀 스폰서로 나서도 될 터.
“아직 초반이니 그렇게 적극적으로 투자할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다른 팀도 아니고, 페라리에 광고를 내려면 그 비용이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F1 경주차나 드라이버들의 유니폼에 붙는 스폰서 타이틀. 서준하가 메인 레이서가 아닌 상황에서 스폰서들은 서준하의 개인 후원만을 자청했다.
한 시즌 광고판 하나에 많게는 800억 원에 달하는 광고비가 들어가니 글로벌 기업이 아닌 이상 쉽게 내릴 수 있는 선택이 아닌 건 사실이다.
“아마 진행하게 된다면, 티엘 은행은 광고 촬영을 요구할 것으로 보입니다.”
“광고 찰영? 그건 뭐 어려울 게 없는데. 흠... 근데 그럼 한국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거죠?”
필립은 지난번 이태리로 떠나기 전 서준하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다음 시즌 반드시 F1에 데뷔하겠다는 그 말. 큰일이 아닌 이상 더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이긴 한데, 사실 페라리에서 버텨내려면 티엘 정도의 스폰 기업이 있어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요 실장님. 촬영을 이태리에서 하는 쪽으로 조율해 보세요. F1 메인 자릴 차지하는 순간, 모자에 티엘 은행 마크를 크게 하나 박아드린다고 말씀드리고요. 하하.”
농담을 던지며 웃는 필립 황. 서준하가 메인 레이서 자릴 꿰차는 순간, 티엘 같은 국내 대기업은 물론, 글로벌 기업의 후원 문의가 쇄도할 거다.
“F1 데뷔만 해도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대표님 말씀처럼 이번 시즌 서준하 선수가 얼마나 자릴 잡을 수 있는지가 정말 중요하겠군요. 저 역시 어서 그런 날이 오길 바랍니다.”
테스트 드라이버는 가수 연습생과도 같다. 그들도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먹고 산다. 페라리라는 대형 기획사에 들어갔다고 해도, 레이스라는 무대에 나오지 못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금방 잊을 것이다.
“잘해주겠죠. 서준한데.”
서준하에 대한 깊은 믿음을 보이는 필립 황. 마누엘 슈마허는 개인 스폰서만 10여 개 기업에 달해 광고로 버는 돈이 연봉보다 많았다. 필립은 서준하 역시 슈마허와 같은 억만장자 레이서가 되는 모습을 꿈꿨다.
***
“나는 안토니아치. 이 팀의 전략 감독이네.”
깔끔하고 단정한 헤어와 반짝 빛나는 금테 안경이 인상적인 남자. 팀의 고위급 임원이었지만, 서준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이로 보아 아마도 전생에 자신이 데뷔했던 2018년 시즌 이전에 은퇴한 인물이라고 짐작됐다.
“그리고 이쪽은 전략과 팀원 이나키 루에다. 테스팅 주행 전까진 우리와 함께 하게 될 거야.”
그 옆으로 반가운 얼굴의 루에다가 인사를 건넸다. 전생 서준하가 데뷔했을 당시 팀의 전략 감독이었던 루에다. 평소 굉장히 유쾌한 성격이지만, 지금은 상관 앞이라 그런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2월에 있을 뉴머신의 테스팅 주행 전까지 F1에 대한 적응을 최대한 앞당겨 달라는 게 감독님의 지시네.”
레이싱 카테고리의 최고봉 격인 F1. 경주차 조작부터 경기규칙까지 레이서가 새로 익혀야 할 내용들이 산더미다. 본래 테스트 드라이버에 대한 교육을 부하 직원 루에다에게 맡겼지만, 이번 만큼은 안토니아치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이는 곧 윗선에서 서준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증명한다. 인사를 나눈 서준하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루 빨리 자네가 F1 경주차를 몰고 서킷을 누비는 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네. 아마 그동안의 여유 있는 생활은 조금 제한될 게야. 하지만 그랑프리에 데뷔하는 순간, 엄청난 보상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명심하게나. 자넨 선택 받은 인재네.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야. 잘 따라와줬으면 좋겠네.”
오늘 처음 본 안토니아치였지만, 그는 솔직하고 정이 많은 인물 같았다. 좋은 예감이 밀려옴과 동시에 새로운 인물로부터 받게 될 배움 앞에 설렘을 느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토니아치.”
서준하 역시 안토니아치의 목표와 같다. 하루 빨리 F1에 데뷔하는 일 말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오로지 레이싱카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한 생활. 안토니아치가 ‘제한된’이라고 표현한 생활이야말로 서준하가 갈구했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만 기억해주게.”
첫 만남부터 연신 미소를 보이던 안토니아치가 이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서준하를 바라봤다.
“성실하거나, 솔직하거나, 착하거나, 아니면 뭐, 비즈니스를 잘하거나... 페라리는 그런 레이서를 원하지 않아. ”
“...”
“우린 실력 있는 테크니션을 원하네. 그랑프리에 나가고 싶다면 여기선 그것만 고민해주게.”
어떻게 임팩트를 남길 것이냐에 대한 대답은 바로 레이서의 실력. 서준하 역시 F1에 오르기까지 매 시즌 고민했던 내용이었다.
“보여주게, 자네의 가능성을.”
본격적인 교육에 앞서 안토니오치가 기대에 찬 눈으로 서준하를 바라봤다.
< 나는 안토니아치. 이 팀의 전략 감독이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