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15화 (115/200)

< 수백만 경쟁을 뚫고 그 자리까지 왔겠지만 >

“무젤로(Mugello Circuit)에서 하는 게 좋겠구만.”

“무젤로에서요?”

이탈리아 3대 서킷 중 하나로 꼽히는 무젤로 서킷. 스쿠데리아 페라리 팀 소유의 서킷으로 프리 시즌 테스트를 진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리바베네 감독의 말에 전략 팀원들이 고갤 갸우뚱거렸다.

“피오라노(Fiorano Circuit) 말고, 굳이 무젤로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마라넬로에 위치한 테스트 트랙을 두고, 1시간 거리의 무젤로에서 프리 프랙티스 출전 선수를 결정하겠다는 감독. 그의 말에 루에다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묻는데,

“피오라노는 공평하지 못하지. 르클레르는 이미 피오라노를 많이 경험했잖는가.”

“그렇긴 하죠. 작년부터 061 엔진 테스팅 하느라 많이 돌았으니까요. 흠...”

아리바베네가 서준하를 편애하는 건 아니었다. 기회는 두 선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감독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스태프들이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했다.

“무젤로면 두 선수 다 쉽진 않겠군요. 잘 만들어진 서킷이지만, 난이도가 꽤 있는 곳이라.”

“그렇지. 사실 무젤로를 택한 건 형평성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드라이버의 적응 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페텔은 물론 역대 훌륭한 페라리 드라이버 모두가 극찬했던 무젤로 서킷. F1 GP가 열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잘 설계된 서킷 가운데 하나다.

많은 코너가 고속코너로 이루어졌으며, 오르막과 내리막이 겹치는 구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짜릿함이 들 정도로 다이나믹하다.

“무젤로라면 새로운 코스에 대한 적응도, 타이어 관리, 기상 악화와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 등등 드라이버에 대한 충분히 다양한 평가가 가능한 곳이지.”

아리바베네의 목적은 단순히 출전 선수를 가리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이런 선발전 역시 드라이버가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과정. 승부와 상관없이 어린 선수들의 성장에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과제였다.

“오케이, 다들 이견이 없는 것 같구만. 그렇다면, 브라얀. 다음 주 무젤로 서킷 스케쥴 좀 알아보고, 가능한 빨리 예약해두게.”

“다음 주에 바로 진행하시는 건가요?”

“일주일의 시간이면 시뮬레이터로 탐사 정도는 확실히 마칠 수 있겠지. 시간을 더 여유 있게 가졌다간 새로운 서킷에서 하는 의미가 떨어질 거네. 어차피 지금 이건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한 과정이 아니니까.”

새로운 환경에 누가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지, 또 실전에서 어느 선수가 더 기량을 뽑아낼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탐사 정도만 가능한 시간을 주고 테스팅에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루에다, 자네는 이번 레이스 준비를 책임져주게. 차량 운송부터 미캐닉 팀까지 인원 편성과 준비를 맡아줘.”

이제 막 들어와 F1 카를 다루는 시작한 신입과 적응 기간을 마치고 기량을 끌어 올리고 있는 레귤러 간의 대결. 사실 무젤로에서 레이스를 한다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의 경쟁은 여전히 서준하에게 불리하다.

지난 몇 주간 서준하의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더라도, 지금 대다수의 팀원들은 르클레르의 압승을 예견하고 있었다. 아리바베네 역시 르클레르가 이길 거라 생각했지만, 두 선수의 성장 그리고 무엇보다 신입 레이서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럼, 오늘 회의 내용 두 선수에게 전달해주게.”

***

“치프(Chief), 이참에 이번 시즌 아시아 쇼런(Showrun)은 어떻습니까?”

