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 이제 슬슬 공략하라고 할까요? >
[메르세데스 No.77 보타스]
[Speed Trap: 321.3 km/h]
맬버른 서킷의 첫 번째 DRS 존으로 들어온 발트 보타스. DRS를 켜자 순식간에 최고속을 돌파하며 서준하의 뒤에 바짝 붙었다.
“다 왔다!”
레이트 에이팩스로 재가속 구간을 앞당기며 직선 주로에서 오늘 가장 빠른 속도를 찍었다. 두 번째 DRS존에서 서준하와 거의 나란히 선 보타스가 3턴 시케인 진입을 향해 달려갔다.
“비켜, 꼬맹아!!!”
서준하와 나란히 달리기 위해 신중히 주행하며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레이스가 중반에 달할 때쯤 페달링은 더욱 섬세해졌고, 코스 돌파는 날카로워졌다.
더불어 보타스의 머릿속으론 자신을 들이받을 뻔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불쾌함을 느끼며 이제 그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포착했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엥.
보타스가 시케인의 안쪽을 파고들며 서준하를 코스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곧바로 다음 코너에서 유리한 자릴 점하기 위해 다시 바깥쪽으로 진로를 바꾸는데,
“...!”
상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서준하는 다시 한번 여전히 빠른 속도로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 분명 자신보다 바깥쪽에서 선회했음에도 루키는 뒤처지지 않았다. 이는 곧 드라이버가 엄청난 횡G를 이겨내며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았다는 얘기. 보타스가 진로를 막아서기도 전에 서준하가 먼저 4턴에 진입했다.
“한 번 더!!!”
코스의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15, 16턴에서 보타스가 또 한 번 서준하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보타스, 한 랩에서 너무 많이 시도하려 하지 마!
또 한 번 서준하의 디펜스로 주춤하는 보타스. 자신이 맬버른 서킷에서 가장 즐겨 하는 추월 시도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c, copy...”
쉽지 않은 추월에 당황한 보타스. 그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건 추월 시도 이후 조금씩 더 벌어지는 격차였다. 이젠 DRS 존에서도 1초 이상의 간격이 벌어져 쉽게 따라잡기도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보타스, 타겟 플러스 쓰리 오더다. 세 바퀴만 기록을 내보고 타이어 체인지하자.
어택에 매번 주춤했던 보타스의 랩타임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획보다 빠른 피트 스탑 오더가 내려지자, 보타스의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마치 자신의 앞에 커다란 장애물이 놓인 듯한 기분. 어택 패턴에 손쉽게 대응하는 루키의 움직임에 숨이 턱 막혀버렸다.
‘왜 먹히질 않는 거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무엇보다 페라리의 루키는 자신이 어떤 포인트에서 어떻게 추월을 시도할지 전부 알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될 것 같다는 절망감과 함께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런데,
“...!!!”
잠시 주춤하던 그의 곁으로 또 다른 포뮬러카의 배기음이 들려왔다. 윙미러에 보이는 레드불 레이싱 팀의 포뮬러카. 이번 시즌 또 다른 슈퍼 루키가 보타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XX...!!”
잠시 드라이빙에 집중하지 못한 건 분명 자신의 실수였지만, 다시 한번 페라리카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고 말았다. 건드리면 터질 듯한 성난 황소같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서는 막누스의 앞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
“사실 발트 보타스 선수는 페달링이 굉장히 강한 선수입니다. 섬세한 페달링 터치가 인상적인 이 선수는 타이어 관리나 숏런 페이스에서 엄청난 장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죠.”
MBN 2017 포뮬러 원 중계방송의 특별 해설 위원 임재원. 자동차 경주의 철인 3종 경기’라 불리는 WRC 올해 한국인 첫 월드랠리챔피언십(WRC) 테스트 드라이버인 그가 17시즌 국내 포뮬러 원 중계방송의 해설을 맡았다.
“이런 트레일 브레이킹은 종속 가속을 끝까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스피드 트랩에서 굉장히 강합니다. 즉, 직선 주로에서 격차 줄이고 바로 다음 코스에서 승부를 보는 선수인 거죠. 하지만...”
WRC 이전, 카트는 물론 한국인 최초로 F3 유럽 무대에서 활약했던 그의 전문적인 해설. 차분하고 명확한 설명에 다른 중계진들도 귀 기울이는데,
“놀라운 건 이런 보타스의 스타일을 앞차, 바로 서준하 선수가 전부 예측하고 대응한다는 사실입니다. DRS 존과 같은 직선 주로가 끝나는 코스는 보타스가 노리는 지점인데, 마치 서준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주차의 방향을 미리 바꿔놓고 코스 돌파합니다.
보타스 때문에 서준하 선수가 바깥쪽으로 밀리게 되더라도, 방향 전환을 미리 해놨던 터라 뒤차보다 재가속 타이밍이 빠르게 가져가죠. 추월에는 뒷심이 중요한데, 결국 보타스는 재가속에서 밀리면서 추월에 실패하고 맙니다. 거기에 돌파로 인해 타이어 부담까지 늘어난 상황이 되고 말았네요.”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보타스는 이어지는 코스들에서 속도를 높이지 못하게 됐고, 결국 서준하와 더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
“지금 레이스를 보고 계신 시청자분들 가운데, 메르세데스 팀을 응원하는 팬들도 많으셔서 제가 좀 조심스럽지만, 페라리의 서준하 선수의 예측 능력은 정말 베테랑 드라이버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노련합니다. 사실 어린 드라이버들에게 저런 즉각적인 대응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F3 시절 서준하의 레이스를 한두 번 봤지만, 오늘 서준하는 세계 최고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자신이 실제로 포뮬러 대회를 나가봤기에 드라이버가 신체적으로 겪는 고통과 성적 압박이 무엇인지 잘 알았고, 지금 저 위치에서 달리는 일이 대단한 건지 그는 절감할 수 있었다.
