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작스럽게 데뷔전을 치르게 된 작년과는 다릅니다 >
“헤이, 슈퍼 루키!”
특유의 영국식 발음으로 서준하를 부르는 노랑머리의 남자.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롭 스메들리가 서준하에게 달려들었다.
“넌 진짜 엄청난 놈이야. 페라리의 메인 드라이버? 크하하하!”
꼭 1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 하이파이브를 나눈 롭과 서준하가 마라넬로가 떠나가라 웃어댔다. 촬영 PD에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한서윤. 덕분에 서준하의 일상을 담은 영상에 더 많은 스토리가 담기게 됐다.
“내가 기다려보라고 했지?”
페라리로 이적할 당시 롭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테스트 드라이버라는 직책 때문에 서준하는 나중을 기약했다.
테스트 드라이버의 레이스 엔지니어로서 레이스에 나가지 않고 쉬는 것보다, 한 시즌이라도 롭이 다른 무대에서 커리어를 쌓는 편이 롭의 커리어에 도움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게 이번에 나오는 SF70H(17시즌 페라리 팀의 경주차)구나. 엄청 날렵하게 생겼어...!”
“맞아, 이번 시즌 우리가 탈 레이싱 카야.”
“오호호! 우리?!”
아직 F1 레이스의 경험이 없는 롭을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로 데려온 건 서준하였다. 이번 생 F1 무대 역시 롭과 호흡을 맞추고 싶은 이유는 변함없이 같다.
그는 유니크한 레이스 엔지니어다. F1과 유사한 레이스 환경인 GP2 출신 레이서였고, 전생과 더불어 이번 생 F3에 오기까지 자신과 찰떡 호흡을 보여줬으니까. 함께 레이스를 만들어갈 뉴 시즌 경주차 앞으로 두 사람이 다가섰다.
“고맙다, 준하야.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줘서.”
꿈에 그리던 F1 경주차를 두고, 롭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비록 드라이버라는 타이틀로 F1 팀에 들어온 건 아니지만, 어릴 적 그토록 열망하던 팀의 유니폼을 입게 된 상황.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그의 표정이 감격에 찼다.
“아니, 이건 네가 만들어낸 결과지. 나도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롭.”
서준하 역시 꿈꿔왔던 롭과의 생활. 월드 챔피언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Scuderia Ferrari: Race Engineer]
[Rob Smedley]
페라리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롭을 보자, 머릿속으로 전생에 그와 함께 만들어갔던 F1 레이스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고, 동시에 이번 생엔 어떤 레이스를 펼치게 될지 상상에 잠겼다.
“감독님, 저 친구 괜찮을까요?”
멀리서 서준하와 롭을 바라보는 두 사람. 페라리 팀의 치프 레이스 엔지니어 클레어가 곁에선 아리바베네를 향해 물었다.
“레이서로선 커리어가 좀 있는데, 엔지니어로서는 커리어가 너무 짧은 게 걱정이네요. 음... 준하의 제안을 단번에 승낙하신 이유가 뭔가요, 감독님?”
F1 페라리 팀의 스태프가 된다는 건 실로 쉽지 않은 일. 엔지니어링 파트에 대한 학위는 물론, 장기간 모터레이싱계에서 쌓아온 커리어가 필요하다. 다른 스태프들의 입단과 전혀 다른 배경에 클레어가 고갤 내젓는데,
“드라이버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않겠나.”
기존 엔지니어의 계약 만료, 레드불에서 원했던 인재, 지난 대회 교신 내용에 대한 검증 등등 이 모든 걸 떠나 무엇보다 아리바베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제안을 꺼낼 당시 강렬했던 서준하의 눈빛이었다.
“그냥 오더를 내리면 묵묵히 따르던 친구가 처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눈빛을 보이더라고, 마치 자신의 앞날이 걸린 듯한 표정이더구만.”
“앞날이 걸린 듯한 표정이라...”
“그리고 저 친구 역시 준하와 비슷한 면이 있지. 커리어 2년 만에 르노부터 F3 마카오까지 F1 로열 로드를 우승해본 엔지니어가 몇이나 되겠어. 그것도 전승 우승으로 말이야.”
