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27화 (127/200)

<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

“참가 선수들은 스타트라인 부근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2016 포뮬러 원 챔피언십의 마지막 레이스. 시작 전 운영위의 요청에 따라 각 팀 드라이버들이 패독에서 나와 서킷으로 모여들었다.

“준하 선수, 햇빛이 강해, 이거 필요할 거 같은데?”

11월 말임에도 강렬히 내리쬐는 햇빛. 참가 선수 단체 사진 촬영에 들어가는 서준하를 위해 한서윤이 선글라스를 건넸다.

터벅터벅.

팀 하우스를 빠져나와 준비된 길목으로 이동하는 동안 먼저 앞을 걷고 있는 빨간색 유니폼의 드라이버, 저스틴 페텔이 보였다. 오늘 아침 그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어제 퀄리파잉에서 4위에 랭크했기 때문이다.

‘어젠 운이 좋았어.’

서준하의 F1 퀄리파잉 데뷔전 최종 성적은 3위. 하지만 운이 좋았다. 새로운 환경에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고, 경쟁자 페텔이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바람에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으니까.

포뮬러 원은 이런 일이 허다하다. 우승 후보끼리 배틀을 벌이다 동시에 리타이어해 챔피언 후보 물망에도 없던 참가자가 우승한다거나, 갑작스러운 차량 문제로 챔피언 후보의 순위가 떨어지곤 한다. 실수 하나에 종종 뜻밖의 결과가 나오는 곳이 에프원 무대였다.

“각자 표시된 곳으로 위치해주세요.”

촬영을 위해 준비된 단상 앞으로 다가서는 서준하. 페텔 옆으로, 해밀턴, 로즈버그, 페르스타펜, 리카르도, 알론소 등등 레이싱 괴물이라 불리는 사내들의 얼굴이 보였다. 몇몇은 서준하를 의식하는 듯 보였지만, 챔피언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2016 Formula One World Championship]

너무나도 만나고 싶었고, 겨루고 싶었던 드라이버들. 이 순간이 오길 매일 밤 꿈꿨다. 이 사내들이야말로 서준하가 그토록 원했던, 반드시 넘어서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상대들이었다.

“다들 한 번 웃어주세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이들과 펼치게 될 레이스에서 얻게 될 배움과 자신이 원하는 무대에 섰다는 기쁨은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찰칵.

찰칵.

수백만 레이서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 무대에 올라온 22명의 F1 드라이버들. 대열의 가장 아래, 좌측 페라리 팀 스폿에 서준하가 자리했다.

역사적인 순간 속 서준하는 주먹을 말아쥔 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가슴은 활짝 폈다. 그리고는 메인 카메라 렌즈를 향해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었다.

“자, 됐습니다. 이제 피트로 복귀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둘 선수들이 흩어지며 자릴 뜨기 시작했다. 서준하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제 곧 오르게 될 야스 마리나를 바라보며 걸었다.

[Sauber F1 Team]

[Manor Racing MRT]

[Scuderia Toro Rosso]

피트로 향하는 서준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파랑, 주황, 하양, 검정 유니폼을 입은 젊고 어린 하위권 팀 선수들의 경계심과 질투가 담긴 시선이 보였다.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당연한 반응, 그럴 수밖에 없다. F1은 차량과 팀의 모든 조건이 동일한 원메이커 대회가 아니니까. 많은 레이서들이 기를 쓰고 최상위권 팀으로 이적하려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참가 팀 간 차량의 성능 차이다.

서준하는 그들의 차가운 시선에 담긴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은 그 자리에 오기까지 엄청난 고통을 견뎌냈지만, 최상위권 팀으로 가기 위해선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나이 어린 선수 하나가 단번에 그 험난한 과정을 생략하며 그 자리에 올랐고, 뛰어난 경주차와 함께 엄청난 성적을 낼 가능성을 눈앞에 뒀으니 질투가 날 수밖에.

‘단순히 운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준다면, 저런 눈빛도 점점...’

아마 몇몇은 서준하가 이곳까지 온 걸 행운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레이스 결과가 그 생각을 뒤집어버릴 것이다. 최상위권 팀의 콕핏은 몇 자리 되질 않는다. 수년간 이들이 꿈꾸고 노력해온 시간들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 레이스에서 반드시 그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

“잠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포뮬러 원은 올림픽, FIFA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꼽힌다. 연간 직관 관중이 400만 명, TV 시청자 수는 6억 명에 달한다. F1 팀의 예산은 한 팀당 6천억이 넘는데, GP가 창출하는 경제효과는 수조에 달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벤트인 만큼 레이스 당일 서킷을 찾는 사람들도 아주 다양하다.

“회장님, 이쪽이 페라리 팀의 영드라이버 서준하 선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서준하입니다.”

레이스 시작 전, 드라이버들은 서킷을 찾은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갤러리들을 맞이하기 위해 퍼레이드 카에 올라 서킷을 순회한다.

순회 직전 포뮬러원 매니지먼트(FOM) 회장 바니 에클레스톤이 서준하를 불러세웠다. 인사와 함께 아랍 전통 의상 토브(Thawb)를 입은 남자와 악수를 나누는데,

“동양인 선수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하하. 저는 칼툰 칼리파라고 합니다. 오늘 좋은 레이스 기대하겠습니다.”

아랍에미리트의 기업인이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시티 FC의 칼툰 회장. 중동 대부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서준하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국제 취재진들의 카메라에 담겼다.

