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변으로 경주차 한 대가 접근 중이다 >
포뮬러 원 GP는 금요일 연습주행을 시작으로 토요일 예선전 퀄리파잉, 일요일 본선 레이스로 끝난다.
연습 주행은 각 세션을 나눠 금요일에 연습주행1, 2(이하 FP1, FP2) 금요일 예선 전에 FP3으로 나눠 진행한다.
세부적인 진행은 각 팀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실제 서킷을 돌기 전 가상의 데이터들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 예선과 본선 레이스에 맞는 셋업의 기반을 다진다.
특히 FP1 주행은 테스트 성격이 강한데, 새로 개발된 부품들을 테스팅하거나, F1 데뷔를 앞둔 젊은 선수들이 주행을 하기도 한다.
“오늘 스페인 그랑프리. FP1 출전 선수 명단이 좀 흥미롭죠?”
“그렇습니다. 르노 팀의 에반 오콘 선수 그리고 하스의 코리안 레이서 서준하가 출전합니다.”
지난 2월 공식적인 테스팅 주행이 있었던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는 몹시 추웠지만, 지금은 5월의 따스한 햇살이 서킷에 내리쬐고 있었다.
FP1 시작 15분 전, 각 팀 참가자들이 게러지 안에 대기하며 출발 전 마지막 점검에 들어섰다. 오늘 처음으로 FP1에 출전하는 서준하 역시 기술 개발 담당자와 준비 사항을 체킹하며 콕핏에 올랐다.
“자, 지금 나오는 선수가 한국의 서준하 선수죠. 팀원들과 얘기를 나누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지난 시즌 F3에서 넘어오고, 곧바로 이번 시즌 F1 경주차에 탔는데요. 오늘 출전한 많은 선수들의 과거와 비교했을 때 FP1 출전 시기가 굉장히 빠른 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페라리 팀이 드라이버 교체를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사실 놀라운 점은 이 선수의 나이입니다. 1998년생으로 굉장히 어린 축에 속하거든요? 막누스보다 아직 한 살 어려요.”
참가자들보다 다소 어린 나이와 누구보다 빠른 FP1 출전 시기. 시작 전 중계진의 관심은 마찬가지로 오늘 첫 출전에 나서는 오콘보다 서준하에게로 향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둥.
하스 팀 게러지에 대기하며 시간을 살폈다. FP1이 시작되는 11시의 5분 전, 서준하는 출발을 알리는 녹색 신호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동이 걸린 차량이 주는 진동과 함께 심장 박동도 점점 빨라졌다.
‘하던 대로 하자. 너무 힘을 주지도, 빼지도 말고 적당하게.’
테스트 드라이버들에겐 일 년에 한 번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FP1 주행. 팀으로부터 마지막 확실한 신뢰를 얻기 위한 서준하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기회였다. 조금 떨리는 일이 당연스러웠지만,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풀어나가야 할지 잘 알았기에 그 떨림이란 소용돌이의 중심엔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녹색불 켜졌습니다!”
공식적으로 프리 프렉티스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들어오고, 중계진의 관심은 각 팀의 게러지로 향했다. 카메라가 참가 팀 피트 이곳저곳을 잡으며 먼저 출전할 선수를 기다리는데,
“바로 나오는군요.”
예선과 본선처럼 레이스의 성격이 없는 연습 주행. 랩 수를 늘리려는 참가자부터 아주 오랜 시간 피트에 머무는 참가 선수들까지. 저마다 자신들의 전략에 맞게 출발 시기를 잡는다. 반면, 오늘 최대한 많은 랩을 소화하기로 결심한 서준하가 가장 먼저 피트 레인에 올랐다.
“2016 스페인 그랑프리, 연습 주행 첫 주자로 하스의 서준하가 나옵니다.”
뉴 페이스의 등장과 함께 그를 향해 다양한 시선들이 움직였다. 콕핏에 앉은 참가 선수부터 서킷 구석 포토존에 대기 중이던 카메라맨들까지. 특히나 페라리의 코치진들은 걱정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서준하의 스타트를 바라봤다.
***
-오콘, 타이어 그립감은 어떤가?