“드라이빙 스타일 자체도 우리나라 선수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도 아니고요. 이미 많은 이변을 만들어낸 선수지만, 앞으로 더 큰 기대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레이스가 끝나지도 않았지만, 임재원의 눈엔 서준하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각고의 노력이 보이는 듯했다. 자신의 경험상, 해외 포뮬러 무대는 정말로 한국인으로선 불가능한 무대였고,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으니까.
“이제 리카르도를 추격하는 서준하! 레이스 중후반 순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이제 한국에서도 톱 F1 드라이버가 탄생하는 일은 불가능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후배에게 대단한 존경심과 함께 이처럼 단단한 정신력을 가진 드라이버가 한국 선수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른데요?”
페라리 팀의 피트 월 가장자리. 수석 트랙 엔지니어(Head of track operations) 스텔라와 레이스 엔지니어 발디세르가 중계 화면에 등장한 서준하의 경주차를 두고 조심스럽게 얘길 나눴다.
“레이스 운용이 안정적이야. 뭐 따로 손댈 게 없어.”
일반적으로 레이스를 풀어나가는 건 드라이버와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의 몫이지만, 피트 스탑이나 공격과 방어 등 레이스의 큰 방향은 피트 월이 결정한다. 현재 서준하는 팀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레이스를 풀어나갔고, 스태프들은 그저 실수만 없길 바랄 뿐 별다른 오더를 내리지 않았다.
“데뷔전 퍼포먼스는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네. 오늘 레이스 마무리만 잘해준다면, 이젠...”
페라리 팀에서 모든 스태프들이 서준하를 높이 평가한 건 아니다. 여전히 어린 선수를 믿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시간 모터스포츠에 몸담은 두 사람에겐 어린 드라이버는 줄곧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곤 했다. 그들은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지나칠 정도로 승부욕이 과한 막무가내들도 많았다. 특히나 신뢰를 쌓아온 라이쾨넨과의 이별 이후 그들은 늘 걱정 속에서 시즌을 준비했다.
“아리바베네 감독님의 결단력이 역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책임자 입장에서 볼 때 한 시즌 전부를 내보내겠다는 건 정말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하지만 데뷔전에 이어 오늘도 활약 중인 루키의 모습에 그 걱정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의심과 걱정은 레이스 시작 전까지 불안으로 이어졌지만, 레이스 중후반이 되자 조금씩 기대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준다면, 충분히 세컨드로서 제 몫을 하는 거지. 이젠 퍼스트만 잘해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욕심 같아선 한 번 더 포디엄 피니시를 따줬으면 싶네요.”
현재 이미 시작 전 목표했던 4위에 랭크한 서준하. 보타스와 막누스의 견제에도 견고한 드라이빙은 물론, 타이어 관리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팀의 기대를 샀다.
“맬버른에서 리카르도를 추월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그렇죠, 그럼 이제 슬슬 공략하라고 할까요?”
피트월에서 떨어진 어택 오더. 서준하의 페라리카가 오늘 레이스의 히어로 리카르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레이스 시작 전, 많은 사람들의 응원 속에서도 서준하는 팀 스태프 몇몇의 불안한 눈빛을 봤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속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들의 불안과 걱정을 없애고 싶었다.
-42랩, 현재 앞차와의 간격 2.54초. 직전 랩보다 0.51초 당겼다. 조금 더 속도를 내도록
오늘 레이스에서 이긴다면 그 불안한 시선이 더 큰 기대감으로 바뀌게 될 거다. 더불어 지금까지의 성과들이 더는 우연이 아니었으며, 이제 드라이버로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될 터. 더는 자신의 이름 주변으로 행운과 우연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Fastest Lap - No.50 SEO]
[1:26.538 on lap 43]
본격적인 어택에 앞서 한 바퀴를 돌며 좀 더 과감하게 타이어를 쓰는 서준하. 서킷 구석구석 연석을 적극적으로 쓰며 밸런스보다는 최대한 빠르게 도는 데 집중했다. 그러자 곧 노란 경주차의 리버리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Red Bull Racing – TAG Heuer]
[No.3 D. Ricciardo]
페스티스트 랩을 만들며 팀과 팬들의 기대를 한껏 모은 서준하. 리카르도와 격차를 1초 이내로 줄이며 DRS 존에 들어갔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드라이버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뒤바꿀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레이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리카르도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간 서준하. 끊임없이 치솟는 속도와 함께 앞차의 리어윙과 닿을 듯 말 듯 달렸다.
훼에에에에에에엥.
“서준하! 순식간에 리카르도의 왼쪽으로 튀어나옵니다!!!”
오늘 레이스를 끝으로 서준하에 대한 평가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어리고 경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보단 가능성이 무한한 선수라고.
“곧바로 이어지는 DRS존! 이번엔 리카르도가 서준하의 뒤로 가까이 붙습니다!”
서준하가 리카르도의 앞으로 나오며 시즌 첫 포디엄 배틀을 시작했다.
< 그럼 이제 슬슬 공략하라고 할까요? > 끝