“아, 그리고 이쪽을 빼먹을 뻔했구만. 서준하 선수, 잠깐 와보게.”

이 대회의 상업권과 프로모션의 엄청난 권위를 갖고 있는 FOM의 수장 바니 에클레스톤. 어리고 신인인 드라이버보다는 챔피언의 곁에 머물며 유명인과 컨택을 하는 인물로 유명하지만, 어제 퀄리파잉 이후 서준하에게 관심을 보였다.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I of Spain) 스페인의 전 국왕님이시네. 인사드리지.”

그의 말에 따라 이곳저곳 얼굴을 비추는 서준하. 어린 신입 드라이버라면 단순히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인사들이었지만, 서준하는 반가운 얼굴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마다 바니는 그런 서준하를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이제 퍼레이드 카에 올라타게. 또 보자고, 코리안 드라이버.”

사실 오늘 서준하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건, 이 모든 사람들과 전생에 한 번씩은 마주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콕 집어서 말하는 바니의 눈빛을 알아챈 서준하가 멀어지는 그를 붙잡았다.

“회장님, 같이 사진 한 장 찍으시죠. 데뷔전에서 회장님하고 사진을 못 남기는 건 너무 아쉬워서요, 하하.”

1970년대부터 F1의 상업적 가치를 지금의 엄청난 규모로 키운 남자. F1에서 바니는 레이서나 컨스트럭터 팀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레전드다. 그를 빼놓고는 F1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F1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비록 그의 말로를 서준하는 알고 있지만, 그와 친분을 쌓아두는 건 분명 실보단 득이 더 많다. 어딘가 당돌한 서준하의 손짓에 바니 역시 방긋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2016 파이널 그랑프리, 아부다비 레이스에 출전할 선수들을 소개합니다!!!”

세련된 장식으로 가득한 대형 카고 트럭 위에 22명의 드라이버들이 올라탔다. 요트, 잔디밭, 스탠드, 건물 옥상 등등 레이스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6만 관중 앞에 선수들이 손을 흔들었다.

“No.50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서준하 선수입니다!”

한 명씩 소개를 받으며 퍼레이드 카 중앙에 등장하는 선수들. 처음으로 서준하의 이름이 GP 레이스 당일 갤러리들에게 소개됐다. 동시에 서쪽 그랜드스탠드(South Grandstand) 위로 대형 태극기가 휘날렸는데, 그 규모와 함성이 얼마나 컸던지, 대형 태극기의 모습이 장시간 전 세계에 방송됐다.

[한국의 영웅, 서준하. 포뮬러 원 데뷔전에서 역사를 쓰다]

퍼레이드 카가 서쪽 스탠드 부근에 가까워지자, 대형 태극기 밑으로 국내팬들의 메시지를 담은 거대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대통령 탄핵 문제로 현재 한국은 불안정한 시국. 몇몇 부정한 정치인들로부터 마음의 상처 받은 국민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 무대의 데뷔전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이들에게 작은 기쁨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서준하가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바라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

부와아아아앙.

끼익.

부와아아아아아앙.

레이스 시작 전 포메이션 랩을 시작하며, 타이어 온도를 높이는 선수들. 야스 마리나로 22대의 포뮬러카가 줄지어 순회를 시작했다.

“야스 마리나는 굉장히 평이한 서킷이거든요? 오늘 실수만 크게 안 한다면, 출발 순서와 큰 변동 없이 레이스를 마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죠. 기다란 직선 주로가 연이어 두 군데나 존재하지만, 그렇게 빠른 서킷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선수들 사이에서 추월이 상당히 어렵다는 평이 많아요.”

특정 선수들의 입에서 F1 서킷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서킷으로 뽑히기도 했던 야스 마리나. 섹터 1의 중고속 코너를 제외하곤 추월 시도가 거의 나오지 않는 서킷이다.

“이렇게 되면, 각 팀 선수들의 타이어 관리 능력과 팀의 피트 스탑 전략이 굉장히 중요해지겠습니다.”

“그렇죠. 참가 팀 모두 피트 스탑을 최소한으로 가져갈 거고요. 아마도 중하위권에서 추월을 노리기 위해, 시작 후 초반 몇 바퀴에서 굉장한 접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Q3에서 사용한 타이어 그대로 장착하고 나온 순위권 선수들. 미디엄 타이어라는 종류와 사용된 타이어의 그립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새 옵션 타이어를 장착한 뒤차들의 공략 포인트는 단연 초반이었다. 매 레이스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선수들의 타이어 관리 능력이 굉장히 주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스타트 라인 부근, 윌 스미스 씨가 UAE의 출발 깃발을 흔들면서, 신호에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그리드 전방으로 빨간 신호가 들어왔다. 숨 막히고 미칠 듯이 조용한 지금 이 순간이 서준하에게 다시 찾아왔다. 마카오 레이스까지만 해도 들렸던 경주차 엔진음이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빨간 불빛에 집중됐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좌우측 클러치 패들을 조작하며, 순식간에 1단 기어를 넣은 서준하. 그와 동시에 가속 페달을 밟으며, 브레이크와 클러치 패들을 뗐다.

“2016 포뮬러 원 파이널 레이스! 시작합니다!!!”

이제껏 데뷔전에서 포디엄에 오른 F1 드라이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 생 모든 레이싱 카테고리에서 늘 역사를 만들어왔던 서준하. F1 출발부터 새역사를 쓰겠다고 다짐하며 이번 생 첫 F1 레이스를 시작했다.

<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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