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란드인의 레이싱 DNA가 어디 가겠나 >
“스카이스포츠의 사이먼 래젠비라고 합니다. 잠시만 인터뷰 가능할까요, 해밀턴?”
본격적인 레이스 시작 전 맬버른 서킷의 패독. 영국 스카이 스포츠의 포뮬러 원 채널의 신입 인터뷰어, 래젠비가 메르세데스의 팀 하우스 앞을 서성였다.
“죄송합니다, 래젠비. 지금은 레이스 준비에 집중하고 싶네요. 먼저 가볼게요.”
레이스 시작 두 시간 전, 선수들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고, 이미 조금 전 공식 인터뷰 시간을 가졌었다. 적극적인 신입의 자세로 색다른 인터뷰를 따내려던 래젠비를 두고 해밀턴이 게러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래젠비,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이제 레이스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흠, 좀 아쉽네. 아까 공식 인터뷰에서 나왔던 뻔한 말들 말고, 지금처럼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나오는 솔직한 말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말이야. 맘처럼 쉽지 않군.”
동료 카메라맨에게 아쉬움을 드러내며 발걸음을 돌리는 래젠비. 팬과 시청자에게 보다 생생한 F1의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공식 인터뷰에선 다들 하나같이 자신감을 드러내지만, 지금 래젠비의 눈엔 많은 선수들의 불안감이 보였다. 큰 무대를 앞둔 인간에겐 실로 자연스러운 감정들. 좀처럼 언론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기에 이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래젠비의 아쉬움은 더 컸다.
“안녕하세요, 래젠비. 우리 저번에 한 번 봤었죠?”
누군가가 카메라맨과 함께 패독 출구로 나서는 래젠비를 불러세웠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고갤 돌리고,
“오우, 준하! 우리 페라리의 슈퍼 루키!”
뜻밖이었다. F1 드라이버가 먼저 기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상황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짧은 공식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 래젠비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기자 생활 처음으로 화제의 선수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잠깐 인터뷰 좀 할까요?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준하? 준비는 잘하고 있나요? 오늘이 이번 시즌 첫 레이스잖아요. 아무래도...”
동료 카메라맨에게 눈치를 주고는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시도하는 래젠비. 반갑게 웃는 서준하를 향해 동시에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저도 좀 떨리네요. 사실 지난번 데뷔전 레이스는 제가 만든 결과가 팀의 성적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면, 이번에는 다르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래서 더 잘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래젠비의 인터뷰를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서준하. 인터뷰가 길어질수록 래젠비가 원하던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상황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하하, 이거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페라리의 드라이버가 나 같은 신입 기자의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말이야. 영상 잘 담았지?”
“네네, 이거 정말 의외네요. 어디 말할 곳이 필요했나? 아무튼 영상은 잘 찍혔어요.”
“어디 보자. 음, 그래. 표정이랑 말투가 솔직한 게 좋아. 사람들은 이런 모습도 보고 싶어 한다고. 상식적으로 봐도 어린 선수가 이런 무대를 뛰는데 만날 자신감 넘치는 건 비현실적이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래젠비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서준하. 패독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영상을 확인하는 방송팀의 모습을 살펴봤다.
‘사이먼 래젠비. 앞으로 3년 뒤 리드 프레젠터가 될 남자.’
2017년 F1 신입 기자 사이먼 래젠비. 향후 3년 뒤 인터뷰이의 솔직함을 담아내는 일로 급유명세를 타며, 포뮬러 원 언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된다. 덕분에 그의 인터뷰이들은 더욱 유명해지고, 대중의 더 큰 관심을 받게 된다.
‘미리 친분을 쌓아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시즌 첫 레이스 시작을 앞둔 레이서는 예민하지만, 더 큰 이익을 위해서라면 잠깐의 시간을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멀어져가는 래젠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준하. 훗날 할리우드의 획기적인 이벤트에서 함께할 날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
“2017 호주 그랑프리! 본선 레이스 시작합니다!”
호주 공군 헬리콥터와 제트기의 화려한 에어쇼를 마치고 시작된 본선 레이스. 신호가 꺼짐과 동시에 경주차의 굉음이 앨버트 파크에 울려 퍼졌다.
“해밀턴, 보타스. 둘 다 스타트 미스 없습니다! 1턴까지 무사히 진입! 이제 2턴을 빠져나옵니다!”
엄청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메르세데스 팀의 피트월. 경주차의 출발과 동시에 엔지니어들이 텔레메트리를 통해 전송된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보타스, 섹터 1 통과! 목표 타임보다 0.112초 늦습니다!”
초조한 표정으로 메인 레이서들의 주행을 지켜보는 테오 감독. 해밀턴과 보타스의 움직임을 살피던 그의 눈이 5위를 달리는 세컨드 레이서에게로 고정됐다.
이번 시즌 역시 해밀턴은 단연 F1 원톱 드라이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뉴 드라이버의 첫 레이스를 두고 지난 몇 년간 막강한 실력을 보여준 메르세데스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 올라가지 못하면 후반으로 갈수록 우리가 불리해. 첫 랩의 섹터 2, 3 랩타임을 반드시 끌어올리라고 전하도록.”
사실 보타스의 퀄리파잉 5위 랭크는 상당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지난 몇 년간 팀이 매번 1,2위로 스타팅 그리드를 점했기에 예선 5위는 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시즌 참가팀 가운데 또 한 번 최고의 경주차를 만들어냈다는 호평을 받았기에 보타스의 첫 출발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테오, 그냥 보타스를 믿어보자고, 분명 레이스에서만큼은 핀란드인의 DNA가 빛을 발휘할 테니까.”