DTM(독일 투어링카 마스터즈)은 독일에서 개최되는 세계 3대 투어링 자동차 경주 중 하나이다. DTM 챔피언은 F1이나 르망 24에 출전할 기회를 갖는데, 오콘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생각보다 노면 온도가 높다. 계획보다 좀 더 빠르게 페이스 올리는 시기를 앞당기겠다.”
-흠... 카피
리어가 조금 들뜨긴 했지만, 평소 프론트 그립을 많이 주행 스타일인 오콘에겐 지금 그립감은 만족스러웠다. 3턴 초대형 헤어핀에 들어온 오콘이 탈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코너를 재빠르게 돌았다.
-코너 탈출과 동시에 앞차 주의. 탈출 지점에 하스 차량 한 대가 서행 중.
FP1 초반 서킷에 올라온 차들은 대부분 서행하며 트랙을 탐사하고 있었다. 무전을 듣고 3턴을 빠져나온 오콘의 앞으로 하얀색 하스의 포뮬러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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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1 초반 자신의 주목도를 빼앗은 남자. 오콘이 앞차를 보고 더욱 강하게 악셀을 밟았다. 오콘은 서준하를 의식했다.
-갑자기 속도가 너무 빨라졌다. 아직 타이밍이 아니야, 오콘.
FP1은 레이스가 아닌 연습 주행이지만, 오늘 FP1 첫 출전이라는 동일한 타이틀을 가진 상대로부터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주행이 끝나면 서준하와 비교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F3는 물론 DTM까지 겪은 자신이 그보다 잘 탄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해 보였다.
“초반에 들떴던 리어도 안정적이다. 작동 온도(타이어가 그립력을 갖는 온도)가 충분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달려보겠다.”
-그래... 알겠다.
오콘은 무전을 날리고 좀 더 타이트하게 코너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립감은 높았고, 레이서의 자신감은 충만했다. 코스마다 속도를 살려낸 오콘이 오늘 주행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직선 주로에 오르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르노 팀 피트 역시 오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출발 전 많이 긴장했던 걸로 보였지만, 실전에서 오콘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전과는 달라진 목소리에서 르노는 오콘을 믿고 맡기기로 했다.
“최대한 조향을 늦게 시작하며 4턴에 진입한 오콘. 매끄럽게 코너를 빠져나오며 이제 5턴에 다가섭니다!”
“이전보다 진입 시점이 빠르군요! 스피드를 살려냅니다!”
카탈루냐의 내리막 헤어핀 5턴. 얼리 에이팩스로 라인을 잡은 오콘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레이싱카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억!!!”
한계 속도가 100km으로 정확한 브레이킹 타이밍과 부드러운 릴리즈가 중요한 5턴. 진입은 좋았지만, 빠르게 재가속 타이밍을 가져가려던 오콘의 차가 스핀하고 말았다.
휘리릭.
반시계방향으로 순식간에 한 바퀴 돌아버린 경주차가 런오프에 정지함과 동시에 주변으로 황색기가 날렸다.
“아나... 씨...”
당황한 오콘은 빠르게 트랙에 복귀하기 위해 스티어링을 조작해가며 경주차를 움직였다. 5턴 탈출로로 자신이 제쳤던 하얀색 포뮬러카가 그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주변으로 경주차 한 대가 접근 중이다. 천천히 올라올 것
민망함과 당황으로 가득한 오콘에겐 팀의 무전이 들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재빠르게 다시 트랙으로 복귀하는 것뿐. 필사적으로 트랙에 다시 오른 오콘의 바깥쪽으로 서준하가 다가서고 있었다.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엥.
첫 출전 루키가 한군데 모인 만큼 팀과 갤러리의 관심은 지금 이곳에 향했을 게 분명했다. 오콘은 허겁지겁 속도를 높였다. 앞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자신도 그렇게 달려야 했다. 그런데,
퍼억.
-갑자기 왜 그러지? 출력이 떨어진다
“뭐?”
갑자기 머리가 지끈 아파왔고, 혼란이 밀려왔다. 원인 모를 이유로 오콘의 차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워 타이어가 전하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퍼, 펑쳐다...”