2016년 페라리 팀의 헤드쿼터 마라넬로. 이곳을 찾는 아시아 관광객들이 늘었고, 페라리 팩토리, 뮤지엄, 서킷 투어가 예년에 비해 활발해졌다. 팀의 마케팅 커머셜 담당자 갈리에라가 자신의 상관 마티아치 커머셜 책임자를 향해 쇼런에 대해 물었다.

“아시아 팬덤을 좀 더 늘리는 쪽으로 이벤트를 생각해봤는데요. 쇼런 같은 순회 이벤트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준하라는 동양인 최초의 페라리 드라이버가 페라리에 들어가자, 덩달아 팀에 대한 관심도 급상승했다. 유럽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모터스포츠. 서준하의 이적 이후 페라리가 아시아의 팬덤을 키울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쇼런이면, 레드불 팀에서 몇 년 전에 한 번 했었지 않아? 마케팅 효과가 그닥 크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른 프로스포츠보다 유독 F1에서 규모가 있는 부서 중 하나인 커머셜 파트. 그 자체로 하나의 회사처럼 기능하는 F1 팀은 최대한 광고 노출을 하기 위해 마케팅에 힘쓴다. 책임자 마티아치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지금은 서준하가 우리 팀에 있지 않겠습니까? 자국 선수가 F1 카에 타고 있으면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아시아권에서도 같은 동양인 선수가 콕핏에 오른 걸 보면, 레드불 때와는 다른 반응이 나올 게 분명 합니다.”

일전에도 여러 F1 팀들이 아시아권 팬덤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한 이유는 아시아 팬들이 열광하고 공감할 만한 요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탈리아를 찾는 팬들의 반응으로 봤을 땐 쇼런은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다.

“먼저 한국에서 페라리 팀과 머신에 대해 소개하고, 한 번도 서킷을 찾아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F1 카의 터보 엔진음을 들려주는 겁니다.”

갈리에라의 말에 조금씩 고갤 끄덕이는 마티아치. 필립 모리스를 비롯한 페라리의 메인 스폰서들 역시 매해 아시아권에 광고 노출을 원했었다. 이런 이벤트가 신규 팬덤을 형성할 새로운 유입로가 될지도 모르는 일.

“앞으로 서준하가 메인 레이서가 되거나, 적응을 못 하고 방출되면, 그땐 늦습니다. 지금 테스트 드라이버로서 여유가 있는 시기에 적극 활용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활용이라는 단어는 조금 거북스럽지만, 팀원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줘야지.”

“네, 맞습니다. 게다가 이 친구 훌륭한 애슬릿인 동시에 비즈니스맨으로서 자질이 좀 있습니다. 대중 앞에 선 모습들을 몇 번 봤는데,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연스럽고 여유롭더군요.”

현대 모터스포츠 드라이버는 할 게 많다. 수백억짜리 F1 카는 공짜로 굴러가지 않는다. 서킷 안에선 뛰어난 스포츠 선수로서 실력을 발휘해야 하며, 서킷 밖에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팬덤을 끌어내는 비즈니스맨이 돼야 한다.

레이서들의 평소 인터뷰를 봤던 프로페셔널한 마케팅 담당자의 눈엔 서준하는 훌륭한 비즈니스맨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울 도심에서 페라리 F1 카를 운전하는 한국인 F1 드라이버라... 괜찮을 것 같기도 하구만.”

한국 모터스포츠 팬들에겐 역사적인 장면으로 여겨질 서준하의 쇼런. 마티아치가 서울 도심에 서준하의 F1 카가 뿜어내는 배기음이 울려 퍼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생각보다 고저차가 제법 있지?”

프리 프랙티스 선수 결정전 당일 오전. 서준하가 레이스 엔지니어 데이브 그린우드와 함께 무젤로를 걸었다. 서준하 역시 익숙하지 않은 무젤로 서킷. 5번 코너를 지나자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는 높고 낮은 코스들이 연속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기온은 5도 정도. 이따 오후에는 조금 더 올라가겠지만, 그래도 노면 온도는 10도 안팎일 거다. 생각보다 머신이 말을 잘 안 들을 테니, 이점 유의해.”