엔지니어들의 세계에선 롭의 커리어 역시 이변의 연속이었다. 기존의 당연히 거쳐야 했던 커리어들을 뒤엎으며 이변을 함께 만들었다. 아리바베네의 눈엔 경험의 크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저 둘이 여기 F1에서 그 이변을 이어 갔으면 좋겠구만.”
새 시즌 더 강렬해진 붉은색 페라리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롭 스메들리. 서준하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는 카메라를 향해 유쾌한 포즈를 취했다.
***
“휴가 기간 동안 뭘 했어? 어떻게 소식이 한 개도 안 들리냐.”
“그냥 뭐 별거 없어. 한나랑 집에서 쉬었지. 주말에는 축구도 보러 나가고 말이야.”
달콤했던 겨울 휴가를 보내고, 다시 마라넬로로 복귀한 저스틴 페텔. 오랜만에 휴가를 맞은 F1 드라이버들의 사생활이 SNS를 달궜지만, 역시나 페텔의 소식은 없었다. 그는 F1 슈퍼스타치고 평소 언론 노출을 굉장히 꺼리는 비밀스러운 남자였다.
“메르세데스 드라이버 소식 들었지?”
“응, 봤어. 보타스가 왔더라.”
“하하, 맞아. 우리한테 이번 시즌 기회가 온 거지.”
그간 마라넬로에 머물었던 소식들을 페텔에게 전해주는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 아다미. 로즈버그라는 한 명의 강한 챔피언 경쟁자가 사라지고, 지난 시즌 8위를 기록한 보타스의 이적 소식을 다시 꺼내놓고는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해밀턴과 로즈버그 듀오의 디펜스 플레이에 막혀 고전했던 페텔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기회지. 이번 시즌엔 반드시 로이스를...”
2010년부터 이어져 온 로이스 해밀턴과 페텔의 라이벌 구도. 2010~2013년 페텔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반대로 2014년 이후부터 3년 연속 그에게 패배했다.
지난 7년간 두 사람이 획득한 포인트 합계에서 현재 해밀턴이 8점 차 리드하는 상황. 16시즌 최종 4위에 랭크하며 굴욕을 맞본 페텔은 이번 시즌 기필코 연패를 끊어내야 했다.
“쟤는 일찍 왔나 보네.”
“누구? 아, 준하. 아마 윈터 시즌을 마라넬로에서 보냈을걸?”
“응? 오프 시즌 때 집에 안 갔어?”
“그럴 거야. R&D센터에서 아주 살더라.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투입됐으니까, 할 일이 많겠지. 스티어링 휠도 전용으로 하나 만들어야 하고, 곧바로 시즌 치르려면 윈터 시즌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테스트 드라이버라도 이벤트나 훈련 때문에 쉽진 않았을 텐데. 열정이 대단하네.”
16시즌 서준하는 테스트 드라이버의 위치에서 다양한 팀 이벤트에 참가했고, 돌발 상황에 대비해 주전 레이서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 서준하의 소식을 들은 페텔이 놀랍다는 표정과 함께 그를 바라봤다.
“이번 시즌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나. 지난번 아부다비 레이스에선 나도 정말 깜짝 놀랐는데 말이야.”
16시즌 마지막 레이스에서 서준하의 바로 뒤에서 피니시했었다. 아부다비라는 말을 듣고는 페텔이 잠시 조용해졌는데,
“...”
실제 그때의 퀄리파잉과 레이스에서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페텔. 그날의 패배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달랐다. 아직 시즌을 한 번도 소화하지 못한 신입 루키와 자신을 비교했고, 퍼스트 레이서의 입지가 흐려질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페텔로선 상당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덕분에 지난 레이스와 연관된 무언가가 대화에 나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감정이 들어 말을 아끼게 됐다.
“진짜 실력인지, 우연이었는지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데뷔전 하나만 놓고, 저 친구가 큰 착각을 안 했으면 좋겠네.”
포뮬러 원 챔피언십은 일 년 내내 달리는 장기 마라톤과도 같다. 다년간의 커리어로 수많은 루키들을 지켜봐 왔던 아다미. 단 한 번의 레이스로 루키의 가능성을 확대해석하는 언론의 태도에 혹시 모를 서준하의 태도가 우려스러웠다.