테오의 옆으로 다가선 라우다. 핀란드인은 레이싱 카테고리의 미스테리다. 플라잉 핀(Flying Finn, 하늘을 나는 핀란드인)이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모터스포츠에서 그들의 활약은 엄청났다.
하키넨, 로즈버그, 라이쾨넨 등 많은 F1 챔피언들이 레이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핀란드 출신. 걱정스러운 표정의 테오의 곁으로 빨간 모자의 라우다가 다가섰다.
“선천적인 능력은 정말 특출한 친구가 맞는 것 같긴 한데, 흠...”
레이스가 열리는 어느 곳에서 핀란드인이 존재하며, 심지어 그들 대부분은 아주 빠르고 강력한 실력자들. 레이스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한 명 이상의 핀란드인을 추월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테오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자, 라우다가 나섰다.
“컨트롤 타워에서 너무 푸시를 가하지 않는 게 좋겠어. 물론 초반을 공략하는 게 좋긴 하지만, 보타스 스스로 충분한 적응이 필요해 보이네.”
Q3 퀄리파잉에서 경쟁자들보다 타이어를 좀 더 사용하며 무리했던 보타스. 소프트 타이어를 장착한 그의 상황에선 초반 빠르게 순위권으로 치고 올라간 뒤 피트 스탑하는 전략이 최고였지만, 라우다가 보기엔 보타스는 좀 더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레이스는 충분히 길었고, 종료 직전까지 실수만 없다면, 추월 포인트가 다양한 이곳에서 분명 순위권 도약은 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죠. 사실 실수만 없다면 충분히 포디엄 피니시를 만들어낼 선수인 건 확실하니까요.”
어쩌면 이제막 시작한 레이스를 두고 자신이 조급했던 걸지도 모른다. 보타스는 차량 문제가 빈번했던 윌리엄스 경주차를 네 시즌이나 소화하며 종합 랭킹 4위에 오른 실력자. 오랜 경험이 묻어나는 라우다의 말에 테오가 고갤 끄덕였다.
“6랩, 보타스의 섹터1 랩타임이 목표 타임을 넘어섰습니다!”
“벌써?”
“괜한 걱정을 했구만, 그래.”
점점 계획했던 랩타임을 만들어가는 발트 보타스. 그의 경주차 앞으로 치열하게 배틀하는 페라리와 레드불의 경주차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또다시 배틀! 선두 자릴 두고 해밀턴과 페텔이 경합에 들어갑니다!”
“3위 자리도 치열하죠? 서준하가 리카르도의 뒤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2턴 시케인 빠져나오면서 DRS 액티베이션! 앞차와 상당히 가까이 붙은 서준하인데요...!”
초반 페라리 듀오의 압박은 거셌다. 빠른 순위권 탈환과 동시에 피트 스탑을 가져가려는 것이 팀의 전략. 레이스 일곱 번째 바퀴를 시작하며 서준하가 본격적인 추월 시도에 들어갔다.
“서준하! 순식간에 리카르도의 오른쪽으로 나왔습니다...!”
“3턴 진입을 두고 나란히 선 두 선수...!”
우측으로 꺾이는 3턴 저속 시케인. 리카르도가 바깥쪽, 서준하가 안쪽을 차지했다. 두 선수 모두 브레이킹 포인트를 최대한 늦추며 그대로 시케인에 진입하는데,
“아! 리카르도 밀려나지 않습니다! 엄청난 횡G를 견뎌내며 바깥쪽에서 버텨내는 레드불 레이싱!”
아슬아슬 타이어가 부딪칠 듯 말 듯 동시에 감속하는 두 선수. 곧바로 다시 이어진 4턴에서 리카르도가 리드할 기회를 잡았다.
“서준하의 과감한 돌파를 가까스로 막아낸 리카르도! 3턴에서 최대한 버텨내며 이어지는 코스에서 유리한 위치로 보상받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준하와 격차가 완전히 줄어들었거든요. 다음번 DRS 존에선 리카르도도 쉽지 않을 겁니다...!”
맬버른 서킷에 섹터1에 위치한 연속 DRS 존. 리카르도가 다시 섹터 2, 3을 돌 때까지 격차를 벌리지 못한다면, 다음번 뒤차의 추월 성공 확률은 굉장히 높아 보였다.
“자! 그리고 보타스가 치고 올라옵니다! 리카르도와 서준하가 엉겨 붙은 사이 제3자에게 기회가 찾아왔어요...!”
배틀은 레코드 라인을 벗어나게 만든다. 덕분에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모두 그냥 달리던 때보다 스피드는 느려지기 마련. 3, 4위 경주차를 뒤따라오던 보타스가 앞차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섹터 2에 진입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서준하의 뒤로 전과는 다른 경주차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번 랩 리카르도를 강하게 압박하며 다음 랩 기회를 노리는 서준하에겐 달갑지 않은 기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레이스란 일대일 싸움이 아니고, 이런 상황은 원래 끊임없이 일어나니까.
-준하야, 차라리 13턴 인코스를 노려보자
원래는 16턴 DRS 존에 들어가 무난히 리카르도를 추월할 계획이었지만, 가까워진 뒤차 덕분에 롭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좀 더 일찍이 과감한 추월 오더를 내렸다. 하지만,
“아니, 보타스를 막는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어.”
레이스 후반이 아니라면, 과감한 시도를 할 필요는 없다. 당장에 기회를 잡지 않더라도, 남은 레이스 동안 충분히 다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추월 시도가 막힌다면, 오히려 뒤차에게 더 큰 기회를 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타스가 어떤 녀석인지 잘 아니까.’
윙미러로 시즌 초반 경쟁자로 지목된 보타스의 은색 포뮬러카가 보였다. 마치 전생과 비슷한 상황. 수많은 레이스에서 그를 상대했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핀란드인의 레이싱 DNA가 어디 가겠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