1월 말 이태리 토스카니는 여전히 쌀쌀했고, 아침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노면이 살짝 미끄러운 곳도 보였다. 새로운 서킷은 물론 레이싱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까지 더해진 힘겨운 레이스가 예견되는데,

“르클레르도 이제 막 나오네.”

자신의 레이스 엔지니어와 함께 서킷에 등장한 르클레르가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GP2 챔피언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F1보다 하위 카테고리긴 하지만, 두 카테고리의 차이는 운이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정도로 사실상 GP2나 F1 선수나 실력은 비슷비슷하다.

게다가 곧바로 페라리에 들어왔다면 몇 안 되는 훌륭한 루키. 서준하 역시 오늘 오후 레이스가 무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마지막 두세 바퀴에서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 거야. 지금 노면 컨디션으로 보나 레이서들의 적응도로 보나, 집중해서 레이스해야 할 거다.”

서준하가 처음 페라리에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길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견했다. 그 이유는 페라리가 최고의 선수만을 고집하는 팀이기 때문이다. 2014 시즌 F1을 제외한 모든 카테고리에서 F1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은 르클레르도 오랜 기간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받으며 아직도 주전에 오르지 못했으니까.

‘쉬울 거라 생각한 적 없어.’

전생에도 팀은 레이서들을 경쟁시켰고, 혹독한 과제를 던져줬다. 이 모든 게 페라리를 선택한 순간 예견했던 것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전쟁터 같은 이곳에서 홀로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두두두두두두둥.

두두두두두두둥.

탐사를 마치고 시간이 흘러 레이스 시작 시간이 됐다. 서준하의 옆으로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르클레르가 등장했다. 자신의 경주차 앞에선 그와 서준하가 눈이 마주쳤다.

“오늘 주행은 딱 10바퀴. 10바퀴 동안 베스트 기록을 뽑아낸 사람이 승리하는 거네.”

르클레르는 F1의 로열 로드(고카트, 르노, F3, GP2)라 불리는 과정을 거쳐 이곳에 온 레이서다. 매 레이스 승리를 거두며 당연스럽게 페라리에 들어왔다. 서준하가 제아무리 유망한 선수라고 해도 그의 눈엔 서준하는 그저 이제 막 들어온 신입에 불과했다.

“자, 그럼 르클레르부터 출발하도록 하지.”

카트를 타던 시절부터 르클레르는 F1 레이서를 꿈꿔왔다. 그들은 어느 스포츠를 막론하고 최고의 연봉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지난 커리어 동안 자신은 그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고, 그들처럼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신입과 이런 레이스를 펼치게 된 오늘의 상황은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GP2 챔피언인 자신이 보다 낮은 F3 챔피언과 같은 평가를 받는 기분이었으니까.

“자, 준하. 이제 출발하게.”

부와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스태프의 사인에 맞춰 피트를 나선 서준하의 경주차. 사자의 울음처럼 낮고 길게 울리는 배기음이 피트 안에 울려 퍼졌다.

‘긴장했구나, 너.’

서준하의 눈앞 저 멀리 경쟁자의 차량이 보였다. 콕핏에 오르기 전, 르클레르는 넘치는 자신감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목소리에 힘을 주었고, 묻는 말에 대답이 빨랐다.

하지만 서준하의 눈엔 그저 요란을 떠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신감이 생겼다.

‘수백만 경쟁을 뚫고 그 자리까지 왔겠지만...’

F1 데뷔를 꿈꾸는 르클레르와 F1 역대 최고의 챔피언을 꿈꾸는 서준하. 서로의 주행을 겪어본 적 없는 두 사람 간의 대결이 시작됐다.

‘날 만난 건 네 커리어 최악의 불운이다.’

< 수백만 경쟁을 뚫고 그 자리까지 왔겠지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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