***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70주년 기념, 2017 페라리 팀의 새로운 레이싱 카를 소개합니다!”
공식 프리 시즌(Pre-Season) 테스트 주행(동계)을 며칠 앞두고, 2017 페라리의 신차 발표식이 진행됐다.
“지금까지 공개된 레이싱 카 중 가장 독특한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죠.”
다양한 형태의 에어로파츠가 추가된 것과 더불어 08시즌을 연상케 하는 복잡한 사이드포드는 다른 팀과 상당히 차별화된 점이다. 레이싱 카의 뒤편의 공기 흐름에 크게 신경 쓴 듯한 디자인은 이번 시즌 페라리가 얼마나 신차 개발에 공을 들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Essere Ferrari (Being Ferrari)]
무대 전면 커다란 스크린으로 신차 개발 과정을 담은 필름과 17시즌 페라리의 각오를 담은 영상이 재생됐다. 끝으로 당당한 포즈를 취한 메인 드라이버 두 명의 모습이 등장하고,
“이번 시즌 페라리의 드라이버들을 소개합니다! 저스틴 페텔과 서준하를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바닥에서 떠오르는 두 선수. 새 시즌 화려한 오버롤을 착용한 두 사람이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레이싱 카 옆에 섰다.
‘이젠 내 차례야.’
불과 한 시즌만에 객석에서 메인 스테이지의 주인공 자리로 승격한 서준하. 이탈리아 대형 방송사는 물론 전 세계 취재진들의 플래시 세례를 한몸에 받았다. 2017 시즌 비장한 팀의 분위기 만큼 서준하의 표정에서도 엄청난 전의가 드러났다.
“감독님, 채널 4의 바리치 기자입니다.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페라리 팀은 이번 시즌에도 퍼스트 드라이버 중심으로 돌아가나요?”
팀 메이트 간 과도한 경쟁 탓에 여러 차례 쓴맛을 봤던 팀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전략. 과거로 비추어 볼 때 페라리는 철저한 퍼스트 중심의 팀이었다. 발표식이 끝나자, 취재진들로부터 다양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몇 년간 우리 페라리는 페텔을 중심으로 팀을 꾸려왔습니다. 이번 시즌 페텔이 페라리 카를 타고 다섯 번째 월드 챔피언 자리에 오를 것을 기대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변함없는 답변을 보이는 아리바베네 감독. 4년 연속 월드 챔피언을 달성한 슈퍼스타에 대한 팀의 기대는 여전했다.
‘이 구도는 오래가지 않도록...’
F1 루키들이 처음부터 엄청난 성적을 내지 못했던 건 팀의 전략이 퍼스트 레이서들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컨드 레이서가 시즌 내내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팀의 전략은 순식간에 달라질지도 모를 일. 감독의 말을 들은 서준하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좋습니다. 서준하 선수에게도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데뷔전 놀라운 성적을 거두면서, 벌써부터 페텔과 비등한 실력을 가진 선수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창 무난하게 흐르던 기자회견장이 한 남자의 질문으로 차가워졌다. 여러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두고 서준하가 차분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페텔은 훌륭한 드라이버이자, 언제나 친절한 선배 드라이버입니다. 그런 그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는 여전히 배울 점 많은 팀 메이트였고, 존경하는 드라이버였으니까.
“곧 있으면 공식 테스팅 주행이 시작됩니다. 서준하 선수,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계속되는 기자들의 질문. 데뷔전 활약을 보였던 루키에 대한 관심은 시즌 시작을 앞두고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늘 이변을 만드는 선수였고, 이번에도 그런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었으니까.
“갑작스럽게 데뷔전을 치르게 된 작년과는 다릅니다. 저는 이미 이번 시즌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쩌면 겸손치 못하게 들릴 수 있는 말들. 하지만 취재진은 물론, 팀 스태프 누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2월 테스트 주행, 베스트 랩타임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공식 테스트 주행은 사실상 시즌의 첫 출발. 서준하가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며 당당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바라봤다.
< 갑작스럽게 데뷔전을 치르게 된 작년과는 다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