-...
스핀 이후 런오프를 빠져나오는 도중 데브리를 밟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모든 게 자신의 실수가 만들어낸 일이라는 사실이 절망감을 불러왔다. 결국 오콘의 시야에서 앞차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말았다.
***
“피트까지 복귀하는 건 힘들 것 같군요.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에반 오콘 선수.”
아직 시간적으로 1시간 이상 주행할 여유가 있다. 펑쳐에도 타이어만 교체한다면, 다시 페이스를 올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 오콘의 경주차 상태는 5턴에서 피트 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오콘의 첫 FP1이 끝난 걸로 보이자 중계진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20분이 지난 지금 페라리 듀오가 피트를 나서고요. 메르세데스 팀은 아직 출발도 안 했군요.”
“초반 출전 선수들이 벌써 10랩 가까이 돌았습니다. 현재 가장 많은 랩을 소화한 선수가 하스의 서준하군요. 이제 11랩 스타트 하네요.”
가장 먼저 서킷에 나온 서준하가 좋은 기록으로 FP1을 리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피트를 나서는 메르세데스를 끝으로 중계 카메라가 서준하의 질주와 함께 그의 기록을 화면에 띄웠다.
“서준하의 타임 로그인데요. 지금 보시면 11랩 기록이 25초 231이고요. 초반 세네 바퀴에서 워밍업을 마치고 그 후로 조금씩 페이스를 올리고 있군요.”
“이런 식으로 계속 올려준다면, 마지막 플라잉 랩에선 이 선수 기록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합니다. 안정적이네요.”
워밍업 이후 조금씩 빨라지는 서준하. 프리 프렉티스에서 팀은 빠른 페이스보단 안정감을 선호한다. 특히나 출전 선수가 영드라이버라면, 장시간 주행에도 페이스 조절을 하는 능력을 원한다.
‘...’
한 바퀴를 돌아 다시 5턴을 지나가는 서준하의 옆으로 서킷을 빠져나가는 에반 오콘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리타이어는 분명 레이서의 실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금세 다시 자신의 주행에 집중했다. 차분하게 계획대로 달릴수록 서준하의 자신감은 더 커졌다.
훼에에에엥.
종종 자신을 추월해가는 차량이 있었고, 군데군데 챔피언을 비롯한 뛰어난 참가자들도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연습 주행은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란 걸 잘 안다.
부와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출발 전 자신과 팀이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주행했다. 매 바퀴 원했던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갈 때마다 성취감과 자신감은 더욱 커졌고, 덕분에 드라이빙은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서준하의 경주차는 온전히 그의 판단과 의지대로 흐르는 중이었다.
“스테이너 감독님. 서준하가 21랩을 마쳤습니다. 생각보다 기록이 좋은데요?”
서준하의 이런 자신감은 결과로 반영됐다. 그의 기록을 분석한 하스 팀 엔지니어들이 놀란 표정으로 타임 로그를 바라봤다.
“그거 다행이구만. 데이브한테 오더 변경 없이 지금처럼 가라고 전하게.”
꾸준히 랩타임이 오르면서도 목표 랩타임 도달 시기가 계획보다 빨라진 서준하. 불안했던 스테이너 감독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전 팀에서부터 많은 영드라이버를 데뷔시켜봤던 그로선 지금 상황이 좀 색다르게 느껴졌다.
“22랩, 23랩. 미세하지만, 랩타임이 계속 오릅니다.”
“좋아, 이렇게만 가자고...!”
집중력이 떨어질 만한 시기에도 영드라이버는 잘해내고 있었다. 불안을 품었던 마음이 점점 기대감으로 변해갈 때,
“...!!”
“...!!”
엔지니어의 말에 놀라는 스테이너 감독.
“24랩, 24초 441!!!”
“뭐?! 그건 우리 목표 랩타임이잖아?!”
아직 플라잉 랩을 시작하지도 않은 서준하. FP1 중반 벌써부터 오늘 목표 랩타임을 달성하고 말았다.
< 주변으로 경주차 한 대가 접근 중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