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는 문제 같습니다 >
“웬만해선 나도 레이스 끝나고 이렇게 선수들을 붙잡아 두는 걸 좋아하지 않네만... 내가 오늘 느낀 생각과 느낌을 곧바로 전해주고 싶어 불렀네.”
아리바베네 감독이 FP1을 마치고 팀 하우스로 복귀하던 서준하를 데리고 페라리 팀의 오피스로 들어왔다.
“오늘 정말 잘해줬어.”
솔직히 말해 예상했던 결과 그 이상이었다. 오후 FP2와 퀄리파잉을 준비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아리바베네 감독. 기대보단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는 영드라이버의 F1 첫 주행은 잠시 동안 모든 걸 잊게 만들 만큼 강렬했다.
“사실 오늘 좀 큰 충격을 받았네. 솔직히 이렇게 실전에서도 문제없이 잘해낼 줄 몰랐거든.”
오늘 FP1에 나온 선수 중 98년생이라는 가장 어린 나이와 F1에 오기 전까지 단 3개의 시리즈 경험. 평소 테스트 드라이버들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준하 역시 다른 선수와 마찬가지로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파이널 랩 어택은 정말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네.”
시작부터 FP1에서 4위에 랭크하는 건 엄청난 이변. 무엇보다 라이쾨넨보다 좋은 기록을 뽑아낼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FP1에서 별다른 테스팅에 들어가지 않았던 페라리는 라이쾨넨에게 최대한 랩타임을 끌어올릴 것을 주문했었고, 라이쾨넨 역시 전력을 다했던 상황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이렇게 계속해준다면... 아니,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계속 성과를 거두는 게 중요해.”
성과를 거두는 일, 70년 포뮬러 원의 세월 동안 레이싱 드라이버가 가진 숙명. 지금 아리바베네의 눈빛은 서준하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물론, 그의 오랜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듯한 바람이 담겨있는 듯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출전으로 F1 경주차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페라리는 어김없이 메르세데스에게 밀렸고, 시즌 5라운드가 넘어가는 상황에 페라리는 메르세데스에게 한참 뒤져있는 상황. 감독은 직감했을 거다. 이번 시즌 역시 지난 시즌, 지지난 시즌의 불안한 초반 흐름과 유사하다는 걸.
성적 부진으로 팀이나 스폰서로부터 압박을 받는 건 드라이버뿐만이 아니다. 팀의 총책임자인 감독 역시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 시즌을 보내야 한다. 지금 아리바베네가 어떤 심정인지 서준하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또 패배의 길로 흘러들어갈 이 흐름을 끊어내고 싶은 게 분명할 거다.
“이젠 레이스에 나가고 싶습니다. 하스가 아닌 페라리 경주차를 타고 GP에 나가고 싶습니다.”
다들 입단 후 곧바로 FP1에 나가는 건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지만, 서준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진심으로 F1 레이스를 열망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아리바베네에게 전해졌다.
“음... 알겠네. 근데 준하 자넨, 목표가 뭔가...?”
감독은 점점 서준하라는 사람에 대해 빠져들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이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한 눈빛. 이는 서준하가 무엇을 열망하는지 묻고 싶게 만들었다. 감독의 말에 서준하가 망설임 없이 답하는데,
“역대 최다 월드 챔피언. 이것이 제가 모터레이싱을 하는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100년 넘게 이어온 모터레이싱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레전드가 되는 일. 그 길에서 죽음까지 겪어봤을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서준하의 숙명이었다.
“...최다 월드 챔피언. 그거 듣기 좋구만.”
서준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감독. 잠시 후. 그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오전 훈련 끝나고, 다시 R&D 센터에서 보도록 하자, 수고했다.”
입단 초반, 적응의 과정을 거치고, FP1 준비를 위한 개인 훈련과 서킷 훈련이 주를 이뤘다면, 팀의 신뢰가 더욱 높아진 지금, 페라리는 서준하에게 더 많은 걸 요구했다. 두 차례 더 FP1을 끝낸 서준하. 그의 일과는 더욱 바빠졌다.
F1 경주차는 메인 드라이버의 특성을 고려해 제작되기에 드라이버도 신차 개발에 참여한다. FP1 이후 서준하에게도 연구 개발에 참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갑작스러운 출전 상황에 대비한 훈련, 그와 동시에 매일 오후 R&D 센터를 드나들었다.
“후...”
F1 드라이버들에게 여가 생활이란 건 낯선 단어다. 축구 선수라면 세계 최고의 수많은 리그와 팀이 있지만, F1 드라이버는 오직 하나의 무대에서 22개밖에 없는 자릴 지켜내고 차지해야 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경쟁이 이뤄지는 곳이기에 최정상 선수조차 여가라는 게 잘 없다. 물론, 일과에서 벗어나 선수 개인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마저도 피로회복이나 신체를 이완하는 활동들이 주를 이룬다. 가령,
“으어어어.”
잠들기 전 서준하는 매일 저녁 미온욕을 했다. 커다란 대나무 욕조통에 담긴 38도의 따뜻한 물속에 웅크리고 앉아, 지친 몸과 마음을 가라앉혔다. 훈련과 개발로 채워진 일상에 그나마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뿐이었다.
또르르르.
탕에 앉으니 근육통이 해소되고, 신체가 이완되는 느낌을 받았다. 몸을 움직이기 싫었지만, 더 오래 앉아있다간 혈압이 더 올라 역효과를 낼 수 있기에 금세 물기를 닦은 후 곧바로 침대 위에 앉았다.
‘...’
현재 시간은 22시. 목욕을 마치고, 곧바로 잠이 들 법도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24시간 모터레이싱을 생각하는 그가 침대 위에서도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서준하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내쉬자 몸은 더욱 가라앉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 느끼자.’
지난번 한국에서 소중한 경험 이후 서준하는 명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대로 알아차리기 시작하자, 어둠 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들이 오고 가는 게 느껴졌다. 가려움, 통증, 불쾌함, 안정감 등등의 감정과 자극 또는, 데뷔, 챔피언, 개발, 관계, 감독 등의 생각들이 보였다.
‘...’
명상이 거듭될수록 이 기분 좋은 상태가 지속됐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보다는 그저 이 상태에 들어왔다고 알아차리는 데 집중했다.
예전 같으면, 이 상태를 더 원하며 계속 이곳에 머물기 위해 집착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 그저 바라봤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앙.
점점 시간이 흘러 잡생각과 복잡한 것들이 가라앉는 순간이 찾아왔다. 마음은 하나에 집중된 상태로 변했고,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경주차에 올라탄 자신을 발견했다. 터널 같은 공간을 계속해서 지나쳤고, 결국 이 세계의 것이 아닌듯한 영역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천천히.’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며 주행했다. 다시 한번 몸의 감각들을 느껴가며 천천히 눈을 떴다. 깨어나는 그 순간까지 그곳에서의 감각이 선명했다. 피곤이 절정에 달할 시간임에도 정신은 맑았고, 집중력은 높아진 느낌이었다.
‘그저 봤을 뿐인데...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어...’
오늘도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는, 그 어떤 두려움도 떨쳐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내 안에 가진 또 다른 세계와의 조우. 시간이 지날수록 서준하는 더 큰 가능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구만...”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2016년 10월 23일 미국 GP가 끝난 늦은 저녁. 이번 시즌 총 21개 GP 중 18라운드를 마친 페라리 팀의 수석 코치진들이 아리바베네 감독의 집무실로 모여들었다. 오피스 내 모든 이의 얼굴이 밝지 못한데,
“오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제 53포인트 멀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세 경기뿐인데, 이거 진짜 미치겠네요...”
2010년대 메르세데스에게 1위 자릴 내줬지만, 그래도 매번 준우승을 차지했던 페라리팀. 하지만 오늘 한 선수의 리타이어로 2위 경쟁을 하던 레드불 팀에게 뒤지는 굴욕적인 순간을 맛보고 말았다.
“흠...”
시즌 초반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메르세데스와는 이제 300포인트 가까운 차이. 메르세데스는 지난 18번의 레이스 가운데 무려 16번이나 우승을 차지하며 일찍이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이번 시즌 부활을 꿈꿨던 아리바베네 감독. 아직 팀 레이서 어느 누구도 1위 한 번 하지 못한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오늘처럼 한 번 더 레이스 아웃(리타이어) 했다간, 정말 레드불한테 2위 자릴 줄지도 모르겠군요. 확실히 라이쾨넨의 주행감이 16라운드부터 확 떨어졌습니다...”
“슈마허도 그런 말을 했었죠. 자신은 한계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고요. 라이쾨넨의 문제가 아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는 문제 같습니다.”
올해 37살이라는 나이로 15년 가까이 F1 무대를 달리고 있는 라이쾨넨. 시즌 초중반 3위를 유지하며 메르세데스 듀오를 추격했지만, 시즌 종반에 달할수록 순위가 내려갔다. 결국, 오늘 리타이어와 함께 6위까지 추락하고 말았는데,
“그래, 라이쾨넨도 이젠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서 앞으로 남은 세 경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중요하네.”
레드불에게 2위 자릴 내준다면, 이번 시즌을 굴욕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물론, 다음 시즌 레드불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불어넣는 꼴이 된다. 부진한 레이서를 두고, 아리바베네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곧바로 레이서를 교체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지난 시즌 라이쾨넨이 마지막 세 라운드에서 보여준 저력도 있었고요...”
감독의 한숨이 끝나고 조심스럽게 얘길 꺼내는 라이쾨넨의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 루카 발디세르. 코치진들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 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아직 멘탈이 무너진 것 같진 않습니다. 평소 모습도 이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고요. 드라이버 교체가 되더라도, 이번 시즌까진 마무리하고 매듭을 짓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 번 더 맡겨보시죠, 감독님.”
2007년 페라리를 챔피언 자리에 올려두며 슈마허 이후 페라리의 상승세를 이어갔던 라이쾨넨. 평소 그와 막역한 사이인 발디세르가 지난 몇 년 동안 활약을 늘어놓으며 시즌 마무리를 호소했다.
“...”
“...”
“흠...”
그의 말에 잠시동안 흐르는 정적.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 모두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오케이, 라이쾨넨을 한 번 더 믿어보지. 팀의 선택에 항상 보답해줬던 선수였으니까. 단...”
페라리 같은 큰 팀이 시즌 도중 드라이버 교체를 하는 건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어딘가 비장한 표정의 아리바베네. 다음 말을 꺼내기 전 잠시 뜸을 들이는데,
“오늘 같은 일이 다시 한번 벌어진다면, 그땐 어쩔 수 없지.”
감독의 말에 동의하는 코치진들. 발디세르 역시 당연하다며 고갤 끄덕였다.
“만약 그 상황이 오게 된다면, 저 친구가 들어가게 되는 건가요?”
마침 집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한 선수. 안토니오치의 말에 감독과 코치진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고,
“그렇지, 아마 그렇게 될 거네.”
침울한 분위기 속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한 표정. 서준하를 발견한 아리바베네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떠올랐다.
<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는 문제 같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